163화. 무슨 고민이 있는가?
공손단경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서류를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두 번을 읽었다.
그리고서는 또 다시 읽고 있다.
'은하검협 사후 정리가 어수선하다는 보고는 받았었지만, 그때는 종남의 차기 장문인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지.'
당시를 회상하는 공손단경.
전장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였다.
은하검협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으니.
거기에 종남의 장문인은 종남에서 정할 일.
주재승이 장문인을 하기에는 그릇이 모자라다는 평이 있음을 알았지만, 정천맹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마 이런 인물일 줄이야.
'전대 장문인의 손자를 경쟁자로 의식해서 견제한다라······.'
권력욕의 화신이랄까.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후환을 제거하는 능력은 탁월했으나, 시류를 읽는 눈은 없었다.
하필이면 하무백의 생도로 들어간 이를 건드리고 있으니.
"이것 때문에 종남파를 뒤집어엎겠다는 걸 텐데. 거참······."
난감했다.
어찌해야 할까.
마음먹고 난장을 피우면 맹주도 막지 못하는 인간이 하무백이다.
그런 그가 직접 자신에게 알렸다.
종남을 뒤집어엎겠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은하검협과의 연도 있고.'
등을 맞대고 싸운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무백에게는 전우인 셈이다.
전장에서 전사한 전우의 손자.
거기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생도.
공손단경이 파악하고 있는 하무백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나설 만했다.
"잔정이 많은 친구이니."
세상 제멋대로이고 내키는 대로 사는 것 같은 인간이지만, 그 내면의 일부를 공손단경은 알고 있었다.
하무백이 여전히 정천맹에 있는 것도 그런 잔정 때문이었음이니.
그와 함께 전장에서 동고동락했던 전우와 수하들이 여전히 정천맹에 있지 않나.
하무백은 그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혈교와 마교라는 불구대천의 원수를 상대로 함께 싸운 이들이었으니.
"딱히 나나 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군."
하무백과 종남파 둘 사이의 일이다.
종남파의 장문인을 정하는 데 정천맹이 나설 수 없듯, 그들의 문제에 정천맹이 나설 이유도 없었다.
그냥 두고 볼 수밖에.
공손단경이 붓을 들었다.
일필휘지로 명령서를 써서 구양명원에게 보냈다.
***
구양명원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가만히 복기해 보았다.
교룡관에 들어온 후.
하무백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노라 마음먹고 그 뒤를 쫓았다.
그런 하무백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관주각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문사.
기유찬이라 했다.
자신에게 이 서류 더미를 안긴 사내다.
하무백이 누군가를 소개해준다며 그에게 데리고 갔었는데.
잠시 대화를 좀 나누자는 요청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정신을 차리니 두 시진이 지나있었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하무백이 다시 나타났고.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종남파 뒤집어엎어도 덮어줄 수 있어?'
기함할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기에, 맹 아니 천목각으로 전서를 보냈다.
그 후.
다시 나타난 기유찬에게 이끌려 이 서류 더미에 앉아 있게 되었다.
"아니, 내가 할 일은 이게······."
"선배님. 이 후배의 업무가 너무 많아 고생이 크기에 도와주시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기유찬의 말에 구양명원의 황당한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선배라니.
자신은 저런 후배를 둔 적이 없다.
기유찬과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출신 학관에서도, 천목각에서도.
구양명원은 기유찬을 만난 지 이제 고작 두 시진 반이 지났을 뿐이다.
천목각의 핵심 인사 중 하나인 자신이.
어쩌다 고작 교룡관의 업무를 처리하는 문사에게 말려서 이러고 있을까.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박차고 일어나려 했으나 그럴 수도 없는 것이, 그와 함께 서류 더미를 처리하고 있는 인사가 문제였다.
교룡관부관주.
연가주의 막내아들.
연백진.
'대체 교룡관은 어떤 곳이냐.'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애초에 교룡관에 들어서 관주각을 찾은 하무백에게 자신이 당한 것이다.
기유찬이라는 인간을 소개해주었을 때.
'그때 이미 당했구만······.'
하무백을 귀찮게 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내겠다 마음먹었건만.
오히려 자신이 엄청난 업무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기유찬은 귀신같이 업무를 분류해서, 교룡관에 대해서 잘 몰라도 처리할 수 있는 업무만 자신에게 몰아주었음이니.
하무백은 관주각 처마 아래 공간에서 창을 통해 그 모습을 만족스레 지켜보았다.
"쯧. 사람을 귀찮게 굴면, 자신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기유찬 위사, 참 마음에 드는 친구야."
하무백이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구양명원에게 엄청난 일거리를 던져줌은 물론이거니와, 관주에게 그에 대한 보고까지 마친 기유찬.
하무백의 생각에 이곳 교룡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관주가 아니라 그였다.
관주가 없어도 교룡관은 돌아가지만, 그가 없는 교룡관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하무백이 잠깐 멈춰 섰다.
'그런데 담룡각의 그 일. 저 인간이라면 알았을 것 같은데······.'
문득 그 쓰레기 같았던 음식들이 떠올랐다.
교룡관의 대소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저 인간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텐데.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잠시 이런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지난 일이고, 해결되었으니.
***
"종남의 긍지."
백리평이 작게 중얼거렸다.
"종남의 긍지."
다시 한 번.
"종남의 긍지."
또 한 번.
대체 몇 번을 이렇게 중얼거렸을까.
그럼에도 답이 나오지가 않았다.
교관님이 이 말을 꺼낸 이유가 무엇일까.
종남이라는 이름 앞에 당당하라.
그것과 장문인의 명에 반기를 드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삼재심법을 익히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문제였다.
장문인의 명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곧 반역을 의미함이니.
긍지를 떠나, 종남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그랬기에 종남의 제자인 백리평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교관님이 자신의 퇴관을 승인하지 않겠다 하셨으니, 일단 당장 종남으로 돌아갈 일은 없었지만.
"허허. 다들 돌아간 모양인데 무엇 하고 있는가?"
빗자루를 든 위지군의 말소리에 백리평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미 사위에 어둠이 내려 있었다.
하설란 역시 수련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갔기에, 위지군은 밀린 청소를 하러 빗자루를 들고 나선 참이었다.
그때 연무장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백리평을 발견한 것이다.
"아, 어르신."
이제는 안다.
저 노인이 단순한 일꾼이 아님을.
"무슨 고민이 있는가?"
위지군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백리평.
이내 그의 입술이 달싹이며 움직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인자한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같은 조의 동료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
"흐음. 그렇구만. 장문인의 명에 반기를 드는 것이 사문에 대한 반역이라······. 어려운 문제로구만. 위계와 법도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야."
위지군의 말에 백리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의 핵심을 짚는 말이었다.
"그런데 말이네. 장문인이 곧 사문이던가?"
이어진 물음에 멈칫했다.
"장문인의 명이 사문의 명인가?"
다시 이어진 물음.
"장문인의 명을 거부한 것이, 사문의 명을 거부한 것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물음.
어려웠다.
"장문인은 유한한 존재일세. 사문이 유구하다 할 수 없을는지도 모르겠네만. 장문인은 여럿이었어도, 사문은 단 하나이지. 그렇지 않은가?"
백리평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이런. 내가 고민을 더 복잡하게 꼬아 버렸나 보군. 날이 차니 어서 들어가 보게나."
위지군은 그리 말하고 다시 빗자루질을 하며 사라졌다.
백리평은 터덜터덜 맹룡숙으로 향했다.
그리고 위지 노인의 물음을 곱씹었다.
종남은 단 하나다. 하지만 장문인은 여럿.
과연 장문인이 종남일까.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종남의 긍지를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려웠다.
그랬기에 걸음이 방향을 바꿨다.
교관들의 숙소.
그곳으로 가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좀처럼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침상에 누워있던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숙소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 때문이었다.
"하아. 귀찮게."
하무백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뭐냐?"
하무백의 짧은 물음.
"아. 교관님!"
생각에 잠겨 있던 백리평이 고개를 들었다.
"저, 그게······."
백리평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무백은 마냥 귀찮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화두를 던진 이가 자신의 사부였기에.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종남의 긍지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던졌던 말이 되돌아왔다.
하무백은 백리평의 질문에 자신이 기억하는 은하검협의 모습을 떠올렸다.
"네 할아버지가 걸어온 길이 곧 긍지겠지. 협(依)이라는 별호는 아무에게나 붙는 게 아니다."
"······."
"그리고 나는 네게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라 한 적 없는데? 내가 퇴관 승인을 안 해준다는 거지. 네 녀석이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는 게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자신이 확대해석했을 뿐.
"쯧. 진지한 성격이 이럴 때는 피곤하네."
하무백이 혀를 차며 말했다.
백리평의 얼굴에 원망의 표정이 떠올랐다.
긍지라는 말을 꺼내서 자신을 고민에 빠뜨린 당사자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정당한 길을 가는데, 부당한 이들의 압박을 걱정하는 것. 백리 영감님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걱정이야. 그저 옳은 길로 나아 갈 뿐."
백리평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완벽히 오해했다.
교관님이 긍지를 이야기 한 것은 종남에서 가할 부당한 압박을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맹칙과 관칙에 따라 정당한 조치를 취하고 있으니 그저 그에 따르고 있으면 된다 말해준 것이다.
"그럼, 가서 자라. 귀찮게 하지 말고."
하무백은 그 말을 남기고 숙소로 돌아갔다.
***
다음날.
교룡관 전체가 어수선했다.
잠룡대와 와룡대 생도들 대부분이 떠났기에 조용한 것은 여전했다.
헌데, 공기가 달랐다.
하무백은 아침부터 대번에 그것을 느꼈다.
"대연무장 쪽인가?"
소란의 근원지를 파악한 하무백은 호기심에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연무장에서 익숙한 기척도 다수 느껴졌기에.
"아, 교관님."
단목운뢰가 가장 먼저 하무백을 발견했다.
그 자리에는 맹룡대 칠 조 생도를 비롯해서 주우명과 하설란, 한설빙까지 있었다.
"오라버니. 오셨네요."
"어제는 네가 수련에 너무 열중하고 있는 터라 들르지 않았다."
하무백의 말에 하설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수련에 열중하느라 오라버니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음이니.
"며칠 사이 많이 좋아졌구나."
이어진 하무백의 칭찬.
하설란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어렸다.
"헌데 이건 무슨 일이야?"
하무백의 물음이 당진산에게로 향했다.
이런 걸 묻기에 가장 좋은 이는 역시 그였으니.
"맹룡대 이 년차 생도들의 출정식이랍니다."
그리 답하는 당진산의 심사가 복잡한 듯했다.
저들은 모든 과정을 마치고 이제 산월마림으로 떠난다.
헌데 그 출정식이 너무도 초라했다.
그들에게 방패술을 열과 성으로 가르쳤던 제갈명 교관.
나와 있는 이는 그 하나였다.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리려는 찰나ㅏ.
두 개의 기척이 대연무장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관주 팽도율과 맹룡대주 모용진호였다.
하무백의 시선이 맹룡대 이 년차 생도들에게 향했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출관을 하는데, 하나같이 그 얼굴이 어두웠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들이 향할 곳은 산월마림이니.
하무백이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기척이 대연무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