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뭔 개소리야?
깊은 새벽의 수련을 마치고, 숙소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하무백.
"응?"
그가 눈을 떴다.
기감에 걸린 생소하지만 익숙한 기척 때문이다.
"종남에서 사람을 보낸 건가?"
종남의 무공을 익힌 이들의 기척. 그중 하나는 어딘가 낯익었다.
전장에서 함께한 기억이 있는 자.
"종남팔검 중 일검이로군. 은하검이 왜 여기에······."
은하검은 남화룡의 별호였다. 지난 전쟁에서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 얻었던.
종남의 장문인이었던 은하검협의 별호와 유사했기에 더없이 송구스러워하며 기뻐했던 별호.
그랬기에 그는 본명보다도 별호로 불리는 것을 더 선호했던 인물이다.
그가 무창을 찾은 이유는 짐작이 되었다.
백리평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은하검이 무창에 온 것은.
"과해."
그랬다.
과했다.
현 종남의 일대제자 중 은하검협의 무위를 이어 종남제일검이 될 인물이 은하검 남화룡이다.
하무백은 그렇게 평가했다.
그런 이를 고작 열아홉, 아니 이제 스물 먹은 애송이를 데려오라고 보내다니.
"일단 가 봐야겠군."
생도들은 오늘도 연무장에서 수련에 열심이었다.
이제는 하설란도 다시 합류했기에, 한설빙이 연무장에 함께 있었다.
"휴관기에 뭐하는 짓들인지."
귀찮다는 듯 중얼거리는 하무백.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흐뭇함이 자리해 있었다.
***
"백리평. 그 애새끼가 어디에 있다고 했지?"
"장 사제의 말로는 맹룡대에게 배정된 연무장에 매일같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주시운의 말에 팔검 중 삼검이 서둘러 답했다.
"바로 그리로 간다. 위치는 확인했겠지?"
"네."
출발할 때 마침 종남에 도착했던 장이걸에게 교룡관과 백리평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백리평에 대해 말해주는 장이걸의 표정이 복잡했지만 삼검은 개의치 않았다.
교룡관의 정문.
주시운은 당연하다는 듯 당당히 걸어 들어갔고, 수문위사가 그들을 막았다.
"멈추시오! 어디서 오시는 분들이오?"
그의 기세는 엄정했다.
"넌 뭐냐. 미천한 놈이 대종남의 대제자 앞을 가로막다니. 죽고 싶은 게냐?"
자신의 앞을 막은 창대를 보는 주시운의 두 눈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수문위사는 주시운의 기세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몸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살기를 느낀 것이다.
명문정파인 종남의 대제자라는 이가 이런 살기라니.
서둘러 다른 수문위사 한 사람이 더 붙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소식을 전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남화룡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앞으로 나섰다.
"종남에서 온 남화룡이라 합니다. 본파의 제자 문제로 교룡관을 방문했습니다."
그러고는 종남에서 받아온 배첩을 내밀었다.
그제야 흉흉해지려던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진작 이렇게 말씀해 주시지요. 보고를 올릴 터이니 일단 들어가십시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접객당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수문위사가 창을 거두고 비켜섰다.
"쓸데없이 나서지 마라."
주시운은 음산한 목소리로 남화룡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창에 막 도착했을 때의 짜증에 가득하던 폭급한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살기 가득한 본모습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그의 앞을 가로막은 수문위사 때문인 듯했다.
비루한 무인이 감히 자신에게 창을 들이댔다는.
본파에서도 가끔 보았던 대사형의 모습이었기에, 남화룡은 자신을 향한 경고도 그냥 넘길 수 있었다.
대신 수문위사들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뒤를 따랐다.
주시운은 안내받은 접객당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검의 안내대로 걸음을 옮겼다.
"대사형.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일단 접객당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끄럽다, 화룡. 저런 비천한 놈이 나에게 창을 들이대는 곳 따위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 백리평. 그 버러지 같은 새끼만 잡아서 바로 돌아간다. 감히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다니."
그는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단지 이유가 그뿐인 것은 아니었다.
주시운은 젊은 시절 잠룡대에 지망했다가 탈락한 전력이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은 어지간하면 받아준다는 그 잠룡대에.
그런 교룡관을 다시 찾았는데, 입구에서부터 막혔으니 짜증이 차오른 것이다.
'사숙.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남화룡은 그런 주시운의 모습에 사숙의 당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장문인이 난리를 쳤을 때, 집법원주 소중산이 그에게 은밀히 당부를 했다. 혹시나 사달이 날 수도 있으니 네가 잘 처신하라고. 배첩을 전해준 것도 소중산이었다.
그때만 해도 설마 정말로 자신을 보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아니, 차라리 자신만 보내는 것이 나았다.
저 망나니 대사형과 함께라니.
그는 폭급하고 화가 많으며, 인정머리라고는 없었다. 잔인한 모습을 보일 때는 한없이 차갑고 냉정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괴랄한 성정.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절대 명문정파의 대제자다운 성정은 아니란 것이다.
일행의 구성이 절묘했다.
대사형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삼검과 육검, 거기에 자신을 붙였으니.
남화룡은 잠시 고민했다.
저들을 그냥 두자니 불안했고.
그렇다고 접객당에 들리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니었기에.
결국 그는 서둘러 접객당으로 향해, 그곳을 지키는 교룡관의 위사에게 사정을 전하고 빠르게 일행의 뒤를 쫓았다.
제법 거리가 벌어진 터.
교룡관의 지리를 몰랐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이 선명했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 뒤를 따랐다.
"네 이놈, 백리평!"
막 따라잡아 간다 싶을 때.
대사형 주시운의 커다란 고함이 들렸다.
결국 남화룡은 경공을 펼쳐 소리가 들린 곳으로 치달릴 수밖에 없었다.
주시운은 잔뜩 화가 난 눈으로 연무장의 백리평을 노려보고 있었다.
연무장에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난입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직 한 명.
백리평만이 난감한 얼굴로 주시운을 바라보았다.
백리평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다시 입을 여는 주시운.
"사문의 존장이 왔는데, 그렇게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것이 과연 돼먹지못한 버러지 놈답구나."
이번에는 화가 담긴 커다란 고함이 아니었다. 대신 살기가 담긴 조곤조곤한 음성.
하지만 내공을 실었기에 백리평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백리평은 마지못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종남의 제자 백리평이 사백을 뵙습니다."
백리평의 말에 그제야 생도들은 그들이 종남에서 나온 이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했다.
"긴말할 것 없다. 당장 따라와라. 바로 종남으로 갈 것이니."
주시운의 말에 생도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건 갑자기 무슨 황당한 말이란 말인가.
백리평이 왜 종남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곳으로 보낼 때는 언제고.
생도들은 백리평이 장문인의 명으로 맹룡대에 입관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간 동고동락하면서 그 정도로 깊은 사이가 된 것이다.
더 자세한 사정은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지만.
"뭔 개소리야?"
그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렸다.
어느새 나타난 하무백이 삐딱한 얼굴로 주시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은 뭐냐?"
주시운이 차가운 눈으로 하무백을 노려보며 물었다.
"나? 얘들 교관. 그러는 넌 뭔데?"
"이번에도 하찮은 놈인가? 이곳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군. 감히 대종남파의 대제자인 나에게 그딴 망발이냐?"
살기 가득한 음성으로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주시운.
"그게 뭐? 여긴 교룡관이다. 종남파가 아니라."
어느 집 개가 짖고 있나 하는 태도로 대꾸하는 하무백. 심지어 한쪽 손으로 귀까지 파고 있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생도들은 슬금슬금 하무백 근처로 모였다.
남화룡은 난처한 얼굴로 주시운 곁에 섰다.
참으로 난감했다.
백리평의 교관이라는 저 자.
안면이 있었다.
없을 수가 없었다.
지난 전쟁에서 언제나 가장 치열한 전장으로 달려들던 이였으니.
"역시 근본 없는 것들은 어쩔 수가 없군. 이곳이 교룡관이면 어떻고, 종남이면 어떠하냐. 내가 대종남의 대제자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 것을."
주시운의 몸에서 슬금슬금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 진데.
남화룡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일단 주시운을 말렸다.
여기서 사달을 일으킬 순 없었다. 특히나 저 자를 상대로는.
"사형. 일단 진정하시지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남화룡.
"그리고 저 교관은 예사 교관이 아닙니다. 지난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활약한 무인입니다."
주시운의 시선이 남화룡에게로 향했다.
"네놈은 지금 이 사형이, 지난 전쟁 때 문파에 꼭꼭 숨어 있었다고 힐난하는 게냐?"
살기가 남화룡에게로 향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걸까.
상대가 예사 인물이 아니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 조언한 것이.
"저놈이 지난 전쟁에서 활약을 했든 뭘 했든, 내가 종남의 대제자고 저놈은 천한 교관 나부랭이일 뿐이다."
하무백은 우습다는 듯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았다.
대제자라는 놈을 말리려 애를 쓰는 중년 무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기척으로 그가 왔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은하검.
치열한 전장 속 은하검협 백리단의 뒤에서 정말 열심히 검을 휘두른 종남의 일대제자.
백리단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종남의 차기 장문인이 되지 않을까 싶은 인재였다.
그런데 저런 녀석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이라니 안타까웠다.
"알만하군. 종남에 망조가 들었네."
하무백이 중얼거리듯 한 말에 주시운의 고개가 다시 하무백에게로 돌아갔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뱉다가는 죽는 수가 있다."
으르렁거리며 살기를 가득 담아 말하는 주시운. 그의 옷이 서서히 부풀고 있었다.
하무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시운을 바라보았다.
참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죽일 능력은 있고? 보아하니, 여기 백리평만도 못한 실력일 듯한데? 백리평을 가르치는 교관인 나를 죽이겠다고?"
하무백의 말에 백리평이 깜짝 놀랐다.
갑자기 자신과의 실력 비교라니.
"큭큭. 크크큭. 크하하하하!"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는 주시운. 그의 두 눈에는 살기와 함께 어처구니없음이 자리했다.
"우습군. 저 버러지 같은 이대제자 놈이랑 감히 이 몸을 비교해? 나오너라. 내 당장 한 팔을 잘라주마."
주시운의 손이 검병을 잡았다. 그의 기운이 당장이라도 옷을 터뜨릴 듯 뿜어져 나왔다.
데려가야 할 아이를 두고 담당 교관의 팔을 잘라 버리겠다니.
남화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삼검과 육검은 하무백의 도발에 넘어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대사형이 당한 모욕을 마치 자신들이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붙으려면 백리평부터 이기고 오라고. 네놈은 수준 미달로 보이니, 실력을 먼저 증명하라는 말이야."
주시운의 두 눈에서 살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 살기 가득한 눈빛이 백리평에게로 향했다.
"네 담당 교관이라는 잡놈이 그렇다는구나. 검을 들어라."
그리고 백리평을 향해 내려진 명령.
백리평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하무백과 주시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사형. 진정하십시오. 일대제자와 이대제자의 비무라니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남화룡이 황급히 주시운을 말렸다.
그의 무위를 잘 알고 있는 남화룡이다. 그리고 하무백이 어떤 인간인지는 전장에서 겪은 바가 있고.
승산이 없는 일에 나서면 안 될 터.
일단 말려야 했다.
"네가 낄 문제가 아니다. 내가 저 새끼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네놈은 저 새끼 편을 드는구나."
주시운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사형. 그래도 문파의 법도가 있습니다."
남화룡이 그 살기를 무시하고 말했다. 기실 남화룡에게는 위협적이지 않기도 했고.
문파의 법도를 들먹이니 주시운이 잠시 입을 닫았다.
"아, 문파의 법도!"
오히려 그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하무백이었다.
"분명 그렇겠네. 종남파 정도 되는 명문정파라면 엄정한 법도가 있는 법이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는 하무백.
저 자는 또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법도를 확인하는 게 먼저겠군. 좋아. 백리평. 나와 같이 종남으로 가자. 종남에서 그 법도를 확인한 후에 저 비루먹은 놈과 붙어봐."
"교, 교관님. 제가 어찌 사백과 비무를······."
자신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그저 앞으로 곧장 직진하는 하무백의 말에 당황한 백리평이 더듬더듬 말했다.
하무백이 백리평을 바라보았다.
"왜, 자신 없냐? 저딴 놈한테 질 것 같아?"
이번에는 백리평을 향한 도발.
하무백이 무슨 생각인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 그게······."
난감한 처지의 백리평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질문이지 않은가.
사실 사백이라 하지만 이길 자신은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와 기세가 무섭기는 했다. 헌데 마주하고 있는 지금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랬기에 긍정할 수 없었다.
부정은 더욱 할 수 없었다.
사문의 존장을 우습게 여기는 하극상을 범하는 것이기에.
"죽을 자리를 직접 고르겠다는데, 내가 거부할 이유는 없지. 좋아. 종남으로 함께 가도록 하지."
주시운이 살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의 두 눈은 살의로 번들거렸다.
종남에 가서 그와 검을 맞대면 정말로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교, 교관님······."
백리평은 정말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그저 맹룡대 칠 조에 남아 있고 싶었을 뿐이다.
교관님은 자신이 승인하지 않을 테니 그러라 했고.
헌데 종남에서 사람이 찾아오고, 교관님과 다툼이 생기고, 자신이 종남으로 가서 사백과 비무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니.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교관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근데 이건 알아 둬라. 난 아직 이 녀석 퇴관에 대해 승인할 생각 없다."
거기에 덧붙인 하무백의 말.
그 말에 주시운의 곁에 있던 삼검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