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내일
종남의 각기 다른 곳으로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두 마리 모두 무창에서 날아온 녀석들이다.
한 마리는 장문인에게, 다른 한 마리는 집법원에 내려앉았다.
주재승과 소중산에게로 전해진 각기 다른 전서.
주재승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감히!!!"
하무백의 언행이 그대로 적혀 있는 전서에 주재승은 분노했다.
이런 개잡놈이 감히 종남을 욕보이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하지만 비무 조건을 보면서 이내 화를 식혔다.
"이놈 미친놈인가?"
그냥 죽여 달라는 조건이었으니.
백리평과 제 아들의 비무?
그놈이 동투제에서 제법 두각을 보였다고 하나, 스무 살 내외의 어린놈들의 재롱잔치 같은 비무 대회다.
어디 종남의 일대제자, 그것도 대제자인 자신의 아들과.
거기에다가 교관이라는 놈은 종남에서 정한 사람과 비무를 벌이겠다고?
비무는 서로의 무를 겨루는 것이라 하지만, 사건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난다.
비무 중 사고로 죽는 이도 있을 정도.
"그래, 칼에는 눈이 없는 법이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아들의 대응이 제법 흡족했다.
굳이 가기 싫다는 아들 녀석을 교룡관에 보낸 보람이 있는 듯했다.
비슷한 내용의 전서를 받아 든 소중산의 얼굴은 어두웠다.
남화룡이 보낸 전서.
그곳에 쓰인 내용은 절로 걱정이 들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하무백.
지난 전쟁의 숨겨진 영웅.
소중산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도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종남을 지켰기에.
하지만 대사형인 백리단이 보낸 서신에 그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왔었다.
"사형을 뛰어넘는 훌륭한 무인이라고 했던가······."
서신을 받던 당시에는 과장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형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굳이 과장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남화룡의 의견 역시 그랬으니.
남화룡은 지난 전쟁에 참전하여, 은하검이라는 별호를 얻지 않았던가.
그런 그도 하무백이 엄청난 무인이라 평하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소중산은 자신의 옛 친우를 떠올렸다. 현재 개방의 장로가 된.
***
전서는 정천맹 천목각으로도 날아갔다.
기유찬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구양명원이 하무백과 종남파 사이의 일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기유찬 덕분이었다.
그가 관주 팽도율에게 그때의 일을 듣고 와서 알려 주었으니.
팽도율이 증인이 되어준 문서.
그 초안을 작성한 것이 기유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서를 모두 살핀 공손단경.
"쯧. 종남의 장문인이 바뀌겠구만."
하무백의 노림수가 너무도 노골적으로 보였다.
종남 쪽이 아주 허술하게 하무백의 수작에 말려든 것이다.
"그래도 제발 죽이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공손단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종남의 검에만 눈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무백의 검에도 눈이 없었다.
"어떻게 한다······."
공손단경의 고민이 길어졌다.
***
어제 그런 소동이 있었다 해서 오늘의 일과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은 오늘도 연무장에 모여서 수련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설란과 주우명 역시 함께였고, 한설빙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무백이 나타났다.
그저 담담히 생도들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그중 가장 눈이 많이 가는 이는 당연히 하설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하무백에 다가가는 한설빙.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한설빙의 물음에 하무백은 간략히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백리평에게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극히 적었기에.
다만, 어제 종남의 대제자라는 이가 백리평을 데려가겠다고 이야기한 것에서 무언가 일이 있다고 짐작만 할 뿐.
"종남의 장문인을 갈아치울 생각이로군요."
간단하게 하무백의 의도를 파악한 한설빙.
"그거야 종남에서 결정할 일이지."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
한설빙은 그 말에서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죽이지는 않을 생각이네요."
비무 중의 사고로 장문인을 죽여 버리면, 자연히 장문인이 바뀔 수밖에 없다.
헌데 하무백은 장문인을 갈아치우는 문제는 종남의 몫이라 했으니.
"누굴 살인귀로 아는 거냐?"
하무백의 어처구니없다는 물음에 오히려 한설빙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전장에서 혈교와 마교를 상대하는 하무백은 악귀 그 자체였음이니.
"혈교도, 마교도 아니잖아.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하무백의 시선이 하설란을 향했다.
"나참······."
그 시선을 따라간 한설빙이 피식 웃었다.
하설란은 땀을 흘리며 검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수련하고 있는 것은 삼재검법.
사부님에게 무극검문의 입문 검법 역시 배웠으나, 항시 수련의 시작은 삼재검법이었다.
"검식이 많이 좋아졌어."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
"열심히 하거든요."
한설빙의 대답.
"다행이야."
"네?"
갑작스러운 말에 되묻는 한설빙.
"동투제가 끝나고 나서 너무 자주 혼자 두는 것 같아서."
물론 한설빙도 있고, 사부님도 있었지만.
유일한 가족인 하무백 자신이 자꾸 곁을 비우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챙기지 않아도 저렇게 집중하고 있으니,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무공 수련에 열중한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집중하는 것이 있으면 시간은 빨리 흐르기에.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다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언제 갈 거예요?"
"내일."
"종남 사람들이랑 이야기는 된 거예요?"
"어차피 종남에서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걸."
그냥 자기 편한 대로 내일 출발하겠다는 소리다.
하무백다웠다.
"저희도 함께······."
한설빙이 말을 꺼내려 할 때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한설빙이 하무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파 놈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거든. 그러면 란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게 될 지도 몰라. 그게 위험하다는 거야."
그랬다.
산월마림에서 강시들을 도륙하던 모습이나, 어마어마한 병기를 사용하는 적 하나를 상대하던 모습.
그런 것과는 달랐다.
무수한 사람을 베어 넘기는 모습은.
하설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으리라.
"알았어요."
수긍한 한설빙은 순순히 물러났다.
"종남 장문인이 불쌍하네요."
죽이지 않겠다 했지만, 종남이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말에서 알 수 있었다.
하무백이 마음먹고 박살을 낼 생각이라는 것을.
그럴 때 상대가 어찌되는지는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작게 고개를 젓는 한설빙.
"오라버니!"
그때 하설란이 다가왔다.
어느새 휴식 시간이었다. 생도들이 자체적으로 한 시진 사이에 두는 일 각의 휴식시간.
그녀는 기감으로 진작에 하무백이 왔음을 알고 있었으나, 수련에만 열중했다.
하무백이 빙그레 웃으며 동생을 맞았다.
"검이 점점 좋아지는구나."
다정한 목소리.
칭찬에 하설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유극오형은 어떠냐?"
유극오형(有極五形).
무극검문의 모든 무공 기초를 집대성한 입문 무공이다.
검으로 펼치면 검법이, 권으로 펼치면 권법이, 그 발놀림은 신법이 되는 입문공.
하설란은 현재 검으로 유극오형을 수련하고 있으니, 곧 유극오검이라 할 수 있었다.
"보여드릴게요."
하설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일 각의 시간이 흐르고 생도들은 저마다 수련을 다시 시작했다.
하설란은 신중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리고 점점 빠르게, 마지막에는 극히 느리게.
사부님께 배운 수련의 방식이었다.
하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수련하고, 열심히 한 흔적이 잔뜩 모였으니.
삼재검법보다는 변화가 조금 더 복잡한 편이지만, 사실 큰 차이가 없는 정도다.
입문공이자, 기본공이었으니.
하무백은 한 달 수련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갔었다.
당시의 그는 복수심에 미쳐서, 어떻게든 빨리 강해지고자 하였다.
그랬기에 유극오형을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거의 이십 년만인가?'
추억이랄 것도 없는, 치열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동생의 유극오형을 바라보는 하무백.
하설란은 기본에 충실하게 그 형 하나하나를 펼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설란의 유극오형이 반복될수록.
하무백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에는 그저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대견한 표정으로 동생의 무공 수련을 바라보던 그.
허나 반복되면 될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진중해졌다.
'유극오형이 저런 무공이었던가?'
무공에 입문하여 처음 수련할 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머리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허나 거기까지.
어둠이 내려 그날의 수련이 끝날 때까지 그 이상의 무엇은 없었다.
***
"지금 종남으로 출발한다. 그 잡놈들 데려오너라."
이른 아침 주시운이 말했다.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남화룡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지금 처음 하는 것이었으니.
"지금 출발한다."
"미리 말씀 해주시고 준비할 시간을 좀 주는 것이······."
남화룡이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삼검과 육검 두 사람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 역시 아무런 준비 없이 아침에 막 일어나 식사를 하려던 모습 그대로였으니.
"종남으로 가는 걸 결정하는 것은 우리야. 그 잡놈들이 따라야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주시운. 그가 남화룡을 쳐다보았다.
"뭘 그러고 있느냐. 어서 다녀오지 않고. 나는 그딴 곳에 더 이상 가기 싫다."
삼검과 육검이 있음에도 일검인 남화룡을 콕 집어 다녀오라 하고 있었다.
대사형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종남팔검의 일검이, 이곳에서는 그저 심부름꾼이 되어 버렸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가 객잔 별채를 나서 교룡관으로 향했다.
남화룡이 돌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였다.
"응? 그 개잡놈들은?"
데리고 와야 할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시운과 삼검, 육검은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
도착하는 대로 바로 떠날 생각이었건만.
"그것이."
남화룡이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떠났다고 합니다."
이어진 말.
뿌드득.
주시운의 입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번들거리는 그의 눈이 그가 분노한 정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감히······."
그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출발한다. 하루거리 정도는 길을 서두르면 따라 잡을 수 있다. 그 개잡놈들을 당장 잡아야겠다."
그렇게 네 사람은 급히 떠났다.
채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남화룡은 서둘러 자신의 짐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남화룡의 날카로운 눈이 삼검과 육검의 등을 노려 보았지만, 그들은 주시운의 곁에 딱 붙어 있을 뿐이었다.
***
강바람이 차가웠다.
그럴 수밖에. 아직 한겨울이다.
게다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추워질 터.
갑판의 난간에 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하무백의 곁에 백리평이 있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백리평.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라. 어제부터 뭐 하고 있는 거냐?"
하무백이 불쑥 말했다. 그 말에 백리평의 입이 열렸다.
"그, 종남산으로 가는 길은 육로가 좀 더 빠른데, 왜 굳이 수로로 가시는지······."
장강삼협에서 무창까지는 강의 흐름을 타고 오는 것이기에 수로가 빠르고 편했다.
하지만 무창에서 장강삼협으로 가는 길은 그 반대다. 물길을 거슬러 가야하기에 아무래도 느릴 수밖에 없었다.
"죽자 사자 달리는 것보다 편하잖아. 그리고 우리가 굳이 빨리 갈 필요도 없고."
"그러면 왜 굳이 빨리 출발신 것인지요."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수단으로 가는 거지. 뭘 그런 것을 신경 쓰고 그러냐. 나라면 그럴 시간에 선실에서 심법 수련이든 명상이든 할 것 같다만."
"아, 네. 알겠습니다."
선실로 향하는 백리평.
하무백은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지금쯤 죽어라 달리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