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이렇게 치졸하다니
백리평이 주시운을 마주 보고 섰다.
"검을 뽑아라. 삼 초를 양보해주마."
주시운이 백리평에게 말했다.
하무백은 그 모습을 같잖다는 듯 바라보았다. 온몸에 살기를 저렇게 흘리고 있으면서 삼 초를 양보해준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괜찮습니다."
백리평이 그리 답하며 검을 뽑았다.
새하얀 검신이 아침 햇살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건방진."
주시운 역시 검을 뽑았다.
삼 초의 양보를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타핫!"
말도 없이 먼저 몸을 날리며 검을 뻗었다.
무수한 변화를 보이며 백리평을 향해 날아가는 검.
천성은하검법!
종남을 대표하는 절기였다.
일대제자는 되어야 익힐 수 있는 종남의 진산절학.
아니, 종남 최고의 검법이었다.
주시운은 시작부터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상의 검공을 펼친 것이다.
살기를 가득 머금고 날아가는 검은 하나같이 백리평의 사혈을 노리고 있었다.
제대로 맞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급소들.
하무백은 이미 짐작한 듯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비무의 탈을 쓴 생사결.
주시운은 지금 생사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이들이 사 할 정도.
나머지는 덤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육할 정도 장악한건가?'
하무백은 종남 제자들의 표정에서 주재승의 영향력을 추측했다.
챙! 채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천성은하검법에 맞서는 백리평의 천성검법.
종남의 제자라면 절대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천성검법으로 천성은하검법을 막아내다니.
두 검법은 엄연히 상하의 격차를 가졌다.
천성검법은 어디까지나 천성은하검법을 익히기 위한 준비단계의 검법이었다.
그 말인즉슨, 천성검법은 천성은하검법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더 복잡한 변화와 강한 기운을 가진 것이 천성은하검법이었으니.
그런데 백리평은 천성검법으로 당당히 천성은하검법에 맞서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곳곳에서 깜짝 놀란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주재승과 그의 사형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오직 한 사람.
장이걸. 그만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았다.
장이걸은 이미 동투제에서 백리평이 펼치는 천성검법을 보지 않았던가.
"이, 개잡놈이······."
욕설을 흘리며 검을 움직이는 주시운.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자신의 무위가 종남팔검에 들지 못할 정도라는 하나.
자신이 펼치는 검법은 천성은하검법이다.
종남의 이대제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을 상대로 삼십 초를 넘기지 못했다.
가장 오래 버틴 놈이 딱 삼십 초째 무릎을 꿇었으니.
그런데 벌써 사십 초가 넘도록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천성은하검법과 천성검법이 쾌검의 묘를 지니고 있기에 주고받은 초식의 수가 많았다.
어찌 천성검법이 천성은하검법의 속도와 변화를 따라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천성검법이 밤하늘을 수놓는 별이라면, 천성은하검법은 그 별들이 도도히 흐르는 은하수였다.
멈춰있는 별이 움직이는 별을 당할 수는 없는 법.
그런데, 지금 그 상식이 깨지고 있었다.
"허어······."
유심히 두 사람의 비무를 살피던 소중산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것은 남화룡 역시 마찬가지.
백리평이 펼치는 천성검법의 비밀을 알아본 것이다.
그것은 홀연히 나타나 주재승의 곁에 자리한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아이로군. 역시 단이의 손자라는 건가."
주재승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했으나, 이내 사라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숙."
종남의 전대고수.
백리단이 장문인에 오르며,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의 장문인과 호법 장로들이 원로원에 들었었다.
주재승은 오늘 그런 전대의 원로들 중 한 사람을 청한 것이다.
하무백와 백리평이 정문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급히 사람을 보냈다. 비무에 대한 이야기야 이미 전에 해두었던 터고.
종남을 욕보인 놈과의 비무라 했기에 흔쾌히 나선 전대 원로, 종패진.
그는 전대 종남제일인이었다.
주재승은 그의 사질이나, 현 종남을 책임지는 장문인이었기에.
종패진이 나름의 예를 갖추어 물었다.
"장문인은 모르시겠소?"
"제자가 어리석어 모르겠군요."
보통의 이라면 겸손의 말이었겠으나, 주재승의 경우는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장문인이라는 직위가 그 말을 겸양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천성검법을 펼치는 속도가 다르오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재승.
"속도가 빨라진 만큼 변화가 늘어난 것이오."
자세히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건만.
눈을 껌뻑거리는 주재승.
그러길 잠시.
"아···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제야 겨우 그 의미를 깨닫고는 물었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가능한 일인 게지요."
맞는 말이다.
지금 그것을 행하고 있는 이가 있는데, 가능하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
주재승은 이를 악물고 백리평을 노려보았다.
저런 재능이라니.
자신은 종패진의 설명을 듣고서야 어찌 된 것인지 겨우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직접 눈앞에서 펼치고 있다니.
시기와 질투가 두 눈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그것은 살기로 화했다.
'반드시 처리해야 할 놈이로다.'
저놈은 자신은 물론 아들과 손자에게 화가 될 놈이었다.
'보인다.'
백리평은 필사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천성은하검법의 은하수 물결이 자신을 향해 휘몰아쳐 왔으니.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전력을 다해 대응해야 했다. 과연 종남 최고의 절기였다.
'교관님이 아니었으면······.'
어제.
한번 상대를 해 보았었다.
하무백과의 비무.
그때 하무백이 펼친 검법이 천성은하검법이었다.
그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파의 진산절학이 타인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뭘 그리 놀라. 이건 그냥 예전에 대강 봤던 것을 그저 흉내만 낸 거다. 주시운 그놈이라면 아마 이 정도로 펼칠 거야.'
그때 하무백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대강 보고 그저 흉내만 냈다고 한 검식.
사실 그것이 지금 주시운이 펼치는 천성은하검법보다 수준이 좀 더 높은 것 같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었으니.
'일부러 그러셨겠지.'
그 수준마저도 하무백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했기에 지금 그나마 이렇게 주시운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천성검법을 두 배의 속도로 펼쳐서야 겨우겨우 상대가 가능한 것이 천성은하검법이었다.
주시운의 경지가 그리 높은 것이 아닌데도 이럴진데.
정말 경지에 오른 검객의 천성은하검법은 어떤 수준일까?
백리평은 서둘러 머리에 떠오른 잡생각을 떨쳤다.
지금은 눈앞의 비무에 집중할 때다.
겨우겨우 상대하고 있는 적을 눈앞에 두고 잡생각이라니.
이 비무에 교관님의 눈과 팔이 걸려 있지 않던가.
"이 새끼가."
주시운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어린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날뛰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탓이다.
주시운의 단전에서 내공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검으로 전해지는 내공.
검기를 잔뜩 머금은 검의 움직임이 점점 사나워졌다.
챙! 채챙!
주시운의 천성은하검법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으윽."
조금 뒤로 밀린 백리평.
과연 일대제자다.
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더욱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아침햇살을 맞아 빛나며 종남의 대연무장에 별을 만들어냈다.
하나. 둘. 셋.
점점 숫자를 늘려가는 별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천 개의 별.
극성에 달했을 때 천성검법이 만들어 내는 숫자다.
허나, 지금 주시운을 둘러싼 별은 그 숫자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천 개를 넘어서, 이천 개.
그러나 천성은하검법의 노도와 같은 은하수는 이천 개의 별을 휩쓸고 있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주시운.
백리평은 거친 파도와 같이 몰아치는 주시운의 검에 주춤주춤 물러났다.
천성검법의 한계를 넘어서 이천 개의 별을 뿌리고 있음에도 조금씩 밀리는 것이다.
서걱.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이 울리며.
백리평의 옷 여기저기가 베였다.
살갗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재승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흥, 제깟 놈이 발악을 해봤자이지.'
천성검법은 어디까지나 천성은하검법을 익히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것이 목적인 검법.
그것을 아무리 빠르게 펼친다 한들 천성은하검법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무백은 그저 담담한 얼굴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쾅!
그 순간 검기를 잔뜩 머금은 검이 땅을 후려치며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백리평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검을 피해냈다.
그러나 그 여파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 듯 옆으로 비틀거렸다.
그 순간 주시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곧바로 천성은하검법의 최후 절초가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사방을 에워싸는 은하수의 물결.
백리평은 자신을 압박하는 천성은하검법의 무거운 압력에 울컥 피가 울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아무리 하무백이 준 영단을 두 개나 먹었다 한들.
눈앞의 주시운 역시 주재승의 관리로 온갖 영약으로 내공을 키운 상태.
내공에서도 조금씩 밀리며 내상을 입은 것이다.
주시운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는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으윽······."
백리평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천성은하검법은 과연 대단했다.
그 성취가 높지 않은 주시운이 펼치고 있음에도 이렇게 밀리다니.
'그래도 이대로 당할 수는······!'
백리평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하무백과의 비무를 떠올렸다.
사실 그때도 당해내지는 못했다.
겨우 평수를 이뤘을 뿐.
더욱 열심히 검을 움직였다.
단전의 내공도 쥐어 짜냈다. 동투제의 비무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승리를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지금 상대는 살의를 가지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인간의 살의를 이렇게 정면에서 맞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대로 꺾일 수 없었다.
그 살의의 끝이 교관님의 눈과 팔이었기에.
그리고 자신 또한 노리고 있음이니.
백리평은 더욱 천성검법에 집중했다.
천성검법은 절대 약한 검법이 아니다. 동투제 결승에서 주우명의 태극혜검과 자웅을 결하지 않았던가.
비록 패했지만, 막상막하의 대결이었다.
천성은하검법이 종남 최고의 절기라 하지만, 태극혜검 역시 무당의 절기 중의 절기다.
태극혜검을 감당해 냈는데, 천성은하검법을 감당하지 못할 리 없었다.
주우명과 주시운의 차이는 살기의 유무였다.
살기 짙은 주시운의 검.
'그렇다면 부순다.'
백리평은 동투제 결승전, 그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이천 개의 별이 순간 하나의 별로 화했다.
대신 그 어느 것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한 점에 집중된 검이 노도와 같이 몰아치는 은하수를 뚫었다.
"컥."
주시운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은하수가 씻은 듯 사라졌다.
방금의 격돌로 인한 충격으로 주시운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번에는 백리평의 천성검법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 개의 별은 다시금 천 개의 별로, 다시 이천 개의 별로.
이윽고 삼천 개의 별로 화했다.
백리평이 다시 한번 껍질을 벗은 것이다.
주시운이 이를 악물고 다시금 천성은하검법을 펼쳤다.
그러나.
사방을 가득 메운 삼천 개의 별은 천성은하검법의 은하수를 완전히 집어삼켜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섰다.
하나. 둘. 셋. 넷······.
천성은하검법이 만들어 낸, 별이 되고자 했던 검영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종남의 제자 대부분이 백리평의 검법을 알아보았다.
아니, 알아본 줄 알았다. 당연히 천성검법일 터이니.
그런데 아닌 것 같았다.
천성은하검법을 압도하는 저 엄청난 모습이 천성검법일 리 없었으니.
"저, 저럴 수가······."
"어떻게 저런······."
"천성은하검법이!"
"저건 대체 무슨 검법이니······."
종남의 대연무장을 찬란히 피어올라 주시운을 완벽히 둘러싼 삼천 개의 별.
이제 백리평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 이놈이 감히!!!"
악을 쓰며 검을 휘두르는 주시운.
허나 그는 연신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제 승기는 백리평에게 넘어왔다.
백리평은 끊임없이 주시운을 몰아쳤다.
주시운의 얼굴이 악귀 같이 변했으나, 백리평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얼굴이 악귀이면 뭐 하나, 검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것을.
종남의 제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잊었다.
그저 멍한 얼굴로 눈앞에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볼 뿐.
이대제자가 천성은하검법을 펼치는 일대제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건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밀리고 있는 이가 일대제자 중 가장 무서운 주시운이라니.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는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도 있었다.
그간 주시운에게 당한 게 많은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나마 백리평을 응원했다.
자신들을 대신해 주시운에게 복수를 해주는 것만 같았기에.
"이 씹새끼가!!!"
악에 받친 고함을 터뜨리며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건만.
챙!
거친 소리가 울리고.
휘리릭!
검이 튕겨 날아가.
팍!
바닥에 꽂혔다.
그리고.
삼천 개의 별은 씻은 듯 사라지고 단 하나의 별만이 남아 있었다.
주시운의 눈앞에서 흉흉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백리평의 검첨.
거기서 더 움직이면, 주시운의 미간을 꿰뚫을 수 있는 위치였다.
살기가 줄줄 흐르는 눈으로 백리평을 바라보는 주시운.
꽉 다문 이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듯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백. 더 하시겠습니까?"
잔뜩 지쳐 보이는 백리평이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누가 보아도 결과는 나왔다.
하지만 주시운만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그저 백리평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
종남의 대연무장에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백리평의 검은 흔들림 없이 그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사백?"
재촉하는 백리평.
그럼에도 주시운은 여전히 살기 띤 눈으로 백리평을 노려볼 뿐.
검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주 조금.
미세하게.
앞으로.
그만큼 주시운의 미간에 가까워졌다.
"이익."
잇새로 흘러나오는 분함이 가득한 소리.
억울함까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주시운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 거기까지 해라. 비무는 끝났다."
끼어든 이는 주재승이었다.
그가 비무를 마치려 했다.
그러나 백리평의 검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이 움직였다.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기에 아직 끝낼 수 없습니다."
나직했지만, 내공이 담겨 사방으로 펴져나가는 목소리.
대연무장에 모인 종남의 제자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네 이놈!!"
백리평의 말에 노기 가득한 고함을 터뜨리는 주재승.
"미천한 놈이 어디서 감히 장문인의 명에 말대꾸냐! 어서 그 검을 거두고 비무를 끝내지 못할까!!"
주재승은 백리평을 압박했다.
그러나, 백리평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럴 수밖에.
이 비무의 승패에 하무백의 눈과 팔이 걸려 있다.
그러니 흐지부지 끝낼 수 없었다.
분명히 승패를 결정지어야 했다.
종남의 모든 제자들이 증인이 되는 이 자리에서.
"사백께서 패배를 인정하시면 될 일입니다."
백리평이 굳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검이 조금 더 앞으로 움직였다.
"이익. 건방진 새끼가! 네놈이 정녕 피를 봐야 눈물을 흘리겠구나!"
주재승이 백리평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뽑혀 있었다.
백리평의 등을 노리고 날아드는 주재승.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했다.
어느새 나타난 하무백이 그 앞을 막았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비무에 개입하다니. 이게 종남의 법도인 건가?"
차가운 눈으로 주재승을 바라보며 묻는 하무백.
"이익."
주재승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그 와중에도 호시탐탐 백리평에게 달려들 틈을 노렸다.
물론 하무백이 그런 기회를 내어줄 리 만무했다.
하무백의 시선이 종패진에게로 향했다.
그가 나타난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아마 오늘 자신의 상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적어도 오늘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강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으니.
"노인장. 노인장 생각은 어떻소이까?"
하무백의 질문을 받은 종패진.
지금껏 가만히 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만 보고 있던 그의 입이 움직였다.
"시운. 대종남의 제자답게 승복해야 할 것에 승복하거라."
종패진의 말에 주재승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사숙 종남을 모욕하고 있는 이 잡놈들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장문인의 앞을 막은 그 자는 몰라도, 백리평과 주시운 둘 모두 종남의 제자요. 어찌 종남을 모욕한 자라는 게요."
이 비무에 걸린 조건.
당연히 종패진은 그것을 몰랐다.
아니, 아는 이가 몇 없었다.
직접 문서를 작성하는 자리에 있었던 이들, 주재승, 그리고 남화룡에게 소식을 들은 소중산.
그 외 몇몇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으니.
주재승으로서는 아들의 눈과 팔이 걸린 비무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유야무야 끝내려 하는 것이다.
그 문서에 찍힌 증인의 수결은 팽도율의 것.
이대로 패배를 선언하게 되면, 그만 한 대가를 치러야 했음이니.
"종남도 별것 없군. 이렇게 치졸하다니."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입가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비웃음.
"네 이놈!! 주시운 네놈은 종남의 명예에 먹칠할 셈이냐!!"
종패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기세가 주시운을 압박했다.
"···져, 져, 져······."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종패진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졌다······."
이윽고 주시운의 입에서 원독에 가득 찬 패배 선언이 흘러나왔다.
백리평은 그대로 검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