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70화 (170/312)

170화. 건방진

적막만이 가득했다.

일대제자의 패배.

그것이 안겨준 충격은 커다랬다.

더욱이 재능이 없다며, 맹룡대로 내쳐진 백리평이 승리했기에.

이대제자 몇몇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꾹 참았다.

일대제자, 그것도 대제자다. 무려 현 장문인의 장남이고.

그런 그의 패배에 지금 분위기는 더없이 무거웠다.

주시운은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아버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주시운.

"못난 놈."

돌아온 말은 차가운 한 마디였다.

주시운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제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다음 비무를 진행해 볼까?"

아들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앞을 막았던 하무백을 노려보며, 주재승이 살벌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지."

하무백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대연무장 가운데에 섰다.

오직 적밖에 없는 곳.

그럼에도 하무백의 얼굴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근처에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 같았다.

하무백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멈췄다.

종패진.

그가 하무백의 시선을 맞았다.

"허허. 그래 내가 맞네. 장문인이 자네의 상대로 점찍은 사람이 말이야. 종패진이라 하네."

그의 소개에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는 그의 얼굴을 몰랐으니까.

장문인 곁에 있는 노인의 정체가 궁금하던 차에, 그의 이름을 듣고는 놀라서 웅성거리는 것이다.

전대 종남제일인.

종남에서 가장 강했던 사람.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종남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사람.

현 종남제일인은 현재 자리를 비운 장문인의 사제다. 정천맹의 장로로서 본맹에 가 있기에.

"하무백이외다."

하무백이 간단히 소개를 마쳤다.

고개를 끄덕이는 종패진.

"내 그대의 이름은 친우들에게 건너 건너 조금 듣기는 했네만.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종패진.

전대 고수.

지난 전쟁 때 이미 원로원에 들었던 지라, 전장에 출전하지는 않았었다.

혹시 모를 종남에 대한 적습에 대비하여 종남을 방어하기 위해 문파를 지키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무백과 종패진은 만난 적이 없었다.

거기에 하무백은 종패진에 대해 들은 것이 전혀 없었다.

상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지만.

"먼저 검을 뽑게나."

종패신이 삼 장 떨어진 곳에 멈춰 서며 말했다.

하무백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스릉.

청명한 소리를 내며 검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검.

청란도에서 피 냄새를 빼내며 만들었던 그 검이다.

"훌륭한 명검이로구만."

종패진도 검을 뽑았다.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눈 두 사람.

하무백이 땅을 박찼다.

종패진을 향해 날아가는 검.

챙!

정확히 막아낸 종패진.

힘껏 하무백을 밀어낸 종패진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검이 점점 빠르게 움직이며 수많은 별무리를 만드는가 싶더니, 장엄한 흐름이 생겼다.

천성은하검법.

극성에 이른 그의 검법이 '진정한 천성은하검법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 주었다.

"아······!"

그 모습에 백리평은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순식간에 피어난 천 개의 별이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 내며 장엄하게 움직였다.

천성검법이 극성에 이른 백리평이었기에, 종패진의 천성은하검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무백은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별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어찌할까······.'

첫 합의 부딪힘이 하무백에게 고민거리를 던져 주었다.

눈앞의 종패진.

이 사람은 진짜 무인이었다.

검을 맞댄 순간 알았다.

진짜 무인이 전력을 다해 뿌리는 검.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맞아주는 것이 예의였다.

허나.

하무백의 시선이 살짝 움직였다.

그 끝에 자리한 것은 주재승, 종남의 장문인이었다.

'저 쥐새끼를 끌어내려면······.'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적이 있는 곳이 곧 전장이다.'

이곳은 종남의 대연무장이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비무가 아니다.

자신은 전장에서 첫 번째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하무백의 검이 움직였다.

챙! 채챙! 챙!

연이어 울리는 부딪힘의 소리.

시작은 백중세였다.

종패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종남을 욕보였다기에, 무참히 박살을 내주기 위해 처음부터 전력으로 임했다.

그런데 상대가 전력을 다한 자신의 검을 막아내고 있다니.

백리단이 떠난 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것이다.

무인이 전력을 다해 펼치는 검에 호응해주는 상대를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미소였다.

하무백의 표정은 딱딱했다.

전장에서 전투를 치른다는 생각으로 임했기에. 그리고 종패진의 미소가 마음 한쪽을 무겁게 했기에.

그런 표정이 된 것이다.

천성은하검법은 가히 천하의 절기라 할 만한 검법이었다.

종남을 구파일방의 한 자리에 올려놓은 검법답게 시종일관 하무백을 몰아쳐 갔다.

무려 일 각.

그 시간동안 하무백은 위태위태하게 종패진의 검을 받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헉. 헉. 헉."

호흡도 거칠어졌다.

백리평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태사조님이 강하다고 한들, 자신이 아는 교관님이 저렇게 고전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때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생각.

백리평의 시선이 주재승에게로 향했다.

한껏 기꺼운 웃음을 짓고 있는 장문인.

'그래서인가······.'

교관님에게는 아직 한 번의 비무가 더 남아 있다. 교관님이 지정하는 종남의 제자와.

그리고 교관님은.

'장문인을 깨부수겠다고 하셨지.'

어쩌면 지금 저 모습은 장문인의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거짓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산은 종패진과 하무백의 비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력을 다하는 사숙의 모습도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만, 그것을 막아내는 하무백의 무위도 대단했다.

다만.

'풍개. 그 친구가 그렇게 말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개방 방주가 납작 엎드려 무조건 사과할 정도의 무위는 아니었다.

종패진이 종남에서 가장 강하다 하나, 종남팔검이 합공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무백도 그 정도의 무위라는 말.

고작 그런 인물에게 구파일방에 속하는 문파가 고개를 숙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풍개.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소중산의 곁에 있던 남화룡도 무엇인가 이상하다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서의 하무백은 정말 무시무시했으니까.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호흡도 흐트러진 채 사조님과 비무를 펼치는데도.

무시무시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자신이 겪은 하무백과 지금 보고 있는 하무백은 분명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허허. 제법이구만. 내 전력을 다한 검을 이 정도까지 막아내다니. 전대 장문인 외에 종남에는 이런 이가 없었네. 이렇게 훌륭한 무인이 어찌 종남을 욕보인 겐가?"

잠시 검을 멈춘 종패진이 하무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호흡도 제법 흐트러져 있었다.

"난 욕보인 적이 없소만. 헉헉."

거친 숨을 고르는 하무백.

그 대답에 종패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말도 안 되는 비무 조건이 욕보인 것이 아니면?"

그 물음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비무 조건을 승낙한 것은 장문인과 주시운이오만? 그보다 조건을 제대로 알고는 있소이까?"

돌아온 하무백의 물음.

종패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들은 조건은 주시운과 백리평의 비무, 그리고 저 하무백이란 자의 두 번의 비무였다.

"그리고 백리평이 주시운을 꺾었는데, 과연 말도 안 되는 조건인 것 같소?"

연이어 하무백이 던진 물음.

솔직히 백리평의 실력은 의외였다.

아무리 백리단의 손자라 하지만, 같은 나이 때의 백리단을 훌쩍 뛰어넘은 성취였으니.

"그 아이가 뛰어난 탓이지. 허나 지금 이 비무는 어떠한가?"

종패진의 반박.

"끝나 봐야 알 일이외다."

하무백이 그 말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그리고 종패진을 향해 쭉 뻗는 검.

종패진의 검이 빠르게 움직이며 하무백의 검을 쳐냈다.

"지금부터는 진짜일세."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종패진의 검이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달리 급변한 기세.

살기가 실리기 시작하면서, 그 위력도 배가 되었다.

하무백의 검에도 살기가 실렸다.

비무가 아닌 생사결을 치르는 듯한 두 사람.

그럼에도 하무백이 조금씩 밀렸다.

'흥. 고작 저 정도 실력으로 그렇게 까분 게냐. 미천한 쓰레기 새끼.'

주재승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진해졌다.

아무리 봐도 저렇게 밀리다가 그대로 패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들의 팔과 눈은 지킬 수 있을 터.

아니, 오히려 저놈과 백리평의 것을 받아내야지.

사숙이 원로원으로 돌아간 후에.

종패진의 성격상, 그런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면 노발대발하며 못하게 할 것이 뻔했다.

사형 백리단만큼이나 꽉 막힌 인사다.

'대체 종남은 어찌 저런 답답한 이들만 검법에 대성을 하는지······.'

현재 정천맹에 가 있는 사제까지.

자신과 번번이 부딪히다가, 종남이 답답하다며 정천맹의 장로로 떠난 사제다.

그 덕에 종남을 장악하는 속도 또한 빨라졌고.

이제 종남에서 사형 백리단의 그림자를 절반 정도는 지웠다. 그 이후는 더욱 쉬운 일일 터.

그러자면 백리평.

반드시 이 녀석을 지워야 한다.

주재승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런 멍청한 모습을 보이며 패배하다니.

하마터면 백리평을 지우지 못할 뻔하지 않았는가.

다행히 사숙이 저 미천한 개잡놈의 새끼를 꺾을 듯하니, 수습이 될 터이지만.

"우, 우와!!"

잠깐 상념에 잠긴 사이 제자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슬슬 결판이 나겠다는 생각에 비무를 벌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뚝.

뚝.

뚝.

종패진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 어찌······.'

말도 안 되는 일.

분명 사숙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헉헉헉. 헉."

하무백은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낭패한 표정의 종패진.

"자네, 숨겨둔 한 수가 있었구만."

정말로 절묘했다.

천성은하검법의 초식과 초식의 연결부.

극성에 이르렀음에도 아직 그 부분에 미묘함이 남아 있었다.

종패진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그랬기에 십이 성 극성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더 높은 상승의 경지가 있지 않을까 하고 궁구하고 있었다.

찰나보다도 짧은 그 미묘한 틈.

하무백이 그 틈을 찔렀다.

자신을 향해 날아든 검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전력을 다해 검을 막았건만, 왼팔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저, 저건······."

백리평은 깜짝 놀랐다.

하무백이 보여준 모습.

자신도 몇 번 당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단목운뢰와의 대련 중에.

"역시 교관님도 가능한 거였구나······."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건만, 왠지 그것이 단목운뢰만의 특별한 재능이라 생각하고 싶었던 듯했다.

자신은 하지 못하는 것을 단목운뢰는 해냈기에. 그저 특수한 재능이라 생각하고 싶었던 것.

그러나 하무백이 똑같은 것을 보여주었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거다.'

백리평도 자신 역시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 목표가 그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하무백이 내지른 회심의 일격.

그 후로 비무의 양상이 바뀌었다.

여전히 호흡이 거칠고 지쳐 보이는 하무백이었지만, 승기가 점차 그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크지 않은 상처였다.

하지만 하무백이 승기를 잡기에는 충분한 상처였다.

반 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종패진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왼팔의 옷 역시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챙!

커다란 소리와 함께 종패진이 검을 놓쳤다.

하무백의 검이 종패진의 가슴 앞에 멈췄다.

부들부들 떨리는 검 끝.

낭패한 표정으로 검을 내려다보는 종패진.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이내 체념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졌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놓친 자신의 검을 집어 납검했다.

"어, 어찌······."

"이, 이럴 수가······."

제자들의 두 눈에는 불신이 가득 찼다.

전대 종남제일인이, 어찌 저 새파랗게 젊은 맹룡대 교관에게 패한단 말인가.

하무백의 상태도 좋지는 않았다.

여전히 호흡은 거칠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온몸을 적신 땀은 또 어떠한가.

툭 밀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주재승은 이를 악물었다.

믿었던 사숙이 저런 식으로 패할 줄이야.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하무백에게 고정되었다.

정말로 기진맥진해서 겨우 이긴 상태다.

지금이라면 자신의 아들이 나서더라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습.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저놈을 회복하게 두는 것은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

"네놈이 이겼군. 과연 그딴 식으로 혓바닥을 놀릴 만한 실력은 지녔다는 것이더냐? 그럼 바로 다음 비무를 진행하지. 누구와 싸우겠느냐?"

주재승의 물음에 종패진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막 비무를 마쳐 검을 들 힘도 없어 보이는 자를 상대로 다시 비무를 하겠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장문인."

"사숙. 저 미천한 놈이 먼저 제안한 조건입니다. 종남이 지목한 이와 비무 한 번, 그리고 이어서 자신이 지목한 이와의 비무 한 번. 따라줘야지요."

주재승이 종패진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헉. 헉. 헉."

하무백은 검을 바닥에 꽂고는 거기에 기대어 겨우 서 있었다.

주재승이 하무백을 재촉했다.

"아, 알겠다. 그러면 상대를 지정하지. 헉헉."

탈진 직전으로 보이는 하무백.

종남의 제자들이 그런 그의 입을 주시했다. 과연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장문인. 네놈과 비무를 하지. 헉헉. 헉."

하무백의 지목을 받은 주재승.

그의 입가에 살소가 떠올랐다.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건방진. 좆만한 새끼가······."

검을 움켜쥔 주재승이 분노한 모습으로 대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종남을 욕보인 적은 없지만, 노인장은 욕보인 듯하오. 그건 미리 사과하겠소.]

그 순간 종패진을 향해 들려온 전음.

종패진의 시선이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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