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왼쪽 눈부터
자신을 욕보였다니, 무슨 의미란 말인가.
종패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는 사내.
팔과 다리도 계속해서 후들거리고 있었다.
'가만.'
문득 조금 전의 전음을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도 평온한 목소리였다.
지금 저렇게 힘들어 하고 있으면서.
'그러고 보니······.'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머릿속에 벼락처럼 내리치는 생각에 종패진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심어(心語).
혜광심어라 하기도 하고 다르게 불리기도 하는, 전음입밀의 최고봉.
심어라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전음을 보낼 수가 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가 그런 경지에 올랐을 리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종패진 자신 역시 어기전성을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자신과 백중지세를 유지하다가 의외의 일격으로 승리한 저 사내가 심어를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사이 주재승과 하무백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다.
타닷.
주재승이 먼저 땅을 박차고 나왔다.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천성은하검법.
확실히 손색이 많았다.
조금 전 종패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차라리 주시운의 그것에 가까웠다.
"쯧."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는 종패진.
대종남 장문인의 검의 경지가 고작 저 정도인 것에 대해.
그리고 지친 상대와 비무를 하는데, 저런 기습과 같은 선공을 한 이가 종남의 장문인이라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혀를 찬 것이다.
챙!
채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허나 조금 전과 같이 청명한 소리가 아니었다.
탁하디 탁한 울림.
그럼에도 주재승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무백을 연신 몰아붙였다.
거친 호흡을 내뱉는 하무백이 연신 뒷걸음질 쳤다.
검도 떨리고 팔도 떨렸다.
"크하하. 고작 그 정도로 그리 까불던 것이냐! 검을 들 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편하게 검을 놓는 것이 어떠냐?"
주재승이 광소를 터뜨리며 연신 검을 휘둘렀다.
채앵-!
여전히 탁한 소리가 울리며.
휘리리리릭.
턱.
하무백의 검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꽂혔다.
입 꼬리가 한껏 올라간 주재승이 하무백을 향해 검을 겨눴다.
찌르면 그대로 목을 꿰뚫을 수 있는 위치.
검을 살짝 들어 올리는 주재승.
이제 검 끝이 하무백의 한쪽 눈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졌다고 하지 말거라. 이리 쉽게 네놈의 패배를 받아줄 생각은 없으니."
살기가 가득한 음성이다.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에 종패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명문정파인 대종남의 장문인이 어찌 저런 언사를 내뱉으며, 저런 살기를 띤단 말인가.
어린 시절부터 주재승의 성정에 잔인하고 화급한 면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꿀꺽."
장문인의 말에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살기가 사방으로 줄줄이 흘러간 탓이다.
싱긋.
하무백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기대한 대로의 반응인지라.
이제 그만 결과물을 수확할 때였다.
그의 입가에 어린 진하디 진한 웃음.
그 모습에 주재승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놈이 이제 미친 게로구나. 이 상황에서 그런 웃음이라니. 우선 왼쪽 눈부터 시작하도록 하마."
검 끝에 영롱한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가늘게 흘러나와 검을 둘러싸며 늘어뜨려졌다.
검사(劍絲).
검기를 넘어서, 검강의 직전 단계였다.
그 경지가 지금 주재승의 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종패진은 그 모습에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문인이라는 자가 아직도 검강의 경지에 들지 못하다니.
어쩌면 일대제자인 남화룡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였다.
"왼쪽 눈부터. 좋아. 확실히 접수했어. 네놈 말대로 편하게 검은 놔두고 하지."
순식간에 변한 하무백의 목소리.
아니, 그것보다 호흡이 너무도 안정적이었다.
분명 조금 전 다 죽어가는 것처럼 헐떡거렸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네놈. 졌다는 말도 못 하게 만들어 주마."
부웅.
갑작스러운 하무백의 변화에,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하무백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퍼어어억!
커다란 파육음과 함께 주재승이 뒤로 날아갔다.
하무백이 땅을 박차고 곧바로 주재승의 신형을 따라 잡았다.
다시 치켜든 주먹.
은은한 백색 휘광으로 감싸여 있었다.
"궈, 궈, 권강!!!"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보고 외쳤다.
권강을 덧쓴 주먹이 날아간 곳은 주재승의 입이었다.
파작.
그대로 턱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크아아아아아악······."
그제야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형편없이 땅을 구르다가 겨우겨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주재승.
그의 왼쪽 눈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는 이미 권격에 터져 있었고, 주변의 뼈도 함몰된 듯했다.
남아 있는 오른쪽 눈에는 불신과 공포가 가득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빨리 비무를 끝내야 했다.
저놈의 주먹에 두 번 맞아보니,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졌다! 졌어! 내가 졌다!'
다급히 외쳤다.
아니 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어. 우어. 어우어우어어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턱이 움직이지 않았다.
뼈가 부서지고 관절이 박살이 났다.
말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재승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무백이 곧장 다시 달려들었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두 주먹.
퍽!
퍼퍼퍽! 퍽! 퍽! 퍽퍽!
그야말로 가죽 주머니 패듯이 주재승을 두들겼다.
하무백의 폭풍 같은 주먹질에 주재승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웅! 우우웅! 우웅! 우우우우!"
비명도 제대로 터져나오지 않았다.
분명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진데, 소리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턱이 움직이지 않는 탓이다.
몇몇 제자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몇몇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하무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주재승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도 아니고, 패배를 선언하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하무백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광포하고 폭력적인 주먹질이 주재승에게 쏟아졌다.
이번에는 주먹의 속도가 느려졌다.
덕분에 주재승은 땅을 딛고 설 수 있었다.
이제 쓰러져야 하는데.
다리에 아직 힘이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당장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지독한 고통인데.
쓰러지기는커녕 두 다리는 굳건하게 땅을 딛고 서 있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눈 앞의 인간은 정녕 괴물이요, 악마였다.
어찌 사람을 이렇게 집요하게 팰 수 있단 말인가.
"우욱! 우욱!"
주먹의 속도가 느려지니, 다른 공포가 몰려왔다.
주재승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
그 뒤에 온몸을 꿰뚫는 고통까지.
두 눈을 가득 채우는 주먹.
그 뒤의 고통.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퍽.
퍼퍽!
퍽! 퍽! 퍽퍽퍽!
대연무장은 적막했다.
아무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무백이 주재승을 패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제자들의 눈길이 종패진에게로 향했다.
지금 저 잔악무도한 놈을 멈출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허허, 허허허허. 이것이었군, 이것이었어.'
종패진은 이제야 두 번째 비무 시작 전 하무백이 전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을 욕보였다는 것.
'나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였다. 헌데도 밀리는 척, 힘든 척. 나를 가지고 놀았던 거로군.'
종패진의 두 눈에 조용한 분노와 모멸감이 자리했다.
그 이유를 저 무인은 지금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장문인을 끌어내 저 꼴을 만들기 위함이리라.
'이 비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구나.'
음험한 주재승이라면 숨긴 것이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상대가 종남을 모욕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다음의 문제라 여겼다.
그런데 저런 고수가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면서까지 주재승을 저 꼴을 만들고 있으니.
숨긴 것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큰일인지도 몰랐다.
일단은 비무를 끝내야 했다.
종패진이 하무백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대가 승리한 듯하니, 이만 하는 것이 어떤가."
종패진이 내공을 실어 말했다.
하무백은 힐끗 그를 잠시 쳐다보았을 뿐,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욕보인 것을 정녕 사과하고자 한다면, 이만 끝내주는 것이 어떤가.]
그때 하무백의 귀로 날아든 전음.
이기전성을 사용한 전음이었기에, 입술이 극히 미세하게 움직였다.
해서 그가 하무백에게 전음을 건넸음을 알아본 이는 거의 없었다.
하무백의 주먹이 잠시 멈췄다.
고개를 돌려 종패진을 바라보았다. 종패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았다.
"후우. 알겠소."
깊은 한숨과 함께 나온 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재승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몸에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 장문인!!"
제자들이 주재승에게 달려왔다.
주재승의 몸을 조심히 안아들어 들것에 옮기는 이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했던 것인데, 설마 장문인을 누이게 될 줄이야.
"이, 악독한 놈."
"악적 새끼······."
사방에서 원한에 가득한 목소리가 하무백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무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전까지 주재승의 천박한 모습을 보았음에도 자신을 향해 원한을 불태우는 모습이라니.
이래서 명문정파라는 놈들은 귀찮았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덤비던가."
하무백이 자신을 노려보는 종남의 제자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모습에 눈이 뒤집힌 몇몇이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려 했다.
"멈춰라!!!"
허나 종패진의 입에서 터진 사자후 때문에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 비무. 무언가 이상하구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이."
종패진의 시선이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뭐, 저 인간이 제대로 알릴 리 만무했겠지. 하지만 사실을 아는 이가 몇 더 있지?"
하무백의 눈이 좌중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거쳐간 곳에는 주시운, 남화룡, 반적풍, 그리고 종남팔검 중 육검이 있었다.
하무백의 시선을 받은 주시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비무의 조건이 머릿속에 촤르르르륵 흘러 지나갔다.
너무도 선명하게.
그랬기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 팔과 한 눈.
주시운의 시선이 아비의 처참한 몰골로 향했다.
터져버린 왼쪽 눈.
그리고 잘근잘근 다져지다시피 한 전신.
저벅.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다시 들리는 소리.
차마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벅.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
결국 주시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하무백이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겁에 잔뜩 질린 눈.
무심한 눈.
하무백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밝은 웃음.
거기에 담겨 있는 살기.
"우리 아직 계산할 게 남았지?"
그리고 입 밖으로 흘러나온 살기 가득한 음성.
"으, 으, 으윽······."
주시운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바지가 축축이 젖었다.
종남의 대제자 주시운의 바지가 젖어들어, 발 아래로 흥건히 무언가 고이는 것을 주변의 제자들이 모두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 계산을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