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사, 사실입니다
"우, 우우, 우우우우."
주시운은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말만 웅얼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젖은 신발의 족적이 땅에 뚜렷이 찍혔다.
하무백이 천천히 그런 주시운을 향해 다가갔다.
종남의 제자들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소중산이 황급히 움직였다.
그는 이 비무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장문인이 저 꼴이 났는데, 대제자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머, 멈추게!"
경공까지 펼쳐 다가온 소중산이 하무백과 주시운 사이를 막았다.
종남팔검 역시 황급히 움직여 다가왔다.
하무백이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건 무슨 의미지?"
하무백의 물음.
"이제 비무는 끝났네. 그러니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소중산이 달래듯 하무백에게 말했다.
"내가 조금 전에 했던 말 못 들었소? 계산할 게 남아 있는데?"
하무백의 말에 소중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흣. 당신도 알고 있나 보군."
소중산의 표정 변화에 알 만하다는 듯 하무백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들 중 셋도 알고 있을 테고."
하무백의 시선이 종남팔검의 일검, 삼검, 육검에게로 향했다.
종남팔검과 하무백의 대치.
그 모습에 제자들이 서서히 하무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무백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교, 교관님······."
어느새 곁에 다가온 백리평이 조심스레 말했다.
"종남은 명문정파가 아닌 모양이로군."
백리평의 부름도 무시한 채 하무백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제자들의 기세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장문인의 처참한 패배에 이미 거칠어져 있던 그들의 기세.
거기에 하무백의 말이 불을 붙였다.
"그 무슨 망발이냐!!"
무수한 제자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약조를 이리 우습게 여기는 건 사파에서나 하는 짓인데?"
그 말에 호응하듯 하무백이 다시 한번 말했다.
이제는 사파 취급.
종남 제자들의 기세가 무섭게 타올라 주변을 장악했다.
한 명 한 명의 기세는 약했으나, 수많은 이들이 모여있으니 그 기세가 자못 강맹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결국 종패진이 다시 나섰다.
비무에서 그에게 패하고 농락까지 당했다.
거기에 더해 사문이 모욕을 받고 있으니, 그의 두 눈에 분노가 어렸다.
하무백이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거기서 꺼낸 종이 한 장.
그것을 종패진에게 날려 보냈다.
"아, 아, 안돼!!"
무슨 정신일까.
막 종패진이 받아 든 종이를 낚아채 어떻게든 찢어버리려 발악하는 주시운.
헌데.
빳빳하게 펼쳐진 종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손아귀에 힘을 줘도 아무런 변형이 없었다.
"허."
종패진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능공섭물로 종이를 자신에게 건넨 건 그렇다 쳐도.
손을 떠난 종이가 강기에 둘러싸인 채 보호 받고 있었다.
대체 어떤 경지에 올라야 저런 것이 가능할까?
허공을 격한 강기라니.
이러니 주시운이 발악을 해도 종이는 멀쩡하기만 한 것.
그랬기에 종패진은 그 내용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이, 이게 정녕 사실이더냐?"
"사, 사조님······."
주시운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종패진의 시선은 그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냉엄한 시선이 남화룡에게로 향했다.
종이에는 남화룡의 이름도 있었으니.
매서운 눈빛에 남화룡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다시 한번 다그치는 종패진.
"······사, 사실입니다."
어렵게 입을 뗀 남화룡.
종패진의 노기가 극에 달했다. 허나 이번에는 그 대상이 달랐다.
주재승과 주시운, 그리고 남화룡을 향한 분노였다.
"대종남의 제자가 이딴 비무를 약조했다고? 상대의 눈과 팔을 걸고?"
종패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말을 들은 종남의 제자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들.
그러자 종이가 천천히 움직였다. 하무백이 능공섭물로 움직인 것이다.
종남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눈 앞으로 종이가 움직였다.
누군가는 내용을 읽고 종이를 파손하려 하였지만, 하무백의 강기는 여전히 굳건했다.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은 제자들의 얼굴에 하나둘 허탈함과 충격이 자리했다.
장문인과 주시운의 잔인한 성정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럴 줄이야.
어찌 제자의 눈과 팔을 걸고 비무를 하라 한단 말인가.
실제로 비무에 이용된 것은 하무백의 것이어도, 백리평을 향한 진한 악의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주시운이 비무에서 승리해 백리평이 종남으로 복귀하게 되었다면, 본파의 제자인 백리평 또한 어떤 꼴을 당했을지가 눈에 선했다.
하무백은 잠깐 기다렸다.
허나, 거기까지.
"그럼, 노인장. 이만 비켜 주시겠소?"
종패진을 향한 하무백의 요청.
잠시 동안 하무백을 바라보던 종패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비켜섰다.
"사, 사숙!"
그 모습에 소중산이 놀라서 외쳤다.
저벅.
하무백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막을 건가?"
소중산을 향한 물음.
이를 악문 소중산.
사형도 싫고, 사질도 싫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남파의 집법원주 소중산이라 하네. 종남파의 법도를 책임지는 집법원주로서 그 문서를 인정할 수 없네!"
소중산은 집법원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로 결정하고 외쳤다.
하무백이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열리는 입.
"당신네 장문인은 내 눈과 팔을 가져가려고 아주 눈이 벌게져 있던데? 왜 그건 막지 않았지? 보아하니, 이미 이런 비무의 조건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그건······."
소중산의 말문이 막혔다.
"종남이 패했을 때만 찾는 법도는 내가 인정할 수가 없어. 법도를 내세우려면 애초에 이 비무를 막았어야지."
하무백의 말에 소중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맞는 말이다.
애초에 소중산도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장문인의 권위를 넘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장문인이 들고 있는 장문영부의 권위가 집법원에 우선했다.
소중산은 주시운이 먼저 종남으로 귀환했을 때, 장문인 주재승을 찾아가 비무를 반대했다.
집법원주로서 법도를 어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애초에 상식을 파괴한 비무 조건이지 않았던가.
그때 주재승이 다시 한번 꺼내 든 것이 장문영부였다.
"장문영부의 명을 꺾을 수가 없었네······."
후회 가득한 음성이다.
그 말에 종패진이 깜짝 놀랐다.
"이딴 비무를 하기 위해 장문영부까지 동원했단 말이더냐!!"
그 외침이 종남 제자들의 귀에 들어갔다.
그들의 동요가 더욱 심해졌다.
집법원주의 반대를 물리치기 위해 장문영부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제자를 가르치는 교관의 눈과 팔을 취하기 위함이라니.
실망, 경악, 참담.
온갖 감정이 종남의 제자들 사이에 소용돌이쳤다.
"이 문서에는 장문영부가 없으니 막아서겠다라. 그거 편리한 핑계로군. 헌데 난 종남의 사람이 아니야. 이건 나란 사람과 저 주시운이라는 놈 사이의 계약이고. 증인은 팽도율이지."
여전히 웃음 짓고 있는 하무백.
허나 그 웃음은 무시무시했다.
천천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 때문이다.
"이 정도면 사정 많이 봐줬으니, 이제 비키지. 아니면······."
하무백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소중산에게로 집중되었다.
소중산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결국 기세에 밀린 그가 주춤주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하무백과 주시운 사이를 막는 것은 없었다.
이를 딱딱거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시운.
하무백의 주먹이 움직였다.
파직.
뼈가 박살 나는 소리가 울리고.
"크아아아아악!"
주시운이 비명을 터트렸다.
그의 오른쪽 눈이 하무백의 권격에 터져 나갔다. 주변의 뼈도 부러져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눈물과 핏물이 섞여서 줄줄 흘러내렸다.
"다음은 팔이다."
"으, 으, 으······."
괴성을 흘리며 주시운이 몸을 돌려 달렸다. 어떻게든 달아나려는 몸부림.
그러나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앞을 막아선 하무백이 그에게 발을 걸어 간단히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파직.
왼팔을 밟아 부숴 버렸다.
"크아아아악."
지그시 힘을 줘서 좌우로 움직이는 발.
밟힌 부분의 뼈는 그대로 부스러져, 절대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자르든지, 그대로 두고 살든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무백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소중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라면, 법도를 어긴 이딴 비무를 약속한 죄를 물을 것 같아. 저놈에게."
그런 소중산의 귀에 들리는 하무백의 목소리.
"그 또한 중대한 죄를 지은 걸 텐데 말이야."
"맞는 말이구만."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패진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문서에 모든 것이 나와 있었으니.
너무도 선명한 주시운의 수결.
문파의 대제자라는 놈이 사질을 노리고 비무를 했다니.
종남의 법도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었다.
"종남팔검은 저 죄인을 뇌옥에 가두거라. 장문인은 의각으로 옮기고. 일단 회복된 뒤에 종남의 법도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할 터이니."
종패진의 명에 종남팔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 원로원의 원로 중 한 사람으로 이번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함세."
종패진이 정중한 모습으로 하무백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굴욕적인 모습이었지만, 굴욕적이지 않았다.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었기에, 종패진은 정중하면서 당당했다.
다만, 장문인과 대제자의 정도를 벗어난 모습이 참담할 뿐.
오히려 그것이 굴욕적이라면 굴욕적이었다. 어찌 종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조용했다.
제자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혼란에 빠져 있을 뿐.
"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오."
하무백의 대답에 백리평의 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 귀찮은 일이 무엇인지 하무백에게 들은 것이 있는 탓이다.
"그리고 본파의 제자를 훌륭히 키워줘서 고맙네."
백리평을 바라보는 종패진의 두 눈은 따뜻했다.
"됐소이다."
하무백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어수선하긴 하나 며칠 머물렀다 가는 것이 어떠한가. 편치 않을 거라 생각은 하네만, 오랜만에 본 파에 돌아온 평이를 생각해서 말일세."
그 말에 하무백의 시선이 백리평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이곳이 백리평의 고향이자 집인데.
"후. 사흘이오."
그렇게 하무백은 종남의 접객당에 머무르게 되었다.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하무백은 침상에 누웠다.
"후우. 이제 좀 쉬겠군. 뭐, 이제 귀찮은 일은 없겠지. 여기 거지 놈들이랑, 천목각 놈들도 있는 것 같았으니."
하무백의 기감은 종남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의 기감에 걸린 개방과 천목각의 기척.
그들은 종남 곳곳 각자의 자리에서 일꾼이나 숙수 등으로 위장해 있었다.
굳이 그들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비무만 해치우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니.
어쨌든 정천맹의 눈과 귀가 종남에 닿아 있었으니, 소식이 전해질 터.
미리 언질을 해 두었던 것도 있으니.
"공손 영감이 알아서 하겠지. 이제, 뭐."
그러고는 두 눈을 감는 하무백이었다.
***
사흘은 금세 흘렀다.
그동안 종남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장문인의 만행에 대한 충격.
그런 장문인의 현 상태.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까닭이다.
"단전이 상했다고?"
"네."
의각주가 종패진의 물음에 조심스레 답했다.
"하긴. 그렇게 두들겨 맞았으니······."
내공이 실린 주먹이 전신을 잘근잘근 두드렸다.
단전이 상할 만도 했다.
"그럼 회복에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종패진의 물음에 의각주가 고개를 저었다.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허어. 허면 무공은?"
"상하긴 했으나, 일부는 남아 있기에 사용하실 수는 있겠으나······. 본 내공의 일 할도 겨우 사용하실 것 같습니다."
"단전이 박살 난 거나 다름없군. 쯧."
종패진이 혀를 찼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응?"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심각한 의각주의 표정에 종패진이 물었다.
"주먹만 보면···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하십니다."
종패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확인을 위해 종패진이 직접 의각을 찾았다.
넓은 내실에 온몸을 붕대로 감싼 주재승이 홀로 누워있었다.
종패진이 들어서니 주재승의 눈이 그를 향해 움직였다.
"장문인. 몸은 좀 어떠하오?"
종패진의 물음에도 주재승은 아무런 답이 없었고.
두 눈은 멍하니 초점이 없었다.
"허어."
종패진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잠시 주재승의 맥문을 살피려는 의도였다.
그 과정에서 살짝 쥐어진 주먹이 주재승의 눈에 닿았다.
그 순간.
"크, 크아아악. 크헉. 아앙!"
온몸을 거칠게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하는 주재승.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란 종패진.
의각주가 황급히 움직여 종패진의 주먹을 내리고 검은 천으로 주재승의 두 눈을 가렸다.
그러고 나서야 주재승이 조금씩 진정했다.
"이런 상황입니다······."
의각주의 말에 종패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문인이 이래서야······."
아무래도, 장문인 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