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마녀라면 몰라도
"독에 관해서는 나도 지식이 별로 없어서 확신을 할 수는 없어. 그래도 어지간한 독에는 중독이 되지는 않는데······. 허나 월룡객잔의 그것은 내 몸에도 반응이 있었으니."
이어진 하무백의 말에 생도들의 표정이 서서히 심각하게 변해갔다.
"게다가 나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은밀한 독이었다."
한설빙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무백의 몸에 통하는 독이라는 부분에서 그랬다.
'거의 만독불침(萬毒不侵)이나 다름없는 양반이 중독 증상이 있었다고?'
그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악독한 혈교과 마교가 독을 안 썼을까.
수많은 독이 전장에 뿌려졌고, 중독되어 목숨을 잃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무백은 그 전장에서 살아남은 이다. 그 때문에 거의 모든 독이 통하지 않는 몸이 되었고.
그런 하무백의 몸을 뚫은 독이라니.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독의 이야기가 나오자 생도들은 당진산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그는 사천당가의 직계 아닌가.
정파 무림에서 유일하게 독에 정통한 문파가 사천당가였으니.
"그렇게 나를 봐도······. 내가 독에 재능이 있었으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당진산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에도, 채찍에도.
당가의 비전에 재능, 아니 성취를 보이지 못했기에 가주인 아버지에 의해 맹룡대에 보내진 이가 당진산 아니던가.
"중독 증상은 어떤 것이었나요?"
가장 먼저 침착함을 찾은 연하민이 물었다.
하설란은 오라비가 독에 중독이 되었다는 말에 여전히 안절부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먹었던 음식이 미치도록 먹고 싶어지더군."
그 대답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이하다 여기고 한번 경험해 보기 위해 월룡객잔을 찾았던 것인데, 그것이 중독 증상이었다니.
"그렇게 강한 독은 아니다. 나는 일부러 독을 자극해서 그 작용을 촉진 시킨 덕에 증상이 빨리 나타난 것이고."
음식을 먹는 젓가락질 속도가 느려지나 싶더니 이내 멈췄다.
"그리고 나서 독은 자연적으로 완전히 사라졌어."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작 객잔에서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하무백 정도 되는 고수도 알아차리기 힘든 독을 사용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었다.
"교관님의 말씀대로라면, 그곳에서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하루나 이틀 뒤부터 미칠 듯이 음식이 생각나는 게 독이 작용을 시작해서로군요."
당진산이 들은 바를 정리했다.
"그리고 며칠 참으면 그 욕구가 사라졌던 것은 독이 소멸된 것 때문이고요."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그렇겠지."
"그러면 우리가 봤던 그 동정십걸?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월룡객잔의 음식을 먹어서 중독이 심해졌기에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독에 관해서는 별다른 재능이 없다고 하면서도 나름의 분석을 하는 당진산.
"이런 경우는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좌중의 시선이 당진산의 입에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어떤 새로운 독을 실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처음에는 소량씩 동물에게, 그다음에는 다량을 동물에게, 그다음이 사람에게 소량씩. 지금 그 단계에 접어든 걸로 보이네요."
당진산의 말에 생도들은 감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당진산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독에 재능이 없다고는 했지만, 이건 당가의 아이라면 어릴 때 이미 다 배우는 것들이야."
그러고는 젓가락을 들어 가까이 있는 음식을 집어 먹는다.
아무래도 머쓱한 감정을 숨기려 그러는 것 같았다.
"목적이 뭘까요?"
한설빙이 하무백에게 물었다.
하무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라고 해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음식을 미치도록 먹고 싶게 만드는 독인데. 그것이 어떻게 변모할지 어찌 예상할 수 있을까.
정확히는 그 독을 미친 듯이 먹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만.
마약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음식의 맛은 평이했고, 독은 아무런 맛도 없었다.
먹은 직후에 특별한 환각이나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독이 중독자의 몸에서 기운을 흡수해 작용을 시작하면, 그 독을 미친 듯이 먹고 싶어지게 하는.
딱 그 정도.
"독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무슨 의도인지 도통 모르겠어."
대체 목적이 무엇일까.
"흐음.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는데요."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하는 척하던 당진산이 입을 열었다.
"내일쯤 제 누이가 무창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누이?"
"정확히는 제 바로 위 누님입니다."
당가주는 슬하에 오남삼녀를 두었다.
상당히 자식들이 많은 편이다.
당진산은 그 중 사남이자 여섯째였다.
위로 누이가 둘, 아래도 하나 있었다.
거기에 바로 위 누이라면 당가주의 다섯째.
"혹시, 천독현녀(千毒賢女)?"
한설빙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호천단의 부단주로서 무림에서 파악해둬야 할 이들의 명단을 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무백 역시 알고 있는 별호와 이름이었다.
"현녀라니라요··· 마녀라면 몰라도."
당진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 말이 진심임을 전력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어, 그러면······."
그때 하설란이 당황한 얼굴로 당진산을 바라보았다.
하무백은 재미있다는 듯 히죽 웃었다.
"현녀가 아니라 마녀? 혹시 그 마녀가 나를 칭하는 거니, 진산?"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에.
당진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지어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
"하 교관 그가 월룡객잔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 맹룡대 생도들이 저녁을 먹으려는 것을 막았다고?"
벽력개가 수하의 보고에 되물었다.
"네. 어르신."
이제는 대호법의 자리에서 내려와 무창에만 머무르고 있기에, 개방도들은 벽력개를 그저 어르신이라고만 칭했다.
벽력개의 지시였다.
최근 월룡객잔과 월룡루의 수상한 모습을 감지했다.
그래서 가뜩이나 더 유심히 살피던 차였는데, 하무백까지 그런 행동을 취했다니.
"거기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한데······. 대체 뭘 꾸미는 거냐, 형의천?"
벽력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광회천의 흔적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던 터에 갑작스러운 단안상단의 움직임.
이놈들이 단순히 무창의 상권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온 놈들은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사천당가 이공녀가 무창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천독현녀 당지연 말인가?"
그녀는 후기지수 가운데 독에 관해서는 가장 빼어난 능력을 지닌 이로 유명했다.
아직 이립(而立)도 되지 않은 나이에 별호에 천독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이.
"저잣거리에서 당진산을 찾더랍니다."
"···더 자세히 조사를 해보긴 해야겠구만."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벽력개가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일단 그 둘은 유심히 살펴보거라."
"네, 어르신."
왠지 무슨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았다.
***
"진산아. 왜 그러니? 여기 이 누님 좀 보는 게 어떨까?"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목소리에 은은한 살기까지 담겨 있었다.
사라락.
그녀의 팔이 움직이며 옷자락 소리가 들리자.
당진산의 고개가 뻣뻣하게 움직였다.
그는 저 옷자락 소리가 자신을 향한 경고임을 잘 알았다.
만약 계속 무시한다면, 틀림없이 자신에게 하독(下毒)을 할 미친년이 자신의 바로 윗누이였으니.
"어, 어떻게 벌써··· 그리고 여긴 어찌 알고······."
당진산의 눈빛이 공허했다.
목소리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가라앉았다.
"사랑스러운 동생을 하루라도 빨리 보려고 조금 무리했지. 그리고 여기는 길 가던 개방도한테 물어보니까 알고 있었고."
당진산의 두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면서 잘게 떨렸다.
그래, 하루 일찍 도착한 것은 서둘러서 그랬다 치자.
헌데 개방도가 어째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단 말인가.
자신이 뭐라고.
물론 그것은 하무백과 단목운뢰와 함께 있었던 탓이다.
무창의 개방은 항시 하무백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또한 단목운뢰는 벽력개가 챙기고 있었으니.
"개, 개방이 왜······."
그 심정이 고스란히 원망 섞인 중얼거림으로 흘러나왔다.
"그러게. 그건 나도 신기하더라. 정말 별 기대 없이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여기 있다고 알려주길래 서둘러 왔더니, 이 누님보고 마녀라······. 일 년 가까이 안 봤다고 네가 미친 거지. 응. 그래. 미친 거야."
하무백을 비롯한 일행은 둘의 모습을 그저 지켜 보고 있었다.
아니, 하무백은 재미나다는 듯 계속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사실 하무백과 하설란은 그녀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
당가 무인의 기척을 하무백은 당연히 알고 있었고.
하설란은 당진산과 유사한 기척의 인물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잠시 동생을 노려보던 당지연이 시선이 하무백을 비롯한 생도들에게로 향했다.
"초면에 못난 모습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당가의 지연이라 합니다. 이 못난 녀석의 누이가 됩니다."
예의를 갖춰 포권을 취하는 그녀.
선이 굵었으나, 그것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하무백과 한설빙, 그리고 생도들과 인사를 나눈 당지연.
당진산은 뚱한 얼굴로 그런 누이를 바라보았다.
"하 교관님께는 아버님께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덧붙인 당지연의 감사에 하무백의 두 눈에 의문이 어렸다. 딱히 그럴 일이 없었으니.
"가문에서 포기한 망나니를 사람 만들어 주셨다고······."
이어진 설명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당진산은 재능이 있었다. 단지 그 재능이 당가와 맞지 않았을 뿐.
"그 정도 깜냥은 되는 녀석이었으니 가주께서는 너무 괘념치 않으셔도 될 듯하군요."
하무백의 대답에 당지연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자신의 동생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앞의 교관이 어떤 인물인지, 아버지에게 이미 듣고 왔었다.
지난 전쟁의 숨은 영웅.
그런 자가 맹룡대의 교관이 되었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얼마나 놀라셨던가.
그리고 당진산의 담당 교관이 되었다고 했을 때는 은근한 기대도 하셨다.
당추가 본가에 귀환하고 그에게 들은 당진산의 소식에, 기대가 기쁨으로 바뀌었다.
본가에 있을 때는 상대도 안 되던 당추와 일대일로 겨뤄 이겼다니.
이제야 진정한 무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껍기 그지없었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동생에게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본가에서 보았던 동생은 정말 답이 없는 둔재였는데.
"큼큼. 마녀의 안목으로는 알 수 없는 재능이지."
그 사이 신색을 회복한 당진산이 다시 한번 마녀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어깨를 활짝 폈다.
찌릿한 시선이 당진산에게 향했지만, 그는 당당했다.
누이의 성정을 아는 탓이다.
이미 교관님과 생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공적인 모습의 가면을 쓴 이상, 적당히 자극해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휴관기에 교관님과 생도분들을 본가로 초대하고 싶으시다 전하셨습니다."
이어진 말에 생도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사천당가의 가주.
그런 대단한 인물이 자신들을 초대했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뭐야? 그것 때문에 온 거야?"
당진산의 얼굴에 김빠진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누이의 방문 소식에 대체 무슨 일일까 고민을 많이 한 탓이다.
"네가 지난번 휴관기도 그렇고 이번 휴관기도 그렇고, 본가에 오지를 않으니 아버지께서 날 보내신 거야. 혹시라도 도망가려 하면 잡아 오라고."
하무백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
당진산이 살짝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초대는 감사하나,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긴 듯해서. 조금 미룰 수 있을까요?"
하무백의 말에 당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결해야 할 일이 '지금' 생겼다니.
"아, 누이에게 도와달라 하면 되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 중이었으니까."
당진산이 반색하며 말했다
누이를 좀 부려 먹어야겠다는 사심이 가득한 얼굴.
마침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독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이야기하던 중 누이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때 딱 맞춰서 그녀가 도착했음이니.
"무슨 말씀이신지?"
당지연이 물었다.
"그보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앉으시지요."
그러고 보니 여태 서 있었던 그녀.
자리는 충분했기에 그녀가 자리에 앉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무백이 오늘 겪었던 일을 찬찬히 모두 풀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녀의 표정이 다양하게 바뀌었다.
"흠. 알 수 없는 독이로군요. 은침에 반응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은침이 반응을 보이는 독은 제한적입니다. 비상 같은 종류로요. 그리고 계란에도 반응을 보이기도 하니, 은침으로 시험한 결과만 믿을 건 아닙니다."
당지연의 말에 좌중의 표정이 변했다.
은침에 반응하는 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 안 탓이다.
당진산 역시 마찬가지.
그 표정을 본 당지연의 날카로운 눈빛이 당진산에게로 향했다.
"후우. 당가의 직계라는 녀석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작은 중얼거림. 당진산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일단 제가 직접 한번 먹어봐야겠습니다. 하 교관님의 말씀대로면 당장 위험은 없을 듯하니까요."
이미 늦은 밤을 향해 가고 있는 시간.
결국 내일 점심 무렵 하무백과 한설빙, 그리고 당지연이 월룡객잔에 가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