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너무 빨라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든다.
늘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오늘따라 생도들 사이 감도는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객잔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는, 그렇게 찝찝한 이야기라니.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수련은 진행이 되었다.
서서히 점심때가 다가올 무렵.
생도들의 시선은 교룡관 담장 너머 어느 곳으로 향했다.
보일 리가 없는데도.
한설빙은 이미 자리를 비운 터였고, 하무백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남아 있던 생도들도 주섬주섬 담룡각으로 향했다.
***
아직 점심때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
줄은 없었다.
그러나 월룡객잔 일 층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점소이는 재빨리 그들을 이 층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하무백과 한설빙, 그리고 당지연.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했고, 요리는 금세 나왔다.
하무백은 닭튀김을 천천히 먹으면서 내부를 자세히 관조했다.
한설빙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소면과 만두를.
당지연은 오리구이를 먹었다.
먹기 전 음식을 조금씩 덜어 서로 나눠 먹기도 했다.
특정한 음식에만 독이 들어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무백은 이미 한번 먹어 봤지만, 다른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먹는 것.
음식을 맛본 한설빙의 표정이 미묘했다.
어제 먹은 음식의 맛이 혀에 아직 남아 있는 탓인지, 맛의 대비가 너무 적나라했다.
"이건 평범한 맛이 아니라··· 맛이 없는데요?"
한설빙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제 너무 맛있는 걸 먹어 비교가 되어서 그래. 담룡각에서 먹고 여기로 오면 그냥저냥 평범한 맛이야."
"앞으로 거기 단골 해야겠어요."
어제 먹은 음식 맛을 잊지 못하는지, 한설빙이 그리 말했다.
하무백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가 실망할지도 몰라."
"네?"
"그렇게 맛있는 집이 왜 손님이 그 정도만 있었겠어?"
"어?"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그리 맛있는 객잔이라면 늘 사람으로 붐벼야 정상이니.
"객잔도 맛있는 날이 있고, 맛없는 날이 있어. 그야말로 복불복이지."
"숙수가 여러 명인 모양이네요."
천천히 오리구이의 맛을 음미하면서 먹고 있던 당지연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숙수가 넷인가 다섯이라는데, 그중 한 명의 솜씨가 어제의 음식들이지요."
"허."
한설빙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면 교관님은 어떻게······."
"근무 순번을 누가 알려줘서."
하무백이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공유해요."
한설빙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신분 역시 범상치는 않았기에 온갖 산해진미를 다 경험했을 텐데도 저런 반응인 걸 보면.
'조 숙수의 추천은 확실히 믿을 만하네.'
하무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봐서."
짧은 대답.
그 대답에 한설빙이 입술을 삐죽였다.
"두 분 사이가 굉장히 좋으시네요."
당지연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함께 전장에서 구른 세월이 있다 보니."
하무백은 무심하게 답했다. 그 말에 한설빙이 다시 한번 입술을 삐죽였다.
"그보다, 뭔가 알 것 같소이까?"
하무백의 물음.
당지연은 고운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일단 맛으로 구분은 안 되네요. 우리가 주문한 음식을 모두 먹어봤지만, 맛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맛으로 독을 구분하기 위한 수련들을 거쳐 그녀의 미각은 굉장히 민감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맛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하니, 맛은 완전히 지워낸 독임이 틀림없었다.
하무백의 시선이 한설빙에게로 향했다.
"별다를 것 없어요. 맛도. 내공도."
그것은 하무백 역시 마찬가지.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월룡객잔을 나서 교룡관으로 향했다.
동 총관이 그런 세 사람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
"하무백이라······."
동 총관의 보고가 수하를 통해 형의천에게 전해졌다.
"골치 아픈 놈이 꼬였어."
홀로 자신의 방에서 창밖의 경관을 살피던 그의 푸들푸들한 눈살에 주름이 생겼다.
무창으로 올 때 딱 하나 걸렸던 부분이 바로 하무백의 존재였다.
"거기에 당지연까지······."
천독현녀 당지연의 위명은 형의천 역시 알고 있었다.
"무언가 냄새를 맡았나?"
그렇지 않고서야 하무백이 단목운뢰 일행을 데리고 나간 다음 날, 당지연과 함께 올 까닭이 없었다.
"교의 일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놈인데······."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다.
이런 소란이 일어날 정도의 일이라면 놈도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은 했지만.
"너무 빨라."
그놈의 성격을 생각하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전쟁이 끝난 후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지내는 놈이, 어제 점심 무렵에 월룡객잔을 찾았다.
그것도 줄까지 서서 식사를 하고 갔으니.
'아무리 놈이라도 이상을 눈치챌 수는 없을 텐데.'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잠혼독이 섞인 음식은 자신 역시 먹어 보았고, 그 증상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독이라 의심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실험에 사용하는 정도의 소량이라면, 한 번의 복용에는 소멸되어 사라져 버리니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물론 계속해서 장복하게 되면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대로 진행이 되겠지만.
그렇게 발각될 걱정 없는 상황에서, 그 양과 횟수를 알아보기 위해 무창을 거대한 실험장으로 선택한 것이다.
어제저녁에 유의미한 반응을 보인 녀석들도 있었고.
나름의 결과만 얻어내면 잠혼독을 거두고 일반적인 영업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하무백이 꼬여 버렸다.
난감한 일이었다.
그놈이 꼬였다고 먼저 손을 쓰기도 힘들었다.
그건 자신들이 수상하다고 자백하는 꼴이었으니.
'거지들도 여전히 기웃거리고.'
창밖의 풍경 속 거지 몇몇이 그의 눈에 띄었다.
***
식사를 마친 하무백 일행은 곧장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생도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어요?"
당진산이 가장 먼저 물었다.
"어제 이야기해준 것 말고는 별다른 건 없었다."
하무백의 대답에 그의 시선이 당지연에게로 향했다.
"일단 무미(無味)
맛이 없는 독이란다.
제 누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저 젊은 나이에 독에 관해서라면 가문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이니.
한설빙과 당지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내부의 변화를 관조하기 위함이다.
하무백은 늘 그렇듯이 바위에 비스듬히 누웠고.
생도들은 그러려니 하고는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물론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서쪽 하늘이 붉어질 무렵.
하무백은 다시 한번 그 티끌 같은 기운을 느꼈다.
'유사한 반응이로군.'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강도로 자극이 있었다.
하무백은 이후의 반응을 알고 있었기에 내공으로 그 기운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한설빙과 당지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직 그녀들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 조 숙수.'
그러던 차에 어제 함께 점심을 먹은 그가 생각이 났다.
일반인들은 하루나 이틀 뒤부터 증상이 있다고 했으니, 일단 조 숙수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았다.
혹여나 그가 욕구를 참지 못하고 다시 월룡객잔으로 가는 것은 막아야 했으니.
그렇게 연무장을 떠나 담룡북각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일 시간에, 조 숙수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조 숙수?"
"아, 교관님."
하무백의 부름에 몸을 돌리는 조 숙수.
그의 두 눈 역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워, 월룡객잔 그놈들은, 천하의 죽일 놈들입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조 숙수.
"무슨 수작을 부려서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에 증상이 나오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놈들이 음식에 마약을 섞었습니다. 점소이의 모습을 예사로 봤습니다만. 제가 지금 겪으니 이건······."
잠시 말을 멈추는 조 숙수.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앵속. 앵속에 중독된 이들이 보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걸 어찌 아는가?"
"혼란한 시절에 앵속에 절어 살던 이들을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왜 여기에 나와 있는가? 그렇게 얇은 옷차림으로."
"음식 냄새를 맡으니 이 증상이 더욱 심해지더군요. 그래서 어떻게든 충동을 누르려고, 일부러 추위로 몸을 식히려 이러고 있던 참입니다."
앵속 중독자들을 본 경험이 있기에, 조 숙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충동에 져서, 다시 월룡객잔을 찾는 순간.
자신은 그것에 중독되리라는 것을.
그나마 주방 밖으로 나와 추운 곳에 있으니 떨림과 충동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충동은 며칠만 참으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대처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조 숙수의 신색이 정상을 회복했다.
"음식 냄새에 더욱 심한 충동이 이는 줄은 몰랐군."
"죽일 놈들입니다. 감히 음식에 이런 장난질을 치다니. 이건 독입니다, 독."
조 숙수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일단 이리 오게."
하무백이 조 숙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내공을 천천히 밀어 넣어, 조 숙수의 혀 근처를 살폈다.
역시나 쌀알만 한 기운이 뭉쳐 있었다.
"입 안이 조금 아플 걸세."
"네? 아악!"
의문을 내뱉자마자 혀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쌀알 정도로 커진 기운을 태우려다 보니 통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괜찮을 걸세."
하무백이 조 숙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네? 아······."
되물으려다 자신의 몸의 변화를 느낀 조 숙수.
더 이상 월룡객잔의 음식에 대한 충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창 바쁠 시간에 조 숙수가 주방에서 빠지면 안 될 일이지."
"가, 감사합니다."
어떻게 된 조화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하무백이 무슨 수를 쓴 것은 확실했기에 꾸벅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린 하무백.
"음식과 무슨 작용을 하게 해둔 것만은 분명하군."
그러니 보통 사람과 조 숙수의 반응이 달랐을 터.
아무래도 음식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반응이 격렬한 것 같았다.
하무백이 연무장으로 돌아왔을 때.
한설빙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지연 역시 그래 보였다.
그 순간.
당지연의 눈썹이 꿈틀했다.
"찾았다."
그리고 작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중얼거림.
그녀가 두 눈을 떴다.
"하 교관님 덕분에 수월하게 찾았어요."
혀에 티끌 같은 기운이 뭉치는 게 가장 먼저라고 들은 바가 있었고.
그랬기에 당지연은 혀 주위로 집중을 다하던 터였다.
"저는 내공의 수발이 하 교관님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해서, 일단은 이걸 계속 지켜볼 생각이에요. 어느 정도 증상이 나올 때, 제대로 살필 생각입니다. 독도 뽑아봐야 하고요. 그럼."
그렇게 당지연은 연무장을 떠나 잠시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자하만화독공(紫農萬化毒功).
당지연이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이자 사천당가 최고의 독공이다.
자하만화독공의 묘리 중 하나가, 자신의 몸에 들어온 독을 내공을 감싸 체외로 추출할 수 있다는 것.
다만 한 가지 제약이 있었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한 나신이 되어야 했다.
어느 혈에서 독을 추출할지는 독공을 운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기에.
그래서 당지연은 홀로 있을 수 있는 객잔으로 떠난 것이다.
"독을 뽑아내?"
당지연이 떠난 후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하무백이라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런 내공심법이 있어요, 당가에. 제약이 있긴 하지만요."
당진산이 짧게 말했다.
가문의 비전이었기에,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녀라 칭한 누이라지만, 몸에 들어온 독을 뽑아내기 위해 나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