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무공이라
"우리도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네. 그렇지 않아도 광회천 그놈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터이니."
벽력개의 말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혈교 놈들이니 저도 찾아봐야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하무백.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을 돌려 관제묘를 벗어났다.
벽력개는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무백이 떠난 후.
거지들이 다시 관제묘 안으로 모였다.
"광회천을 찾으러 나간 아이들 모두 불러들여라."
분노가 가득한 음성임을 거지들은 바로 알아차렸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개방도들.
"그 새끼가 아무래도 단안상단에 숨어 있는 듯하다. 무창 아니면 장사. 이 두 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말고 샅샅이 뒤져야 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
개방도들은 잔뜩 긴장해서 대답했다.
벽력개는 몸을 일으켜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분간은 자리를 비우면 안 되겠어.'
단목가에 도착한 벽력개는 그리 마음먹으며 거적을 깔고는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총총히 빛나는 별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는 반대로 벽력개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천승아······."
오랜 친우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벽력개는 슬며시 두 눈을 감았다.
***
관제묘를 나온 하무백은 천천히 무창 곳곳을 누볐다.
기감은 무창 전체를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특히나 혈공의 흔적을 찾았다.
혈교 놈들이 대체 숨어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거기에 더해 단목운뢰의 집을 습격했던 놈들과 비슷한 내공을 지닌 이들 역시 찾고 있었다.
"혈공은 분명 아니었어. 정파나 사파의 내공도 아니었고."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한번 만나 보았고, 그 내공을 보고 느꼈으며, 기억했으니까.
혈교인지, 마교인지 판단이 안 서는 것이 문제였으나.
벽력개를 만나 그 문제도 해결했다.
그는 혈교 놈들일 거라 확신했으니.
사연을 들으니, 하무백도 충분히 혈교임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없었다.
자신과 만나 자결을 한 스무 명.
그들이 전부였다.
'무창 밖은 어떨까?'
기감의 범위를 넓혔다.
이제 무창 밖 일정 범위의 지역까지는 살펴도 무리가 가지 않았으니.
그러나, 없었다.
쉽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단안상단이 무창에 자리를 잡은 월룡장으로도 기감을 집중했다.
역시 없었다.
단목세가의 내공을 익힌 이 역시 없었다.
'단안상단에 숨어 있을 거라 했는데······. 다른 곳에 숨어 있는 것인가?'
광회천이라는 자의 기척 또한 찾을 수가 없었다.
"꼭꼭 숨었군."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월룡장을 훑었다.
이내 찡그렸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가장 높은 누각.
최상층에서 벌어지는 질펀한 움직임이 느껴진 탓이다.
단목세가의 내공과 혈교의 무공을 찾기 위해 기감을 최대 한도로 집중한 탓이다.
보통 무창 전체로 기감을 펼쳤을 때는 이런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다면 오히려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을 터.
무창에 있는 기루만 해도 몇이던가.
"팔자좋은 놈이군. 나랑은 다르게."
언짢은 듯 중얼거리는 하무백.
"······!"
그리고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놓쳤던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
육로는 자신의 보고에 돌아온 답신을 보고 있었다.
"잠혼독의 완성을 서두르란 말이지······."
복잡한 눈빛이다.
"저는 지금의 상태도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육로의 심복이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허나 육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소모되는 양이 너무 많았다. 조절도 불가능했고.
어찌 되었든 교주님이 이번 실험 결과에 제법 만족한 기색이라 했다. 미완성인 잠혼독임에도.
"골치 아프군."
실상 잠혼독의 실험과 개량, 개발은 대부분 형의천이 도맡아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무창.
"제가 무창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살피고 재촉해 보겠습니다."
육로의 복잡한 눈빛에 심복이 다시 한번 말했다.
"죽으러 가고 싶은 것이더냐?"
그곳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무백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어찌 그 넓은 무창에서 저를 찾아내겠습니까?"
자신만만한 심복의 모습에 육로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진혈공을 익힌 이들은 어찌 되었더냐?"
대답 대신 던진 물음.
심복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조금 전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연락이 끊겼다고······."
"하무백이겠지."
육로는 담담하게 말했다.
형의천은 혈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상관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다.
하무백 그 괴물이 그곳에 있는 한, 혈교인들에게 무창은 금지나 다름없는 곳.
진혈공을 익힌 이들마저 당했으니.
그 때문에 지금도 육로 자신이 장사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잠혼독의 연구를 진행한 곳이 장사다.
단안상단의 본단이 있는 곳.
형의천은 본단의 월룡장 깊숙한 곳에서 진행된 연구의 결과물을 가지고 무창으로 떠났다.
다음 단계를 위한 실험을 하겠다며.
거기에 과거의 계약까지 들먹이며.
"혹시 형의천 그자가 다른 마음을 먹고 무창으로 간 것은 아닐런지요? 하무백을 이용해 저희의 접근을 차단하고서는요."
무창에 쉬이 가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일까. 심복은 문득 이런 의문을 내비쳤다.
그러나 육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에.
"일 년 반 전에 그가 찾고 있던 이들의 소재를 알아냈다 했지. 그리고 그자는 일 년 전부터 무창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어. 하무백이 무창에 들어온 것이 작년 이 월말. 그것도 갑작스러웠지.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는 추측이야."
육로의 대답에 심복은 다시금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놈의 그 목표에 대한 집착을 생각한다면······."
일석이조를 노리고 무창에 간 것일 게다.
그나저나 혈교의 부활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교주가 놈의 연구에 만족했다라.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 역시 그 엄청난 광경을 직접 목도했으니.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짓던 형의천의 섬뜩한 모습도 또렷이 기억이 났다.
그런 놈이니 가문을 배신한 것일 테지.
어쨌든 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라야 했다.
육로는 단안상단의 본단으로 향했다. 그곳에 형의천에게 전서를 전할 이가 있으니.
심복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전서의 내용은 당연히 잠혼독을 빨리 완성하라는 재촉이었다.
***
여화는 작은 뒤뜰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가슴이 답답한 느낌 때문이다.
담장 밖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랬다.
소란이 없음에도 소란스러운 듯한 느낌.
"하아. 그놈이 여기를 찾았을까?"
답답한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여화.
그녀는 그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하면서도 집념이 가득한 눈빛.
그것은 악귀였다.
가주 단목천승이 그놈을 막아서며 자신과 운뢰, 운혜를 탈출시켰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절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녕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가 무서워 빈민가의 움막을 떠나지 못했다.
운혜가 아파 하루하루 쇠약해져 감에도, 그놈이 자신들을 찾아 해코지할까 무서워 방 어르신의 도움도 거절하지 않았었던가.
은인을 만나 조용히 운혜를 치료하고, 또 이렇게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 자신들을 노리고 나타날지 모를 악귀.
최근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어 잠시 그 악귀를 잊을 수 있었건만.
오늘따라 왜 이런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어머니?"
그때 운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이 늦었다. 어서 자지 않고 왜 나왔느냐?"
"무언가 가슴이 답답해서요."
단목운뢰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여화의 걱정 어린 시선이 아들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냥 공기가 무거운 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육감 같은 거······."
아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니.
그 사실에 여화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금세 사라졌다.
아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무공 수련은 어떠냐?"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물음이었다.
"재미있어요. 어렵고요. 그리고 막막하네요."
단목운뢰가 밤하늘의 총총한 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저 별들처럼 무수히 많은 것 같아요. 거기에 비하면 저는 너무도 작은 존재이고. 익히고 있는 무공도······."
단목운뢰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하무백에게 배우고 있는 삼재검법만 하더라도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
"교룡관의 동투제에서 제법 좋은 성과를 얻지 않았니. 이 어미는 정말 깜짝 놀랐단다. 너무 대단한 성과라."
어머니의 격려.
4강에 올랐던 단목운뢰다.
고작 삼재심법과 삼재검법만 가지고.
무공에 입문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단목운뢰가 명가의 제자들을 모두 꺾고서.
"······."
단목운뢰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함께 수련하는 이들 중 주우명과 백리평이 있었다.
거기에 가끔, 아니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남궁지후까지.
태극혜검, 천성검법, 창궁무애검.
그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다.
최근에 백리평은 천성은하검법이라는 새로운 검법을 수련 중이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단목운뢰는 무공에 갈급했다.
새롭고 더 강한 무공에 대한 갈증이 엄청났다.
마셔도 마셔도 해소되지 않을 갈증이건만, 단목운뢰에게 주어진 것은 삼재공이 전부다.
마실 수조차 없는 상황.
그런 답답한 심정이 단목운뢰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운뢰야······."
여화는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괜한 걱정이었나 보네요."
그사이 스산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평소의 밤공기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직 기감을 넓혀 주변의 기척을 살피는 방법을 모르는 단목운뢰다.
그랬기에 지금 자신의 집 주변을 하무백이 싹 정리했음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무겁고 답답한 공기가 평소처럼 돌아왔다는 것만 느꼈을 뿐.
여화는 아들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공이라."
여화는 자신의 왼쪽 팔목의 낡은 팔찌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들이 바라는 것.
자신만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이지만.
들어줄 수 없었다.
단목세가의 유일한 적손인 단목운뢰다.
그런데 단목세가의 무공은 일초반식조차 익히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고도 답답했다.
그렇게 복잡한 신색으로 한참을 서 있던 여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실로 향했다.
***
놓쳤던 무언가가 이끈 곳.
처음 출발했던 단목가다.
하무백은 다시금 그 앞으로 되돌아왔다.
무창 전체를 뒤진 후 교룡관으로 가려다가 무언가 떠올린 탓이다.
정확히는 질펀한 정사의 기척을 느끼고 언짢았을 때.
그와 비슷한 감각을 잠깐이나마 느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질감.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기분을 느꼈었다.
도망치는 놈들을 쫓느라 잠시 미뤄놓았던 감각.
스무 놈 모두의 자결을 막지 못한 후 무창을 이 잡듯이 뒤지느라 그만 간과했지만 말이다.
그것을 이 자리에서 느꼈었다.
"미세하지만 분명히 여기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불쾌하고 짜증 나는 이질감."
누군가가 기감을 펼쳐서 이곳을 살폈을 것이다.
사실 그 사실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했다.
당장 하설란이 기감을 펼쳐 무창을 살필 때도, 하무백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하니.
그러나.
아까는 달랐다.
끈적하면서도 거북한, 그 기이한 느낌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들었다.
어쩌면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무백도 미뤄두었다가 잊지 않았던가.
그 정사가 그 느낌을 상기시키지 않았더라면, 분명 하무백은 교룡관 숙소의 침상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누가 능력을 넘어서는 기감을 억지로 펼친 탓일까?
하무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느낌이 비롯된 곳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찰나지간 약하게 느꼈던 것이기에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방향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멀리 월룡장의 높은 누각이 보였다.
'예전에 접한 적이 있던 내공의 기운이었다.'
하무백이 심유한 눈으로 누각을 바라보았다.
분명 여전히 자신의 기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질펀한 정사를 끝낸 인간의 기척만 감지될 뿐.
그들은 내공이 한 줌도 없는 이들이었다.
적어도 하무백의 기감에는 그곳에서 내공을 가진 이가 느껴지지 않았으니.
주변에는 많았다.
단안상단의 무사들.
상단의 무사들답게 각양각색의 내공을 익혔다.
하지만 어디에도 단목세가의 내공은 없었다.
"분명 잠깐이지만 단목세가의 내공의 기운이었어. 결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다시금 그때의 느낌을 정리하니 확신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곳에서 단목세가의 내공을 익힌 이가 이곳을 살폈다.
서투르게 기감을 펼쳐서.
월룡장.
앞으로 중점적으로 지켜봐야 할 곳 같았다.
벽력개가 말했던 광회천.
그가 아니라면 현재 단목세가의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무했으니.
월룡장 어딘가에 아마도 그가 있을 터였다.
"어디에 숨었냐?"
하무백이 월룡장이 자리한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