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85화 (185/312)

185화. 애꾸네?

"그 고서에 나온 내용이라 하셨어요. 인간의 상리를 벗어나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공부이기에 혈독공이 기록된 비전서를 불태웠다고. 진위는 알 수 없어요. 할아버지께서 모으신 고서에 나온 내용이니. 말씀드렸다시피 회고록 같은 내용의 고서였어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그 고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혈교의 비전서를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이라니.

적어도 혈교의 인물은 절대 아닐 테고.

"지난 전쟁에서 식강시라는 놈들은 없었어요."

한설빙이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고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거나, 진실이거나.

분명한 사실은 하무백과 한설빙 두 사람 모두 식강시라는 존재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혈교와의 전쟁에서 강시라면 정말 질리도록 상대했음에도.

"고서에는 혈독공과 혈독을 조합해 만드는 독이라고 나오는데, 혈독의 제조법은 밝히지 못했기에 혈독공만을 없앴다고 되어 있었어요."

"월룡객잔의 독이 독공과 독의 조합이라고 하셨었으니."

당지연의 말에 한설빙이 작게 읊조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독공과 독이었는데, 하 교관님께서 혈교를 말씀하셔서 떠오른 거예요."

하무백이 가만히 팔짱을 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문제였다.

혈독공은 실전되었다 했는데, 그게 나타난 셈이니.

"결국, 다시 독을 모아서 분석하는 수밖에 없는 거로군요."

설명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당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저 혼자 가도 될 듯합니다."

하무백의 말에 당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을 추출해 내려면 자신의 자하만화독공이 반드시 필요할 텐데.

"그 독에 혈공이 있는지 확인하는 데는 굳이 뽑아낼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일단 저도 함께할게요. 혹시 모르니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연구는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세 사람은 다시 월룡객잔으로 향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하무백이 엄청난 양을 먹었다는 것이다. 거의 성인 여섯 명은 모여야 먹을 수 있는 양.

"왜 그렇게 많이 드신 거예요?"

월룡객잔을 나서며 한설빙이 물었다.

"혈공의 흔적을 찾으려면 독이 많아야 하니. 음식에 소량씩 섞었다면 많이 먹을수록 많아질 테니까."

단순한 이유였다.

"독 기운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당지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 역시 저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직접 경험한바, 자신이 독의 충동을 억누를 수 있는 양이 지금의 식사량 정도였기에 사용하지 않는 것일 뿐.

하무백은 그저 싱긋 웃었다.

그렇게 하무백은 점심도, 저녁도 그만한 양을 먹었다.

당지연은 매 식사 후 하무백의 도움으로 독 기운을 빠르게 키워 추출해냈다.

하무백은 오히려 식사만 많이 했을 뿐 독 기운은 건드리지 않았다.

***

형의천은 동 총관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무백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다.

월룡객잔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먹어치웠다고 했다. 그것도 삼시 세끼를.

형의천은 음식 목록을 보면서 거기에 들어간 잠혼독의 양을 계산했다.

이 정도 양이라면······."

"독 기운이 모두 형성되면 발작하겠는데?"

형의천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틀이면 독 기운이 형성될 테고,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지를 상실하고 먹을 것만 찾다가······."

형의천의 머릿속에 그 과정이 생생히 그려졌다.

잠혼독.

혼을 잠식하는 독이다.

그리고 중독자를 강시로 만든다.

끊임없이 먹을 것만 갈구하는 강시, 식강시.

무공의 고수라 해도 그 독을 쉬이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식욕과 중독.

두 가지 증상에 정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진짜 목적은 머리에 독기를 침투시켜 인간의 혼을 빼앗기 위한 것.

그렇다면 하무백은 이미 충분한 양의 독을 먹은 셈이다.

"큭큭큭."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혈교 제일의 대적이 스스로 강시가 되는 독을 그렇게 먹어주다니.

아마도 월룡객잔의 요리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그것을 알아보려다가 많은 양을 먹은 것 같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였다.

스스로 혼을 버리는 행위.

형의천은 설마 이리 쉽게 자신의 고민이 해결될 줄은 몰랐다.

잠혼독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하나는 제조가 어려웠다.

혈독공의 기운이 들어가야 했고, 그 과정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예민했다.

두 번째는 내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즉효가 나타나지 않았다.

최소 하루나 이틀.

그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야지만 독의 효과가 나타났다.

해서 교주에게 보낼 때 내공을 폐한 이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으라 따로 알리기도 했으니.

이 둘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으나, 도무지 풀리지가 않았다.

교주는 완성을 서두르라 했지만 형의천의 생각에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해서 진작에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용량을 찾아내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돌렸다.

그 결과가 무창의 월룡객잔과 월룡루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

무인들에게 필요한 최소 용량, 그리고 일반인에게 필요한 최소 용량.

그걸 기반으로 계산하면 현재 실험에 소모되고 남아 있는 현재의 잠혼독이면.

"삼백의 무인을 강시로 만들 수 있다. 내공이 없는 이라면 천."

이곳 무창을 혼란에 빠뜨리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내다보던 형의천의 시선이 단목가로 향했다.

"그 정도 혼란이면··· 거지 놈들도 별수 없겠지. 크흐."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틀 뒤면 하무백이 강시로 화할 터.

그날.

무창에 잠혼독을 뿌린다.

강시가 된 일반인 천 명.

그들이 무창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 것이다.

그 틈에 여화를 빼 올 생각이었다.

"정말로 금제를 풀어야겠어."

아침만 하더라도 금제를 풀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 금제를 풀기로 아예 마음먹었다.

오늘 하루 동안 갑작스레 일이 원하던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

설마 하무백이 그 정도의 잠혼독을 스스로 먹어줄 줄이야.

모처럼 하늘이 돕고 있었다.

***

깊은 밤.

하무백은 교룡관을 나와 평소 수련하던 야산으로 향했다.

"탐식이라 하니."

오늘 먹은 음식의 양이 상당했기에.

아직 금령탐식혈독공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대비해야 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독 기운을 이겨내지 못할 때를.

물론 그럴 일은 만에 하나도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하무백이 천천히 내공을 움직였다.

이미 독 기운의 씨앗은 나타나 있었다.

내공으로 그 씨앗을 살살 자극하고 키웠다.

점점 커지는 독 기운.

쌀알을 넘어서 대두알 정도로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복숭아 씨앗과 같은 크기까지 확장되었다.

하무백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먹은 음식의 양에 비해서 독 기운이 너무 컸다.

'단순히 음식량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중첩되어 늘어나는 거로군.'

사람마다 시일의 간격이나, 증상의 정도가 차이가 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독 기운의 중첩.

하무백이 오늘 먹은 식사량에 비례했다면 독 기운은 쌀알 열여덟 개의 분량이다.

복숭아 씨앗 한 개의 크기는 쌀알 사백 톨을 합친 것에 육박한다.

게다가 모양도 기이했다. 혀와 거의 같은 형태를 띠면서 가느다란 꼬리가 목 뒤를 타고 머리 쪽으로 뻗어 있었다.

머리 쪽으로 독 기운이 깊게 침투할수록 충동도 강해지는 듯했다.

그러니 현재 하무백이 느끼는 충동은 엄청났다. 쌀알만 한 기운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하무백이 이를 꽉 물 정도였으니.

당장 무엇인가를 먹고 싶었다.

특정한 음식이 떠오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걸 닥치는 대로 먹고 싶을 뿐.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후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크흑."

악문 이 사이로 신음을 흘릴 정도로 엄청난 충동이 뇌리를 지배했다.

머리로 향해 있는 독 기운의 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타오르고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당장에 눈앞의 흙이라도 퍼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말로 뭐든지 먹고 싶었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욕이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하무백의 두 눈에 붉게 핏발이 섰다.

뿌드득.

악 다문 이가 갈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울리고.

온몸의 힘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예상치를 훨씬 상회하는 충동이다.

하무백마저 그 욕구에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이 독 기운을 태워 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여기에서 혈독공의 흔적을 찾아야 했으니.

'탐식.'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글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충동이었다.

증상으로 보아 당지연이 말했던 금령탐식혈독공일 가능성이 구 할 이상이었지만, 마지막까지 확실히 해야 했으니.

하무백은 이를 악물고 모든 심력을 다 쏟아부어 욕구를 억눌렀다.

'단 한 순간이면 된다.'

충동에서 벗어날 찰나의 순간.

지금 하무백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두 눈이 터질 듯했다.

온몸의 근육마저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오른 근육이 당장 파열될 것만 같은 그때.

무극여의심법을 운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미칠듯한 충동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 틈에 더욱 무극여의심법에 집중하는 하무백.

사지백해를 도는 무극여의심법의 내공은 하무백의 심령을 제압하려던 독 기운을 몰아냈다.

그리고 몸 곳곳에 숨어있는 독 기운 역시 찾아냈다.

'어마어마하군.'

혀 모양대로 뭉쳐 있는 독 기운이 혀 아래 혈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은 무극여의심법의 내공에 눌려 아무런 힘도 못 쓰는 상황.

하무백은 무극여의심법으로 혀 아래의 독 기운을 샅샅이 뒤졌다.

과연 그 연원이 어디인가.

정말로 혈독공인가.

혈교의 무공이라면 분명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을 터.

하무백은 무극여의심법과 독 기운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샅샅이 분해해서 뒤졌을까.

좁쌀 하나같이 작은 기운을 찾을 수 있었다.

독 기운의 핵이 되는 듯한 기운.

그러나 작은 크기일 때는 그 흔적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혼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혼탁한 것들 중 혈공의 흔적이 작게 느껴졌다.

'찾았다.'

하무백이 아는 혈공과는 조금 달랐지만 혈독공이라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을 당지연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몸속의 독을 액체화해서 추출해내는 능력이 하무백에게는 없었으니.

그렇다고 이 정도 양의 독 기운을 당지연에게 먹일 수도 없었다.

하무백 자신도 겨우겨우 버틴 충동이다. 아니, 아차하는 순간 넘어갈 뻔했다.

분명 당지연은 그대로 탐식에 먹히리라.

모든 것을 살핀 하무백은 이제 몸 안에 남아 있는 독 기운을 모두 태웠다.

거칠게 반항했지만 무극여의심법의 내공을 당할 수는 없었다. 서서히 불살라 소멸시켰다.

절대 사람 몸에 있으면 안 되는 독 기운이었다.

머리를 향해 뻗어있던 꼬리가 머리에 도달해 완전히 잠식하게 된다면 어찌 될까?

"식강시."

생각을 이어가던 하무백이 작게 중얼거렸다.

과연, 이 독은 강시를 만들기 위한 독이었다.

혈교 놈들이 사라진 독을 다시 만들어 내려 무창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실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무백이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꼬박 밤을 보낸 것.

그 정도로 지난하고 고된 작업이었다. 하무백이었음에도.

옷에서 지독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독을 태운 기운이 모공으로 흘러나오면서 옷에 배어든 것이다.

정말 지독한 독이었다.

이런 독을 무창에서 실험하고 있다라.

하무백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무창 쪽을 바라보았다.

"혈교 이 새끼들······."

***

관제묘에 모인 개방의 거지들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용모파기를 관찰하고 있었다.

벽력개의 명령 때문이었다.

월룡객잔에 광회천이 있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외모를 가진 이는 없었다.

물론 변장하고 숨어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찾을 수 없었다.

해서 인력으로 가능한 방법 내에서 용모를 바꿨을 때 어떻게 되는지, 뛰어난 초상화 화공 여럿을 초빙해 시험하고 있었다.

돈이 상당히 깨졌다.

거지들이 돈을 동냥하기는커녕 돈을 써서 사람을 쓰고 있다니.

정말로 진심을 다해 광회천을 찾고 있었다.

월룡장, 월룡객잔, 월룡루에 관련된 모든 사람의 용모파기를 모았다.

불과 하루 만에.

월룡장이 무창에 진출한 순간부터 모아오던 것이기에, 짧은 시간에 모을 수가 있었다.

"일단 여자는 다 뺀다."

남자들의 용모파기만 남았다.

"신장이 광회천보다 짧은 이는 다 빼고."

키를 늘릴 수는 있지만,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용모파기에 화공들이 덧그림을 그리며 광회천의 용모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니야. 여긴 눈꼬리가 달라. 여긴 옆으로 가 있는데, 이 사람은 위로 솟아 있잖아."

"눈꼬리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선유곡에서도 불가능할걸?"

그림을 보고 거지들이 갑론을박했다.

그렇게 불가능하다 판명된 그림은 하나씩 제외했다.

"애꾸네?"

"멀쩡한 눈 위에 안대만 한 걸 수도 있지."

"아니면 진짜 눈을 파냈을지도 모르지."

"설마?"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한 인물의 용모파기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들.

"최 화공. 여기 두툼한 살을 빼면 어찌 될 거 같소이까?"

화공이 그림을 고친다.

"응? 눈매가 변했는데?"

"살이 빠지면 살집이 줄어 눈이 커집니다."

한 거지의 물음에 최 화공이 답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초상화를 고치다 보니.

"이, 이건······."

거지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동녘이 밝아 오고 있었다.

거지 하나가 초상화 셋을 가지고 관제묘를 나와 전력으로 달렸다.

벽력개가 있는 곳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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