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90화 (190/312)

190화. 그대로 멈춰

"대체 그건 뭔가요?"

당지연이 다시 한번 물었다.

"혈교의 전서예요. 그들의 암어로 적힌."

한설빙의 답에 모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새들을 모두 혈교에서 날려 보낸 것이란 말인가.

무창에 혈교가 저리도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니.

"그럼 역시 단안상단이······."

당지연이 중얼거렸다.

월룡객잔에서 혈교의 독을 은밀히 푼 이상, 그들의 본단인 단안상단이 혈교라는 것은 합당한 추론이었다.

"전부인지, 일부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들이 식강시를 만드는 잠혼독을 부활시킨 것은 분명하고. 그 제조법과 비축한 절반의 독을 혈교 본단으로 보낸다고 해요."

"그리고요?"

그런 걸로 하무백이 그리 다급히 달려갔을 리 없었으니.

"······남은 절반을 무창에 뿌린다고 하네요."

이어진 한설빙의 대답에.

단목운뢰는 당장 달려가려 했다.

"어, 어머니! 운혜야!"

무창에 그의 가족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가지 못했다.

한설빙이 그를 붙잡았기에.

"하 교관님이 가셨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막아내실 거야."

"그, 그래도··· 그 잠혼독이란 것에 중독되면 저런 괴물이 된다는 거잖아요. 되돌릴 수도 없는······."

단목운뢰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식강시에게로 향했다.

한설빙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부디 하무백이 독의 살포를 막아냈기를 간절히 바랄 뿐.

"서둘러야겠네."

당지연이 말했다.

"진산. 어서 도와."

그리 말한 그녀는 식강시에게로 다가갔다.

갑작스레 날아오른 새들 때문에 중단되었던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지연의 손에 들린 작은 단도가 식강시를 지나자 피부가 갈라지고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어서 받아."

당지연의 말에 당진산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강시라며, 이거. 그런데 어떻게 피가······."

당진산이 중얼거렸다.

강시는 시체다.

당연히 피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혈교 새끼들이 끔찍한 거야. 독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강시로 만드는 거니까······."

곁에 다가온 한설빙이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연하민의 중얼거림에.

"맞아. 오히려 상대하기는 쉬워. 사람 죽이듯 죽이면 되니까."

한설빙이 담담하게 말했다.

식강시.

하무백도, 그녀도 처음 보는 강시였다.

그러나 지난 전쟁에서 겪었던 무수한 강시와의 전투 덕에.

당지연이 가른 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단번에 식강시에 대한 파악을 끝냈다.

"산월마림의 강시들보다는 상대하기 쉬울 거야."

한설빙의 말에도 생도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독에 중독되면 강시가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신의 친구가,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단목운뢰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이놈 이빨에 독은 없나요?"

한설빙의 물음에 당지연은 얇은 가죽 장갑을 낀 후 식강시의 턱관절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그러자 턱이 빠져 버렸고, 식강시는 턱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시약으로 입 안을 살폈다.

"입 안에는 아무런 독이 없네요. 혈교의 사강시에는 독이 있어서 물리면 강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식강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불행 중 다행인 일이다.

"확실히 사강시보다는 상대하기 쉬울지도······."

백리평이 중얼거리자.

연하민이 고개를 저었다.

"더 어려울지도 몰라."

단정적인 그녀의 말에 백리평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종남의 제자를 벨 수 있겠어?"

그 말에 멈칫하는 백리평.

연하민의 시선이 다시 단목운뢰에게로 향했다.

손톱을 물어뜯기까지 하는 단목운뢰.

그는 지금 온통 가족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빌어먹을 독이야."

연하민의 말에 백리평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강시는 달랐다.

누가 봐도 썩어가는 시체였으니.

사강시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사강시는 무수히 보았다.

얼굴은 제 형태를 겨우 유지할까 말까 할 정도로 썩어 문드러진, 그야말로 시체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식강시는 달랐다.

생전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저 눈의 초점만 사라졌을 뿐.

독이 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중독되어 날 물어뜯어 먹어 치우겠다고 달려들 때.

과연 검을 들 수 있을까.

내 동료, 친구, 가족에게.

모를 일이다.

저기, 저 침울한 얼굴의 동정구걸을 보라.

흑도 파락호인 그들조차 저리 안타까운 얼굴로 식강시가 된 동료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응?"

그때 한설빙의 눈썹이 꿈틀했다.

"모두 모여."

그녀가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진에 침입했어."

잔뜩 긴장한 기색이다.

그럴 수밖에.

생문이 아닌 곳이 엄청난 힘에 밀려 열리고 있었으니.

"허허. 날세. 한 교관. 미안허이. 오늘은 진법이 좀 강하게 펼쳐져서, 억지로 열고 들어오느라."

서리안개 사이로 들린 인자한 목소리에 한설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르신."

"사부님!"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위지군의 모습에 하설란이 냉큼 달려갔다.

"무백이에게 저간의 사정을 들었네."

"무창은 무사한가요?"

그 말에 하설란이 다급히 물었다.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단목운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풀썩 주저앉았다.

"놈들이 독을 뿌리긴 했는데, 무백이의 기지로 대부분 회수했다. 놓친 것이 조금 있긴 한데, 극히 적은 양이 넓게 퍼진 것이라 당장 강시가 될 이는 없을 듯하구나."

위지군의 말에 하설란이 당장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기감으로 살펴보면 되는 것을.

너무도 충격적인 소식에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전력을 다해 펼친 기감으로 무창을 살폈다.

무수한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일시에 몰아치는 엄청난 양의 정보에 하설란은 머리가 당장에라도 깨질 것 같았으나 더욱 집중했다.

'식강시.'

지금 자신들과 함께 있는 그것과 비슷한 기척을 지닌 존재가 있는지, 샅샅이 살폈다.

"다행이다······."

하설란이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없어요. 하나도."

그녀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도 빨리 정리하고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게다. 월룡객잔이나 월룡루의 음식을 먹은 이들에게 언제 독이 발현될지 모르니. 그 전에 치료해야 해."

위지군의 말에 당지연이 두 눈을 빛냈다.

"어떻게든 발현 전 잠혼독의 해독 방법을 찾아내겠어요."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독의 발현이 먼저냐, 해약의 제조가 먼저냐.

그러나, 해약을 만들 수는 있을까.

***

"으헉."

벽력개는 발아래가 훅 꺼지는 느낌에 재빨리 자신의 발을 지지대 삼아 뛰어오르려 했으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전각의 지붕에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그 위로 전각이 덮쳐 내렸다.

광회천은 전각을 무너뜨리는 기관을 작동시키자마자 창밖으로 몸을 피한 다음이다.

바로 창가에서 작동시켰으니.

그는 무너져 내리는 전각의 잔해를 이용해 경공을 펼치며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어, 어르신!"

전각이 무너져 내리자 월룡장 곳곳에서 전투를 펼치던 개방도들이 대경해 몰려들었다.

저곳에 벽력개가 있는 것을 알기에.

"이때다. 쳐라!"

그런 그들의 위를 월룡장, 아니 혈교의 무사들이 공격했다.

개방도 일부는 전각의 잔해를 치우려 하고, 일부는 혈교의 공격을 막았다.

막상막하의 전투가 순식간에 수세로 변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광회천은 재빨리 몸을 뺐다.

혈교의 무사 그 누구도 광회천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형의천의 모습만을 알고 있었으니.

월룡장을 벗어난 광회천은 빠르게 움직였다.

월룡장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전투가 벌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뭐지?'

무창은 너무 평온했다.

자신의 명령대로 잠혼독이 뿌려졌다면 이럴 리 없었다.

교룡관 앞에 뿌려 정천맹의 혼란을 야기하고, 그 뒤 아홉 곳에 동시에 뿌려 무창을 완벽히 뒤흔든다는 계획이.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

'무언가 변수가 생긴 모양이로군.'

눈살을 찌푸린 광회천.

'어쩔 수 없군.'

이미 기호지세다.

어떻게든 비고의 위치와 열쇠를 얻어야 했다.

식강시가 무창을 난장판으로 만든다면 더 쉬웠겠지만.

어쨌든 벽력개는 치웠다.

계획과는 다른 방법이었지만.

이제 단목가를 지키는 이들은 없을 터.

'어쩌면 이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

휙휙.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광회천은 미리 알아둔 여화의 집에 도착했다.

"누가 일을 방해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간다."

광회천이 담장을 훌쩍 넘었다.

그 시각.

여화는 단목운혜와 다과를 먹으려던 참이었다.

이곳은.

최초로 식강시가 나타난 곳과도, 월룡장과도, 교룡관의 정문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곳이었다.

그랬기에, 아무런 소란도 없이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수군거리는 기색이 있을지 몰라도, 집 안에만 있는 이들 모녀에게는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다만.

광회천이 담장을 넘는 순간.

여화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등줄기가 쭈뼛 섰다.

"오랜만이야."

그와 동시에 들리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여화는 순식간에 단목운혜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어젖히고 달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그러나 헛된 움직임이었다.

"크큭.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여화."

그런 그녀의 앞을 단번에 막아선 광회천.

안대를 하고 있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수년의 세월을 격하고 눈앞에 나타났다.

"광회천······."

여화는 원한 가득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 엄마······."

이 상황에 단목운혜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엄마를 불렀다.

"호오. 많이 컸군. 그때는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을 텐데."

획.

그 말에 여화가 단목운혜를 품 깊은 곳으로 안았다.

"어디지?"

광회천이 여화를 노려보며 물었다.

"뭘 말하는 거지?"

여화가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원한이 가득한 표정.

그러나 그 얼굴 뒤로는 겁에 질린 내심이 숨어 있었다.

이 순간 저 괴물 같은 놈의 손에서 도망칠 방도가 없음이니.

"알잖아. 단목가의 비고. 장사를 샅샅이 뒤졌어. 단목가의 터도 뒤졌고. 그런데 어디에도 없더라고. 동원한 기관의 전문가만 해도 수십 명이었는데. 단목천승 그 늙은이라면 분명 네년에게 알려줬을 텐데. 물론 열쇠도 줬을 테고."

"그런 것 없다!"

여화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에 광회천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맹룡대 같은 곳에 들어갔겠지. 빈민가에서 겨우 연명하면서."

그 말에 여화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을 찾아낸 것도 놀라웠지만, 어찌 빈민가에서의 행적까지.

"솔직히 찾느라 고생했어. 설마 그런 곳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단목세가의 고귀한 꽃이던 여화가 말이야."

광회천의 두 눈에 복잡한 욕망의 기운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여화는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네년은 독한 년이었지. 나 이상으로."

광회천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난 내 눈 하나를 스스로 찔렀어. 그리고 무공에 금제를 가했지. 말도 안 되는 흉측한 돼지가 되어 살았어, 수년을. 헌데 말이야. 내가 알기로 네년은 나보다 더한 독종이야. 그러니 비고를 그대로 두고 지금까지 빈민가에서 버틴 거겠지. 네 딸년은 어떻게 치료했는지 모르겠지만."

여화가 두 눈을 치켜떴다.

운혜가 아팠던 것까지 알고 있다니.

"겨우겨우 건강해진 딸년인데. 여기에서 잃으면 어떨까?"

두둑두둑.

광회천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화의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품 안의 단목운혜.

단목세가의 비고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소중한 존재다.

무공의 갈증을 느끼는 단목운뢰를 생각하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어찌 목숨과 비교할까.

'그때 주었어야 했나······.'

며칠 전 밤.

그때 단목운뢰에게 비고에 대해 알려주고 그곳으로 보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나 바빠. 그러니 어서 끝내자고."

한 걸음.

광회천이 여화에게 다가갔다.

한 발짝.

여화가 물러났다.

비고의 위치를 알려주고 열쇠를 주는 것.

어렵지 않다.

가족의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저놈이 광회천이라는 게 문제였다.

과연 그것만 얻고 순순히 떠날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광회천이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손끝이 여화의 품에 있는 단목운혜에게 향했을 때.

"그대로 멈춰."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광회천이 획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못 느낀 탓이다.

등 뒤에 갑자기 나타난 존재.

"네, 네놈은······."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스스로의 멍청한 행동으로 식강시가 되어야 할······.

'그러고 보니.'

독을 뿌리기 전에 저놈부터 식강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식강시가 된 이는 한 놈뿐이었다.

저놈까지 생각하면 둘이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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