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곱게 죽지는 못한다
미칠듯한 충동이 일었다.
정말이지 눈앞의 흙이라도 퍼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냥 어깨에 달린 이 오른팔이라도 씹어먹고 싶었다.
어차피 손도 박살 나서 쓸모도 없는 것.
이 격렬한 허기와 식욕을 달래는 데 사용한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광회천의 뇌리를 지배했다.
"우으으으. 으으아아. 으아으으으."
괴랄한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안 된다.'
그 와중에 실낱같은 정신으로 겨우겨우 머릿속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을 수 있었던 것.
광회천은 황급히 혈공을 운용했다.
이론만 알고 익힌 적은 없는 혈공.
당연했다. 불과 오늘 이른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내공을 금제한 상태 아니었던가.
그러니 혈공을 익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도 사실 혈공을 익힐 생각은 없었다.
그저 연구를 위해 그 구결과 이론, 진기의 경로만 해박하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에 따라 내공을 움직이는 실전은 처음이었고.
잠혼독 때문에 그 내공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아니 반드시 해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식강시가 된다. 그럴 수는 없다.'
광회천은 필사적으로 혈공을 운용했다.
잠혼독의 해독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잠혼독은 혈독공과 독이 만나서 비로소 그 효과가 발현된다.
금령탐식혈독공.
지금은 혈교에서 사라진 독혈공.
대신 남아 있는 독혈공들을 이용하여 최대한 비슷하게 복원은 했다.
탐식혈독공이라 이름 붙인.
그것과 독의 연결을 끊으면 자연스레 독의 작용이 정지한다.
정말 간단한 원리.
다만 그것을 끊는 것이 어려웠다.
아니, 혈독공과 독의 연결도 찾지 못할 터.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광회천은 가능했다.
자신이 만든 독이니.
그러나 그 연결을 끊으려면 혈공을 사용해야 했다.
일반적인 내공으로는 혈독공과 독의 연결부에도 접근하지 못한다.
혈공이라 해도 아무것이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탐식독혈공의 작용을 차단할 수 있는 혈공.
금령혈공을 운용해야 한다.
그러니 광회천은 지금 익힌 적도 없는 혈공을 운용하려 하는 것이다.
그저 머릿속에 있는 이론만으로.
하무백은 그런 광회천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극명륜안은 광회천 내부의 내공의 움직임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독기의 움직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하무백도 한번 겪었기에.
'저건 혈공의 움직임인데······.'
단전에서 막 꿈틀거리려는 내공의 움직임. 그것을 본 하무백은 대번에 혈공임을 알아보았다.
'혈공이 필요한 것인가.'
과연 저 혈공으로 무엇을 어찌하려는 것일까.
하무백은 광회천의 단전의 변화에 더욱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제발. 제발.'
광회천은 간절했다.
하무백이 자신의 입에 처박은 독 주머니.
그곳에서 흘러나와 자신이 흡입한 독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꿀꺽 삼켜 뱃속으로 들어간 것과 들이마셔 폐로 들어간 것.
그 두 곳에서 곧장 독기가 발현하려 하고 있으니.
아무리 내공을 익힌 이에게는 잠복기가 있다 하나, 그 양은 그따위 것은 단번에 무시할 정도였다.
길어야 일 다경(약 15분).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딱 그만큼의 시간만 있을 뿐이다.
아니, 지금 자신의 뇌리에 강렬하게 치솟는 욕구를 생각하면 그 반도 안 걸릴지 몰랐다.
일 다경의 절반.
그게 지금 광회천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그 안에 금령혈공의 운용에 성공해야 한다.
금령혈공은 교의 고위급 인사들에게만 허락된, 나름 상승의 경지에 이른 혈공이었다.
광회천도 혈독공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일로(一老)에게서 금령혈공의 비급을 받았었다.
사실 내공을 금제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익힐 생각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광회천이 노리는 무공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단목세가의 비고 안에 잠들어 있는 절대무공.
허무호연심결.
가히 천하제일을 다툴 수 있는 내공심법이다.
혈공을 익히면 익힐 수 없는 정파의 내공심법.
그것을 얻기 위해 단목세가도 멸문을 시켰는데, 고작 금령혈공 따위를 익힐 리가.
그럼에도 금령혈공을 자세히 살피기는 했었다.
금령탐식혈독공의 복원에 참고하기 위해서.
금령혈공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혈공과 혈독공을 연구하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금령혈공이 탐식혈독공의 독과의 결합을 방해한다는 것을.
그랬기에 지금 광회천은 필사적으로 금령혈공을 운용하려 하고 있었다.
허무호연심결은?
'일단살고 봐야 한다.'
광회천은 필생의 목표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소중한 목숨을 위해서.
그러나.
잠혼독에서 벗어나더라도 눈앞에 있는 하무백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터지만.
지금 광회천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는 데 급급할 뿐.
광회천의 무공에 대한 재능은 벽력개의 평대로 천재적이었다.
벌써 단전이 꿈틀거리며 금령혈공의 경로대로 내공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하무백은 그 경로를 모두 확인했다.
'금령혈공.'
지난 전쟁에서 혈교의 고위직 인사와도 수없이 싸웠다.
그랬기에 금령혈공의 운용 경로 역시 알고 있었고.
대번에 알아보았다.
내공의 움직임과 광회천의 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내공이 혈맥을 타고 휘돌수록 광회천의 표정이 변했다.
줄줄 흘러내리던 침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식욕을 이기지 못해 일그러진 얼굴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독 기운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잠혼독의 작용이 멈췄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광회천이 두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금빛과 핏빛이 뒤섞인 묘한 빛이 감돌았다.
"개새끼. 네놈 때문에 내 필생의 목표가 실패했다."
몸을 일으키면서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광회천.
"필생의 목표가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은 지금 그것보다는 목숨을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하무백은 일단 목적을 이루었다.
금령혈공.
그 내공의 특성을 알고 있고, 방금 직접 보기도 했다.
그것을 응용해서 시험해보면 될 일이다.
직접 혈공을 익힐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 특성을 흉내 내면 될 일이니.
이제 저 새끼의 이용 가치는 없었다.
남은 것은 죽음뿐.
"조금 전의 나와는 다를 거다. 네놈 때문에 결국 혈공을 익혔으니··· 반쪽짜리였던 대법이 혼전하게 되었으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광회천의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기운이었다.
만약 월룡장에서 이런 상태였다면, 벽력개의 필패였을 터.
'이백 초 정도 버틸 수 있었겠군.'
하무백은 냉정히 상대의 실력을 평가했다.
벽력개 정도의 초절정 고수를 이백 초 만에 이길 수 있는 기세와 기운.
그것이 지금 광회천에게 있었다.
혈령봉원쇄혈대 법(血靈封元鎖穴大法).
하단전과 내공을 금제하는 혈교의 대법이다.
금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쌓일 내공을 차곡차곡 전신 혈맥에 쌓아둔 후.
금제를 푼 순간 일시에 단전에 그 내공이 몰려들어 단번에 내공이 폭증한다.
잠력을 격발시키는 것과 비슷한 일회용 내공이지만.
거기에 더해.
금령혈공 이상의 상승의 혈공을 익힌 이가 혈령봉원쇄혈대법으로 하단전과 내공을 금제한 후 다시 풀면.
엄청한 상승효과가 일어나면서 단숨에 경지가 치솟는다.
거기에 필요한 시간은 최소 오 년.
무려 오 년 이상의 기간을 내공 없이 지내야 하기에 혈교에서도 그 방법을 시도한 이는 없었다.
혈교와 같은 약육강식의 험악한 집단에서 스스로의 내공을 봉하고 오 년을 지낸다는 것은 죽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그래서 혈령봉원쇄혈대법과 금령혈공의 조합을 사용한 이는 혈교 역사상 전무했다.
지금 광회천이 그것을 최초로 성공한 것이다.
뚜둑. 뚜둑.
목을 이리저리 꺾어보는 광회천.
어깨도 돌려보고 손가락도 움직여 본다.
하무백이 부숴놓은 오른손은 어느새 회복되었다.
"조금 남았던 대법의 내공만으로 이 정도라······."
광회천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혈령봉원쇄혈대법은 말 그대로 대법이다. 혈공을 익히는 것이 아닌.
그래서 그 대법을 사용해 하단전과 내공을 금제했었다.
중단전을 열면 사용할 수 있고, 일회성이지만 금제를 풀었을 때 엄청난 내공도 얻을 수 있으니.
또한 허무호연심결을 익히는 데 방해도 되지 않고.
헌데 지금 어쩔 수 없이 금령혈공을 익히고, 혈령봉원쇄혈대법으로 얻었던 일부 내공과의 상승작용을 경험하니.
굳이 허무호연심결에 목을 맬 필요가 있었나 하는 그런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고양감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눈앞의 하무백 따위는 단번에 박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애초에 금령혈공을 익힌 후 대법을 실행했다면 어땠을까.
허무호연심결을 얻어 익힌다고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 얻는다 해도 또다시 그걸 수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정파의 무공이란 그렇지 않던가.
최소 십 년 이상은 수련을 해야 비로소 그 강함의 끝자락이나마 볼 수 있으니.
단순히 수년간 내공을 금제한 것만으로 이런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는데?
물론 광회천은 무척 특수한 경우였다.
혈교는 하무백과 정천맹의 손에 멸망했고, 부활을 위한 와신상담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수년간 내공을 금제하고도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권력을 다투는 이도 없었으며, 잠혼독의 복원에 그는 필수적인 인재였기에.
"아쉽군. 괜한 고집이었는지도 모르겠어. 뭐, 허무호연심결이 어떤지는 차차 확인하면 될 일이지."
빙긋 웃으며 하무백을 바라보는 광회천.
"어떻게 죽고 싶으냐?"
웃음은 이윽고 이빨을 드러낼 정도였고, 광회천이 하무백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얻은 힘에 취해 똥오줌도 못 가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으니까.
광회천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계속해서 주먹만 휘둘렀기에 지금까지는 그 존재감이 무에 가까웠던 검.
허나 전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가지고 나온 그의 애검이자.
천금을 들여 만든 명검 중의 명검이었다.
스르릉.
검이 검집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리도록 새하얀 검신은 주변의 모든 것을 단번에 베어낼 듯한 모습이었다.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너 이 새끼, 감히 나에게 독 주머니를 던져? 그렇다면 다른 것도 갖고 있을 거고. 이번엔 내가 몽땅 네놈 입에 처박아 주마."
그 말과 함께 기수식을 취하는 광회천.
북두환상검법 (北斗幻像劍法).
단목세가의 절기 중 하나였다.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감히 단목세가의 검법을 사용하겠다는 거냐?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짐승이로군."
하무백 역시 검을 뽑았다.
곱게 죽지는 못한다.
하무백이 광회천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광회천의 검에 붉은 강기가 치솟았다.
조금 전의 붉은 권강과는 달랐다.
저건 붉은빛이 아니라, 핏빛이었다.
혈강(血罡).
혈교의 초절정고수들의 증명과도 같은 강기.
그것이 광회천의 검에 어려있었다.
하무백의 검에도 강기가 어렸다.
어둠보다 짙은 듯한 묵빛의 묵강.
처참하게 박살을 내버리겠다는 하무백의 의지가 담긴 강기였다.
타핫.
광회천이 땅을 박찼다.
혈강을 머금은 검이 그대로 하무백을 향해 날아왔다.
하무백의 검이 움직였다.
핏빛 혈강을 모두 덮어버릴 듯 짙은 어둠이 내린 묵강.
쾅!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광회천의 검.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히는 북두칠성마냥 점점이 빛나는 검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