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96화 (196/312)

196화. 내가 그리 귀찮게 했던가?

"일로. 무슨 일인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

개세악이 자신을 찾은 일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거처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개세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모습을 보니, 이곳보다 더 깊은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 같았으니.

지금도 답답하기 그지없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곳이 이곳이다.

헌데 여기서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왜?

"광회천 놈이 타초경사의 우를 범했습니다. 저희가 잠혼독을 연구하고 실험했다는 것을 그 괴물 새끼가 알게 되었으니······."

일로는 말끝을 흐렸다.

무창에서 동 총관이라는 자가 도착했다고 어제 보고가 들어왔었다.

전서는 그보다 먼저 도착을 했었고.

오백 명을 중독시킬 수 있는 잠혼독 역시.

"틀림없이 이곳을 치러 달려올 겁니다. 하무백. 그놈은 이곳 산월마림을 알고 있습니다."

일로의 말에 개세악은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그러면서 혈교 부활을 부르짖었다고?

미친 거 아냐?

그런 생각이 개세악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놈은, 이곳은 모릅니다."

대체 무슨 말인가.

조금 전에 분명 이곳을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상의 성채는 그놈이 이미 한 번 뒤집어 놓았었습니다만··· 지하는 모릅니다. 기실 저희도 아직 모두 파악을 하지 못한 미궁인지라."

이어진 설명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개세악.

"그러면······."

"눈이 돌아간 그놈이 언제 이곳을 찾을지 모릅니다. 허니, 그간 파악한 가장 깊은 곳으로 잠시 몸을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개세악의 얼굴이 짜증으로 가득 찼다.

"귀신 같은 그놈도. 이곳에서만큼은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일로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경험이었다.

그때, 지상을 뒤집어 놓을 때.

하무백은 지하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어디에 숨든 귀신같이 찾아내던 그놈이.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그러했기에, 이곳은 혈교의 본산이 되었다.

"후우. 알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한 개세악.

괴물을 피해 더 깊은 곳으로 숨을 준비를 했다.

***

무창에서 일어난 엄청난 혼란.

그것은 정천맹 무창지부의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본맹으로 보고가 올라갔고, 정천맹은 발칵 뒤집혔다.

혈교의 잔당이 사람을 강시로 만드는 독을 무창에 뿌린 사건 아니던가.

장로원이 시끄러웠다.

산월마림 이야기까지 나왔다.

결국 혈교의 잔당이 숨어 있을 곳이라고는 그곳뿐이었으니까.

그 깊숙한 중심.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가본 이가 정천맹에는 없었다.

거기까지 정벌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희생을 아끼려 산월장성을 쌓았으니까.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공손단경은 저 의미 없는 갑론을박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에게 바랄 걸 바라야지.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저 이익을 좇아 모인 이들이었다.

'결국 내가 가봐야겠군.'

잠혼독이라는 물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조법이 혈교에 남아 있고, 상당량의 잠혼독도 혈교의 본단으로 넘어갔다 하니.

'오랜만에 만나겠구만.'

지난 종남의 일이 벌어질 때 움직여볼까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정천맹의 종남에 대한 내정 간섭으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무창의 일이었고, 교룡관과 정천맹 무창지부의 일이었으니.

공손단경은 즉시 준비를 마치고 무창으로 출발했다.

여정은 빨랐다.

단출한 일행으로 최대한 서두른 덕이다.

그렇게 공손단경은 무창의 혼란이 막 잦아들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룡관 대연무장을 정리하던 와중에 하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러세요?"

한설빙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기다리고 있던 노인네가 왔어. 참 귀찮은 노인네인데 이번에는 반갑군."

하무백의 대답에 한설빙은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항상 귀찮은 노인네라 칭하는 이가 있었으니.

"총군사님이 무창에 오신 모양이네요. 하긴··· 이런 난리가 났는데."

고개를 끄덕이던 한설빙의 두 눈이 빛났다.

갑작스러운 변화.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하무백이 몸을 빼려 했지만.

한설빙이 빨랐다.

어느새 그 주변으로 새하얀 서리 안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빙혼환상미로진.

대상을 미로 속에 가두는 진법이었다.

어디까지나 가둬두는 목적이었기에 살상력은 없는 진법이었다.

"이건 무슨 짓이지?"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서리 안개 속에는 하무백과 한설빙 두 사람만이 있었다.

"그 귀찮은 노인네랑 거래한 게 있어서요."

한설빙이 시선을 피하면서 은근슬쩍 말했다.

"거래?"

"교룡관으로 발령내주는 대신··· 언젠가 노인네가 단주님이 있는 곳에 오면, 한 번은 단주님 발을 좀 잡아 달라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하는 한설빙.

"청탁이네. 청탁이야. 쯧쯧."

한설빙의 말에 하무백이 혀를 찼다.

"이거 집법원에 이야기한다? 청탁을 빌미로 발령을 내줬다고."

하무백의 작은 협박에 한설빙이 입술을 삐죽였다.

"좌천이나 다름없는 발령인데 이게 청탁이 될까요? 이득을 얻는 게 없는데."

"네가 청탁을 한 게 아니라, 노인네가 청탁한 거지. 그 대가로 너를 힘든 호천단에서 빼내서, 날로 먹는 교룡관으로 발령을 내준 거고."

되지도 않는 억지다.

한설빙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이지만, 그는 저것을 사실로 만들 힘을 가진 이였다.

"그나저나 그 귀찮은 노인네는 또 무슨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너를 이용해서 내 발목을 잡았을까······. 이번에는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그리 귀찮게 했던가?"

그때 서리 안개를 뚫고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한설빙은 깜짝 놀랐다.

미로진이 밖에서부터 뚫려 버리다니.

하지만 하무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다.

공손단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불통지.

만박.

이명답게 너무도 손쉽게 한설빙의 진법을 파훼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보낸 것부터가 날 귀찮게 한 거라오."

"그거야 자네가 상관을 팼으니 어쩔 수 없었던 거고."

공손단경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이가 이렇게 능청을 떨고 있었다.

"그 상관 폭행 한 번 더 하면, 이제 이 지긋지긋한 정천맹에서 쫓겨날 수 있는 거요?"

"거, 사람. 농 한 번에 그리 진지해지는 겐가?"

"나도 농이었소만?"

돌아온 하무백의 대답에 공손단경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당할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무백은.

"그래서 정확히 어찌 된 건가?"

하무백이라면 정천맹에 보고로 올라온 내용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직접 온 것이다.

마침 한설빙이 진법까지 펼쳐놓았기에 조용히 대화하기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들어온 것이고.

하무백은 그간의 일을 찬찬히 설명했다.

그 덕에 한설빙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허어······."

광회천에게 마지막에 일어났던 기이한 현상을 듣고는 낮은 한숨을 흘리는 공손단경.

"혹시 그 기이한 술법에 대해 아는 것이 있소이까?"

하무백의 표정은 더 없이 진지했다. 그 모습을 본 공손단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때문에 한 부단주에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한 거였구만. 자네가 나에게 아쉬운 것이 있었어. 허허."

평소라면 대거리를 하며 쏘아붙였을 하무백이었으나 조용했다.

공손단경의 말대로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광회천이었으나 석무원이었던 그 순간.

분명 마교의 술법이었으나, 하무백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만박. 무불통지인 공손단경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은 것이다.

"만마식혼화신대법."

단번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정말 이 노인네가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마교의 최상위 술법 중 하나일세. 이름 그대로의 술법이지. 시전자보다 약한 자의 혼을 집어삼켜 숙주로 삼는 걸세. 상대의 혼을 먹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대법이라······. 한 사람이 세 번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한계지."

팔짱을 낀 하무백이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혼을 먹으면서 그 혼의 기억을 모두 흡수하지. 그리고 시전자의 화신으로 삼아 꼭두각시로 조종도 할 수 있고. 여러모로 골치 아픈 술법이야."

"숙주를 강하게도 할 수 있는 거요?"

"숙주의 몸에 심어놓은 마기를 일시에 폭주시키면 가능하지. 거기에 숙주의 생명력까지 연료로 삼는다면. 일 각 정도는 몇 배나 강하게 만들 수도 있지."

"그 뒤에는 죽겠지만 말이오."

하무백의 말에 공손단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에 마교까지 묻었다라······."

"나는 그보다 왜 하필 석원초의 손자 놈이 광회천, 그 배신자의 혼을 먹었는지가 궁금하구만."

하무백과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공손단경의 말이었다.

"잠혼독은 무서운 독이긴 하네만. 마교에 필요한 물건은 아니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몰락한 마교 놈들은 지난 전쟁과 달랐으니까.

자신에게 그 무지막지한 병기를 사용한 것만 보더라도.

그놈들은 지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훨씬 더 했으니.

"뭐, 나는 해줄 말 다해줬으니 여기 뒷정리나 잘하고 가시오."

손을 흔들고 걸음을 옮기는 하무백.

서리 안개가 그의 몸을 감쌌지만, 하무백은 그저 강렬한 기운을 일으켜 진을 뚫고 나갔다.

"아우. 저 무식한 인간."

***

단목운뢰는 지난 십수 일 동안의 힘든 나날을 뒤로 하고 모처럼 집에 와서 휴식을 취했다.

깊은 밤.

여화가 그런 단목운뢰를 찾았다.

"어머니."

갑작스런 어머니의 방문.

다탁에 모자가 마주 보고 앉았다.

"···단목세가를 기억하고 있니?"

여화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단목운뢰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다고는 하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대단했던 세가였다.

그때는 오대세가 못지않은 성세를 누렸으니.

혹자는 단목세가까지 포함하여 육대세가라 칭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혈교에 의해 하루아침에 몰락했지만.

"하면 세가에 남은 것이 정녕 아무것도 없었을까?"

"······."

단목운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수히 생각했던 것이니까.

'가문의 무공이 하나라도 남아 있었더라면.'이라는 간절한 바람.

여화가 낡은 팔찌를 빼서 단목운뢰에게 내밀었다.

"이건?"

"열쇠야. 단목세가비고의 열쇠."

단목운뢰가 두 눈을 부릅떴다.

혹시나 있지 않을까 상상했던 것.

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어머니가 말하고 있었으니.

"무창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방 어르신이 알고 계실 거야."

방 할아버지.

이제는 알고 있다. 그분이 개방의 고수라는 것을.

심지어 가문과도 인연이 있었던 분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창에 살았던 것도······."

단목운뢰의 말에 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그곳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광회천. 그자도 이제 죽고 없으니 비고를 열어도 될 거다."

광회천.

얼핏 들었던 이름이다.

가문을 멸문에 이르게 한 배신자라고.

그런데 그자가 죽었다니.

아니, 어머니가 그걸 어찌 알고 있는 것인지.

"날이 밝는 대로 비고로 찾아가거라. 방 어르신께는 이미 말을 해두었으니. 그곳에서 그토록 바라는 무공을 찾아보거라."

"어머니······."

단목운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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