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빨리 말해라
"여, 여긴?"
이른 새벽.
조용히 찾아온 벽력개와 함께 집을 나선 단목운뢰는 눈앞의 허름한 관제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창 외곽에 있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관제묘다.
이런 곳이 단목세가의 비고라고?
무수히 많은 거지들이 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
"클클. 놀랐느냐?"
광회천과의 전투에서 입었던 부상 대부분을 회복한 벽력개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네, 네."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는 단목운뢰.
그럴 수밖에.
이곳은 그도 몇 번 지나친 적이 있던 곳이긴 했으니.
이런 곳이 가문의 비고라니.
"본래 관제묘가 아니었다."
"네?"
"주인 모를 사당이었지. 그곳을 내가 관제묘로 만든 게야. 그전에도 거지들이나 부랑자들이 임시 거처로 쓰긴 했다만."
관제묘로 만든 이후로는 개방 거지들의 거점이 되었을 터.
무창은 벽력개 때문에라도 유독 개방 거지들이 많았으니.
단목운뢰는 그 사실도 오늘 새벽에야 벽력개에게 듣고서 알았다.
그저 집 근처에 머무르는 거지 어르신으로만 알았건만.
"네 할아버지에게 이곳의 위치를 듣고는 관제묘로 만들었다. 뭐, 관우 신상을 가져다 놓은 게 전부이긴 하다만."
본디 사당이었던 지라 제단은 있었다고 했다.
"다만 나도 어찌 비고로 들어가는지는 모른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어서 들어가 보거라."
벽력개의 재촉에 단목운뢰는 조용히 관제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력개의 명에 거지들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물론 주변 곳곳에 흩어져 누가 오고 있지는 않은지 지키고 있었다.
단목운뢰는 주변을 살폈다.
부서지고, 깨지고.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 다니고.
심지어 음식 찌꺼기도 여기저기 있었다.
덕분에 이곳에 들어오고 벌써 몇 마리째 쥐를 보고 있는 것인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대로 찬찬히 살폈다.
제단.
본디 있었던 제단이라 했다.
누군지 이름 모를 대상을 위한 제단.
그 아래를 보았다.
온갖 원들의 홈이 파여 있었다.
어떤 것은 다 닳아 흔적만 겨우겨우 남은 것도 있었다.
단목운뢰는 팔목에서 팔찌를 뺐다.
그리고 그 많은 원에 일일이 팔찌를 맞춰보았다.
하나 같이 미묘하게 맞지 않았다.
그렇게 제단 아래에 수많은 원들에 하나하나 맞춰본 끝에.
딸칵.
소리와 함께 팔찌가 꼭 맞아 들어갔다.
드르르륵.
바닥 아래에서 무언가가 한쪽으로 천천히 밀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털컹.
팔찌가 끼워진 바닥이 아래로 푹 꺾였다.
드러난 좁은 계단으로 한 발 내디뎠다.
딸칵.
계단에 무슨 장치가 되었는지 단목운뢰가 발을 딛자 살짝 아래로 눌리는가 싶더니.
툭.
팔찌가 빠져서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팔찌를 받아 들고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니.
바닥이 다시 위로 올라가고 좁은 계단이 움직이면서 위의 빈 공간을 막았다.
"이, 이게······."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완벽한 암흑.
그리고 돌아갈 길도 막혔다.
이 이후의 일은 어머니도 몰랐다.
그저 길을 따라 앞으로 갈 뿐.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조금씩 빛이 보였다.
드문드문 박혀 있는 낡은 야명주 덕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나타난 지하공동.
지하수가 흐르는 곳에 생긴 공동인지 물이 흐르고 있었고, 옆에 석실이 있었다.
석실의 문에도 동그란 홈이 파여 있었다.
이제는 안다.
저 문의 의미를.
단목운뢰는 다시 팔찌를 끼웠고, 문이 열렸다.
비고 안에는 스무 권의 비급, 그리고 금괴와 은괴 약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보주 몇 개가 있었다.
천장에는 밝은 야명주 다섯 개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보주 세 개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세 개 있었다.
그 안은 벽곡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이게······."
작지 않은 석실 내부를 모두 살핀 단목운뢰는 비급을 향해 다가갔다.
단목세가의 무공.
그것이 눈앞에 있었다.
낡은 비급일 터인데 신기하게도 보존 상태가 좋았다.
천장에 박힌 용도를 알 수 없는 보주 덕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했다.
과연 어떤 무공들일까?
그저 서책이 놓여있기만 한데도 가슴이 뛰었다.
단목운뢰의 두 눈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그에게도 독문 무공이 생기는 것이다.
천천히 비급을 살피는 단목운뢰.
그의 손길은 빨랐다.
한 시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스무 권의 비급을 모두 읽었다.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비급을 바라보았다.
"모, 모르겠어······."
그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단목운뢰가 익힌 무공이라고는 삼재공이 전부다.
그것도 전부 하무백의 가르침 아래에 배운 것.
비급이라는 것을 처음 본다.
그나마 여화의 가르침 덕에 글은 알았으나, 그뿐.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용만 비급에 가득했다.
순식간에 단목운뢰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그럴 수밖에.
눈앞에 가문의 절기가 있는데.
무공 비급이 있는데.
익히지를 못하니······.
"무, 무공이 있는데··· 난 왜 익히지를 못할까······."
여화가 비고가 있음에도 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호시탐탐 어디선가 비고를 노리고 있을 광회천의 존재.
그리고 비고를 열어 비급을 본다 한들, 일초반식의 무공도 모르는 자신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
단목운뢰가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 보았다.
희망을 발견한 직후 연이어 깨달아 버린 절망.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멍하게 있었을까.
단목운뢰는 결연한 얼굴로 다시 비급을 살폈다.
"허무호연심결. 팔십일식은하환상검법."
다른 비급들과 다르게 유독 더 중히 놓여있었던 두 권의 비급.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것이 가문의 무공들 중 최강의 무공이겠지.
이름부터 멋이 다르지 않은가.
백리평이. 주우명이 무공을 펼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자신도 그런 무공을 펼칠 수 있으리라.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짜릿했건만.
그럴 수가 없었다.
비급을 봐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다시 보자."
단목운뢰는 다시 비급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무호연심결.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시 읽었다.
"다시."
또 한 번 더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단목운뢰는 또 한 번 더 읽었다.
그렇게 얼마나 읽었을까.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었지만, 읽고 또 읽었다.
어떻게든 익히겠다는 의지.
단목운뢰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단목운뢰는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벽력개를 떠올린 것이다.
"너무 오래 있었어."
단목운뢰는 비고를 정리하고 나섰다.
천천히 왔던 길을 돌아나갔다.
암흑을 걸어 계단을 올라가 막다른 곳을 손으로 만지니 역시나 동그란 홈이 있었다.
그곳에 팔찌를 끼우고 밖으로 나왔다.
단목운뢰가 다시 나올 때까지 벽력개가 관제묘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늦은 오후다.
벽력개는 이 긴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그래. 어땠느냐?"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단목운뢰를 보고 묻던 벽력개가 이내 입을 닫았다.
단목운뢰의 어두운 표정을 본 것이다.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없던 게야?"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늦게 나왔을 리가 없었다.
역시나 힘없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단목운뢰.
축 처져 있는 모습이 흡사 비에 젖은 강아지 꼴이었다.
절로 측은지심이 드는 모습.
열아홉의 청년이 저런 모습이라니.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벽력개를 만난 탓에 억지로 참았던 감정이 복받쳐 오름인가.
단목운뢰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벽력개는 그 모습에 멈칫했다가 금세 상황을 이해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겠구나. 비급이라는 게 얻는다고 끝이 아니지. 시작은 그때부터지······.'
하지만 이것은 벽력개가 해결해줄 일이 아니었다.
가문의 절기를 외부인인 자신이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단목운뢰는 터덜터덜 교룡관으로 향했다.
이미 수련이 끝날 시간이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맹룡대 연무장으로 향했다.
무창의 혼란이 대강이나마 수습된 것이 어제이건만.
맹룡대 칠조 연무장에 모인 생도들은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하무백 역시 지정 좌석이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 늘어지게 하품하고 있었다.
공손단경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그 노인네가 바쁜 건 하무백이 알 바가 아니었고.
그렇게 슬슬 오늘 수련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그때 단목운뢰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어두운 기운을 잔뜩 짊어지고서는.
새빨갛게 변한 눈이 눈물을 흘렸던 모양이다.
그런 모습이니 생도들은 차마 누구도 나서서 어인 일인지 묻지를 못했다.
'저건 또 왜 저래? 외곽 관제묘 근처에 가는 것 같더니.'
무창 전체를 덮을 수 있는 기감이었기에, 아침 수련에 늦는 단목운뢰의 소재는 금세 파악했다.
일전에 벽력개를 만났던 관제묘.
그곳 근처에 있었으니.
습관적으로 검을 들고 수련을 시작하는 단목운뢰.
허나 그 움직임에는 힘도 절도도 아무것도 없었다.
수련하고 있으되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
마음은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생도들은 그럼에도 단목운뢰가 뿜어내는 어두운 기운이 워낙 강해 감히 곁에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답답하고 짜증나는 모습.
"야!"
결국 하무백의 짜증이 터졌고.
단목운뢰의 시선이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까닥까닥.
손가락을 움직이는 하무백.
"일루와."
검을 축 늘어트린 단목운뢰가 터덜터덜 걸어 하무백의 앞으로 왔다.
생도들은 수련을 멈추고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냐? 뭐가 문제야?"
"······."
그러나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단목운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해. 사람 속 터지게 하지 말고."
하무백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미 기막을 둘러친 상태.
그것도 이중으로 둘러쳤다.
이 대화가 다른 이들에게 들릴 일은 없었다.
그래도 우물쭈물거리는 단목운뢰.
"우리 둘만 이야기하는 거야. 아무도 못 들어."
그럼에도 단목운뢰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뭐냐? 빨리 말해라. 벌써 세 번째 물었다."
세 번.
하무백이 줄 수 있는 기회의 마지막.
그것은 생도들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결국 단목운뢰의 입이 열렸다.
더듬더듬.
우물쭈물.
천천히.
"아무리 읽어도 비급의 내용을 알 수가 없었어요······. 제 가문의 무공인데, 익힐 수가 없어요."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하무백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단목운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참. 별것도 아닌 걸로. 가지고 와. 가르쳐줄 테니까."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하는 하무백.
단목운뢰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그런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전혀 다른 문파의 비급을 보고 가르쳐 주겠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무공에 대한 지식이 짧은 단목운뢰이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뭐냐? 그 눈은? 왜? 내가 못 가르쳐줄 것 같아?"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단목운뢰가 움찔했다.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가문의 가전 무공을 외인에게 보여주어도 되는가란 고민도 생겼다.
지금은 멸문된 곳이지만, 그래도 세가였던 곳 아닌가.
"뭐, 싫으면 말고. 나도 강요할 생각 없다. 어차피 공짜도 아니니까."
그렇게 잠시 후 수련 시간은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단목운뢰.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담담히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점차 두 눈이 붉어지며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여화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비고에 단목운뢰를 보낸 것은 혹시나 하고 기대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대한 바가 이루어질 듯했다.
하 교관님이 도움을 주겠다 하였다니.
여화는 광회천의 목덜미를 쥐고는 이곳을 떠나던 하무백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혜아를 아무 대가 없이 치료해주신 분이야."
여화의 말에 단목운뢰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교관님이 비고의 모든 것을 달라고 하셔도 응당 드려야 할 게야."
단목운뢰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처박혔다.
맞는 말이다.
세상 가장 소중한 동생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 아닌가.
그런 분이 도움을 주겠다 하셨는데 믿지를 못하여 망설였다니.
그간 교관님에게 받은 도움이 얼마이던가.
지금 자신의 경지 또한 교관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다.
짙은 자기혐오가 몰려왔다.
'내가 미쳤었구나. 무공에 눈이 멀어 미쳤었어······.'
어쩌다가 자신이 이리 찌질해졌을까.
아마도 무공 비급이 있음에도 익힐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을 잃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네게 비급의 무공을 가르쳐 주신다니. 그렇게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니. 당장 교관님께 가서 무례를 사죄드리고 가르침을 청하거라."
"네······."
단목운뢰는 그 길로 다시 교룡관으로 향했다.
향한 곳은 교관들의 숙소.
그 앞에서 서성였다.
이미 어둠이 내린 터.
아직 추웠다.
입김이 절로 나오는 밤이다.
"뭐냐?"
하무백의 모습이 나타났다.
"교관님.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미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단목운뢰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무백이 물끄러미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목운뢰의 눈이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뭔 소리야? 뭐가 죄송하다는 거냐?"
하무백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본 모습을 되찾았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도, 도와주십시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단목운뢰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