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집중해
이른 새벽.
단목운뢰는 이미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그 누구도 나오지 않은 시각이다.
이제야 먼동이 터올라 어둠이 조금씩 물러가고 있는 때였으니.
그럼에도 단목운뢰는 묵묵히 몸을 풀었다.
천천히.
꼼꼼히.
빠진 곳 하나 없이 몸을 풀며 수련을 준비했다.
"아함."
그때 하품을 크게 하면서 하무백이 나타났다.
"잠도 없냐? 너는."
하무백의 핀잔에도 단목운뢰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다.
두 눈이 새빨갰다.
잠을 못 자서 빨갛게 된 것이었다.
"정말 잠을 안 잔 모양이구만."
"도무지 잠이 들지를 않아서요."
단목운뢰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럴 만했다.
드디어 자신만의 무공을 익히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사라진 줄 알았던 가문의 절기를.
"차근차근 원리부터 전부 알려줄까? 아니면 그냥 빠르게 무공을 머릿속에 박아줄까?"
"늦더라도 원리부터 차근차근 익히고 싶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목운뢰는 단번에 답했다.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심법부터 시작하자. 어제 비급을 전부 보니, 세 단계의 심법이 있었다. 입문과 상급 단계는 건너뛸 거다."
그 설명에 단목운뢰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 교관님이 말씀하시는 심법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어제.
어떻게든 익혀보겠다고 몇 번이고 읽었던 비급.
바로 그것일 터.
'역시 그게 가장 강한 무공이었구나······.'
단목운뢰는 자신의 욕심이 과했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입문공과 상급 심법이 있었는데, 자신이 고른 것은 그것을 다 건너뛴 것이었으니.
"뭐, 지금 네 수준에서는 앞의 두 개를 익히는 건 시간 낭비야."
하무백의 말에 단목운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심법이라고는 기껏해야 삼재심법이 전부인 것을.
"가진 내공의 양도 많고, 내공의 운용 능력도 상급의 심법 이상이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태극혜검이며, 천성은하검법을 상대했을까?"
거기까지 말하던 하무백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단목세가의 검법 역시 은하라는 명칭이 들어갔다.
거기에 천성과 환상.
"흐음. 비슷하네."
"네?"
하무백의 중얼거림에 단목운뢰가 물었다.
"별것 아니다."
하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깊게 파고들면 결국 전혀 다른 검법이었으니까.
약간의 유사성이 있을 뿐이었다.
단지 두 문파의 검법의 창시자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며 영감을 얻었다는 우연.
"앉아."
하무백의 지시에 단목운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심법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허무호연심결. 훌륭한 내공심법이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신진팔문의 비전 내공심법과 비교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심법이야. 그만큼 깊이도 깊지.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들어라."
주변에 기막을 둘러친 하무백이 천천히 구결을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이제 세상에 그 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하무백의 머릿속에 있을 뿐.
단목운뢰는 한 글자라도 놓칠까 싶어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생도들이 하나둘 연무장에 나타났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모습에 이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수련을 시작했다.
하무백의 입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아무런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서, 무언가의 전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거의 두 시진에 가까운 시간.
하무백은 비급의 내용 전부를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알겠냐?"
"······어렵네요."
단목운뢰가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그럴 만했다.
극상승의 심법이었으니까.
하무백이 단목운뢰의 등에 장심을 대었다.
"집중해."
하무백은 자신의 내공을 흘려 넣어 허무호연심결의 운기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잘 기억해 둬라. 이게 기본적인 운공 경로니까."
구결을 풀어서 설명해 주었기에 대강은 짐작했던 경로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몸속으로 움직여 알려주니,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구결을 들으며 긴가민가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도 자신의 내부에서 실제 운공이 이루어지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무백은 장심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단목운뢰가 어느새 두 눈을 감고 운공 삼매경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무백이 단목운뢰에게서 떨어져서 자신의 지정석인 바위로 향하자 생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뭔가요? 새로운 무공입니까?"
당진산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운뢰의 무공이다. 가전무공."
짧은 설명에 생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가전무공이라 한 까닭이다.
타 문파의 무공 연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강호의 도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교관님이 알려주시는 건가요?"
문득 든 의문에 당진산이 다시 물었다.
"사정이 있으니까. 왜 너도 당가의 무공 좀 알려주랴?"
하무백의 물음에 당진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 표정에서 왠지 불길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교관님께 신세 질 것도 없이 내가 알려줄게."
언제 온 것일까?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누이의 말소리에 당진산은 대경했다.
허리에 편을 감고 나타난 당지연의 모습이 당진산에게는 사신과도 같았으니까.
"누, 누나가 여긴 무슨일이야?"
"몸 좀 풀러. 독만 붙잡고 있으려니 몸이 너무 굳었어."
그녀는 당자청을 돕고 있었다.
"잘 안 풀리나 보네."
당지연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당진산이 중얼거리자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상대해줄게."
당진산이 얼떨떨한 얼굴로 당지연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당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늘었다고 하니까. 확인을 좀 해 봐야지."
뜬금없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극렬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생도들이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단목운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라락.
허리의 편이 풀려서 당지연의 손에 들렸다.
쌔액.
당진산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그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사구편.
예전에 당추가 사용했던 편법.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영사구편은 당추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독에 관해서 이름 난 당지연이었지만, 무공의 경지 또한 결코 낮지 않았다.
"무, 무슨 짓이야!"
당진산이 재빨리 발을 움직여 편법의 공격 권역에서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당지연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예전이었으면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끝이 났을 테니까.
연이어 움직이는 편.
그야말로 영활히 움직이는 뱀의 모습 같았다.
당진산도 검을 뽑아 상대해나갔다.
제법 당당히 맞섰다.
그렇게 백 초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당지연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야기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달랐다.
무창에 도착한 후, 혈교의 잠혼독 때문에 당진산의 실력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해서 겸사겸사 오늘 연무장에 들렀던 것인데, 동생은 기대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당지연이 편을 거뒀다.
개운한 얼굴이다.
"하아. 제법이네. 덕분에 몸 좀 잘 풀었어."
웃음이 맺힌 얼굴.
"헉헉헉."
당진산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영사구편의 초식을 모두 알았기에 백 초나 버틸 수 있었다.
아니, 이제는 당진산도 펼칠 수 있지 않던가.
그랬기에 삼재검법으로 당지연의 영사구편을 막아낸 것이다.
"이이, 마녀가······."
울컥한 중얼거림.
당진산의 손이 검을 놓고 허리의 편을 잡았다.
동투제가 끝나고 편법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게 됨을 깨달은 다음, 편법의 수련 역시 계속해오고 있었다.
해서 항시 허리에 편을 감고 다니고 있지 않았던가.
차라락.
당진산의 편이 풀려나왔고.
빙그레 웃고 있는 누이를 향해 영사구편이 펼쳐졌다.
일각 후.
당지연은 연무장을 떠났다.
남은 것은 온몸의 옷이 너덜너덜하게 찢긴 당진산.
그의 처참한 패배였다.
생도들은 고개를 돌리고 각자의 수련으로 돌아갔다.
"편법이 아직은 많이 어설프네."
거기에 비수처럼 박힌 하무백의 중얼거림.
"크윽."
당진산은 신음을 삼켰다.
"복수하고 싶냐?"
하무백의 물음.
당진산이 하무백을 돌아보았다.
"어때? 당가의 무공 좀 알려줘?"
당진산의 귀에는 마치 마귀의 유혹과도 같이 들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혹에 넘어갔다.
거부하기에는, 누이에게 너무 처참히 당했으니.
***
"잠혼독에 저항력을 가지게 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군."
당자청이 인상을 찡그렸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네."
위지군이 말했다.
공손단경의 조언에 잠혼독을 몇 번이고 살핀 이후에야 실마리를 찾았다.
마공.
잠혼독에서 그 흔적을 찾으니 실마리가 자연스레 나타났다.
"혈독공과 독 사이에 마공이 이물질처럼 끼어 있어. 그 마공의 기운을 공략하면 혈독공과 독의 결합을 쉬이 끊어낼 수 있네. 자네가 만든 해약보다 훨씬 더 쉽게."
위지군의 말에 당자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그 마공을 공략하는 것이 좋겠군요."
공손단경이 중얼거렸다.
하무백에게 노인네 소리를 듣는 그이지만, 이 자리에서는 연배가 가장 아래였다.
"그걸 어찌하느냐가 문제로군. 그것도 무공이 없는 일반인들이 말이야."
지금 문제는 그것이었다.
잠혼독은 내공을 가진 무림인들보다, 내공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무림인들은 잠복기가 있었기에, 해약을 지니고 있다가 잠혼독을 흡입하는 순간 즉시 복용하면 되었다.
허나 일반인들은 아니었다.
중독되는 즉시 식강시가 된다.
무창에 식강시가 된 이가 단 한 명으로 그쳤던 것은, 독기가 발현되는 치사량의 잠혼독을 섭취한 이가 그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조차 흑도의 잡배로 하찮은 내공이나마 지니고 있었기에 발현이 조금 늦은 것이었다.
"마공의 상극인 기운이 마공에 반응하게 하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공손무외가 중얼거렸다.
잠혼독에 쓰인 마공은 극히 미미했다.
그랬기에 내공이 없는 일반인도 어떤 기운의 작용만 있다면 능히 마공을 공략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세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셋 모두 알고 있는 기운이 있었다.
"······선천진기."
동시에 터져 나온 외침.
특정한 마공에 선천진기가 반응하게 만들면 될 일.
특정한 마공은 이미 위지군이 구분을 해냈다.
"마공의 기운과 유사한 성질을 뜨는 독을 조제하면 되겠군."
당자청의 말.
"거기에 선천진기를 자극하는 약재를 배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저 독일 뿐이야."
보통의 선천진기는 마공의 상극이었다.
마공은 순리를 거스르는 역천의 힘.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지니고 있는 기운인 선천진기는 그야말로 순천의 힘이다.
둘은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단서를 얻자 일의 속도가 빨라졌다.
활기가 넘쳤다.
그때 당지연이 돌아왔다.
"무, 무슨 일인가요? 할아버지."
자리를 뜨기 전의 어둡고 무거운 기운이 싹 사라지고 없었다.
활기차고 희망찬 공기가 가득했다.
"단서를 얻었다. 너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당자청의 목소리가 밝았다.
"어디 보자. 삼안천독섬, 마관혈린사, 암혈서, 부육수, 단혼마독. 이 정도면 비슷한 기운을 만들 수 있을 듯한데······."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을 듣던 당지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기와 유사한 기운을 띠는 독물과 독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구하기 힘든 것들이네요."
"본가에 전서를 보내야지."
"알겠어요."
당지연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도 본문에 전서를 보내야겠군. 여기서 구할 수 없는 약재들이 좀 있어."
공손무외도 움직였다.
"저는 이제 조금 쉬어야겠습니다."
간밤에 고민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시뻘겋게 변한 눈.
아무리 공손단경이라도 이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게 다들 흩어지고.
위지군만 남았다.
"응?"
그의 시선이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진 탓이다.
"흐음. 신기한 기운이로군."
단목운뢰라는 아이의 기척이었는데, 아무래도 새로운 내공심법을 익히는 듯했다.
심오함이 느껴지는 기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