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산월이라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단전에서 시작된 내공이 사지백해를 휘돌았다.
얇은 세맥 하나하나까지.
'이런 느낌인 건가?'
새로운 느낌에 단목운뢰는 환희를 느꼈다.
삼재심법의 단단하고 진중한 느낌과는 다른 느낌.
허무호연심결의 내공이 지나갈 때면 혈맥도 더 단단해지는 것만 같았다.
"후아. 엄청나네. 이렇게 도도하고 장대한 흐름이라니."
단목운뢰가 가부좌를 풀고 일어서면서 중얼거렸다.
단목운뢰의 허무호연심결이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스스로 내공의 흐름을 느끼고 감탄할 정도로.
그간 삼재심법으로 다진 기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안정적인 심법.
다른 심법을 익히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도 큰 효능이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무백이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는 검법으로 가자."
그 말에 단목운뢰의 두 눈은 기대로 가득 찼다.
드디어 새로운 검법이다.
"좀 어려울 거다."
그런 기대를 읽은 하무백의 말.
그 말은 사실이었다.
검법 명칭에 드러나 있지 않은가.
팔십일식.
무려 여든한 개의 식으로 이루어진 검법이다.
고작 서너 개의 식이 전부인 삼재검법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네!"
의지가 가득한 목소리로 단목운뢰가 답했다.
"이건 사실 은하환상검법을 먼저 익히고 넘어가는 게 좋긴 한데······."
단목운뢰를 지그시 바라보는 하무백.
"뭐, 바로 넘어가도 너라면 어떻게든 해내겠지."
특출난 재능을 지닌 단목운뢰다.
초식과 초식의 연결 부분, 그 틈을 알아볼 수 있는 재능까지 지닌.
거기에 집념과 노력은 또 어떠한가.
강해지겠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이 있는 녀석이기에.
팔십일식은하환상검법으로 바로 시작해도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삼재검법으로 상승의 검법과 맞서 싸운 경험도 있었고.
"그럼 하루에 아홉 개씩. 아흐레 동안 가르쳐 주마."
살인적인 일정이다.
하루에 한 개의 식도 제대로 익힐까?
팔십일식은하환상검법과 같은 극상승의 검법은 하루에 한 개의 식만 제대로 익혀도 엄청난 재능이라는 평을 들을 터.
그런 검법을 하루에 아홉 개의 식이라니.
그럼에도 단목운뢰는 그저 두 눈을 빛낼 뿐이었다.
***
"됐다."
초췌한 모습의 세 노인이 두 눈을 빛냈다.
당지연과 공손비연 역시 잔뜩 피곤한 모습으로 두 눈을 빛냈다.
선유곡에 요청한 약재를 공손비연이 직접 가지고 달려왔다.
그리고 당가에서 독이 도착한 것이 어제다.
그 뒤로 다섯 사람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수없이 많은 배합을 실험했다.
그리고 나온 결과물.
세 개였다.
당자청과 공손무외의 시선이 위지군에게로 향했다.
당연한 일.
이 중에서 저것을 실제로 몸에 실험해보고 멀쩡할 수 있는 이는 위지군이 유일했다.
만든 독의 해약을 직접 먹어 실험한다.
단순무식한 일이다.
하지만 이게 아니면 효능을 검증할 수가 없었으니.
위지군이 첫 번째 해약을 먹었다.
가루약이었기에 금세 녹아 목을 넘어갔다.
가만히 두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하는 위지군.
당자청과 공손무외가 두 눈을 빛내며 그런 위지군을 바라보았다.
한 발 뒤.
당지연, 공손비연 역시 초췌한 모습으로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해약은 녹아서 흡수되더니, 한 기운이 나타나서는 즉시 혈맥을 타고 돌아다녔다.
마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약이 아닌 독약.
그것이 위지군의 혈맥을 타고 움직였다.
위지군은 최대한 자신의 내공을 억눌렀다.
내공이 없는 이들이 먹을 것이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어찌 반응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그렇게 일 각 후.
위지군의 몸 깊은 곳에 자리한 선천진기가 꿈틀 반응했다.
계속해서 몸속을 휘돌고 있는 미약한 마기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선천진기가 그대로 마기를 먹어 치웠다.
위지군이 두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선천진기가 반응을 했네."
그 말에 당자청, 공손무외를 비롯한 당지연, 공손비연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아직이야."
그러나 이내 침착을 되찾은 당자청이 말했다.
"그렇지. 이제 선천진기가 잠혼독에 반응을 하는지 확인해야지."
공손무외의 맞장구.
위지군은 즉시 잠혼독을 먹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반 각 정도의 시간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정도면 잠혼독에 중독된 이는 이미 식강시가 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위지군은 즉시 내공을 일으켜 잠혼독을 태웠다.
두 번째 해약을 복용했다.
결과는 마찬가지.
선천진기는 해약에 반응하였으나 잠혼독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로군."
다섯 사람이 긴장한 시선으로 마지막 남은 해약을 바라보았다.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그러면 다시 배합을 시작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쉽게 해약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헜으니.
일단 만들었기에 기대를 하고는 있으나, 얼마든지 다시 만들 각오도 되어 있는 다섯 사람이다.
위지군이 해약을 먹었다.
역시나 선천진기가 반응을 했다.
근데 반응이 조금 달랐다. 벌써 세 번째라 그런 것인지.
선천진기의 반응이 좀 예민했다.
"흐음."
위지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혼독을 먹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잠혼독이 몸에 들어온다 싶은 순간 선천진기가 나타나서는 잠혼독을 공격했다.
정확히는 잠혼독에 들어있는 마기를 공격했고, 마기가 사라지자 잠혼독 역시 혈독공과 독으로 흩어졌고, 이내 사라졌다.
"됐네."
짧은 한마디.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온갖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공이었으니.
당지연과 공손비연은 당장에라도 환호성을 지를 듯했다.
특히 당지연은 어떤가.
이들 중 잠혼독을 가장 처음부터 접한 그녀 아니던가.
"잠깐. 아직은 아니야."
공손무외가 흥분하려는 이들을 진정시켰다.
"다른 사람이 이 해약만 먹고 시험을 해봐야지."
그랬다.
위지군은 세 번의 각기 다른 해약을 연속해서 먹었다.
그 해약들 간의 간섭이 없을 수 없었다.
일단 위지군이 먼저 해약을 복용해 큰 위험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이제 효과가 있었던 해약만으로 실험할 차례.
공손무외는 망설이지 않고 그 해약을 먹었다.
그리고 내공을 억눌렀고, 선천진기가 반응을 했다.
잠혼독을 먹었을 때.
공손무외 역시 두 눈을 부릅떴다.
"성공이로군."
그의 말에 결국은 당지연과 공손비연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해냈다!!"
"우와!!"
당자청과 공손무외, 위지군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 떠올랐다.
가장 큰 산을 넘었으니.
"이제 이 해약의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 확인해 봐야 할 터. 너희도 복용토록 하거라."
당자청의 말에 당지연과 공손비연이 해약을 먹었다.
그리고 당자청 역시.
이제 매일 같이 잠혼독을 먹으며 그 반응을 검증해야 했다.
"최소 한 달. 그 정도만 가주면 좋겠군."
공손무외가 중얼거렸다.
당자청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애시당초 일반인들에게 이 해약을 먹일 명분이 없었다.
이 해약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혈교 놈들이 잠혼독을 풀어 식강시가 나타난 이후다.
최초에 희생된 이들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먼저 설명하고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해도 섣불리 나설 이들은 없을 테니.
식강시 이후에라도 해약을 먹어 한 달간만이라도 잠혼독에 저항성을 지닌다면.
잠혼독 걱정 없이 혈교를 상대할 수 있으니 크나큰 이득이었다.
***
개세악은 답답했다.
원래 있던 곳도 답답해서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왔으니.
당장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천하를 오시했다는 혈교가 이 꼴이라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리는 개세악.
그는 그 천하를 오시한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처참히 패배한 후 숨어든 이후의 기억이 선명할 뿐.
지금까지는 혈교의 부활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
헌데, 오히려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으니.
혈교의 부활에는 여전히 시큰둥했지만, 변화가 생겼다.
"힘이 없어서다."
개세악이 내린 결론.
하무백이라는 그 괴물을 압도할 힘이 없으니, 대혈교가 망하고 이렇게 숨어 지내는 것 아니던가.
"힘이 필요해."
개세악은 처음으로 스스로 혈교의 비급을 들췄다.
전 교주의 손자였기에, 남아있는 온갖 진귀한 비급은 모두 볼 수 있었다.
다만 흥미가 없어 신경도 안 썼을 뿐.
지하로 지하로 파고드는 현 상황이 그에게 힘에 대한 갈망을 일으켰다.
그렇게 가장 먼저 집어 든 비급.
역천혈류파멸혈공(逆天血流破滅血功).
혈교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혈공의 끝에 있는 무공이다.
개세악은 무심히 비급을 읽고 익혔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익히던 중.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결국은 패배자의 무공이다······."
할아버지도 이것을 익혔으나, 결국 하무백에게 당했다.
무공을 익히면 익힐수록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에 개세악은 점차 의욕을 잃어갔다.
그 자리를 다른 욕망이 차지했다.
"더 강한 무공이 필요하다."
강함을 향한 갈망은 그대로였다.
역천혈류파멸혈공이 그것을 채워주지 못할 뿐.
욕망이 온몸을 지배하는 순간.
단전의 내공이 꿈틀하며 움직였다.
역천혈류파멸혈공.
그것이 개세악의 욕망에 반응하여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세악은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욕망과 혈공의 결합.
그것이 개세악을 움직였다.
뚜벅. 뚜벅.
개세악은 자신의 방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아래로.
아래로.
그토록 싫어하는 지하에서 더 깊은 곳으로.
짙은 어둠만이 가득한 곳으로 개세악은 걸음을 옮겼다.
***
역천혈류붕세대법(逆天血流廟世大法).
혈교 교주 개홍천은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 최후의 잠력을 터뜨리는 대법을 펼쳤다.
역천혈류파멸혈공의 숨겨진 대법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힘을 회복한 그의 일검에 정천맹주 소휘웅의 도가 속절없이 날아갔다.
무방비의 상태로 개홍천의 도세 아래 그대로 놓인 소휘웅.
이번에는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다.
양손에 내공을 가득 끌어올리며 이를 악무는 소휘웅.
그때.
누군가가 소휘웅의 앞을 막아섰다.
혈교 교주를 참살하기 위해 투입된 수많은 결사대 중 소휘웅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멀쩡한 인물.
소휘웅의 수신호위대인 호천단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인물, 호천단주 하무백.
그 역시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나, 최후의 절초를 펼칠 마지막 기력은 남아 있었다.
무극여의팔절검해.
그 마지막 오의.
익혔으나 사용해본 적은 없었던 그것.
팔절을 일검에 녹여 펼쳐내는 오의를 익히고 처음으로 사용했다.
남는 기력을 모두 실어서.
하무백의 손에서 펼쳐진 그 절초는 그대로 개홍천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윽. 분하다. 혈마 천하가 눈앞이었거늘······. 큭큭. 그래도 산월 땅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 땅만은 영원히 혈마의 땅으로 남으리······."
그것이 혈교 교주 개홍천의 최후였다.
"뭐지?"
하무백은 오랜만의 꿈에 두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혈교 교주 개홍천을 참살했던 그때.
그것이 설마 꿈에 나올 줄이야.
처음 있는 일이다.
예전에 가끔 기억을 떠올린 적은 있었지만, 이토록 생생한 꿈으로 그때의 장면을 다시 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팽 관주도 살아남았었지."
결사대의 끝자락에 팽도율도 있었기에, 그도 어찌어찌 개홍천에 맞섰던 이 중 하나였다.
개홍천과 맞서 목숨을 부지한 이가 얼마 없었는데, 살아남은 이 중 하나가 팽도율이었다.
"찝찝한 꿈이야······."
혈교 교주도 그렇고, 마교 교주도 그렇고.
그냥 죽지 않았다.
저주 같은 기이한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니.
그때의 장면을 다시 보니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산월이라······."
혈교의 잔당들이 웅크리고 있는 곳이다.
영원히 혈마의 땅으로 남을 거라 그랬지만, 기실 거대세력의 욕망 때문에 아직 마림으로 남은 땅.
'그곳에서 무언가 벌어지려는 건가?'
하무백은 알 수 없는 예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지몽이라는 것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뜬금없이 그때의 일을 꿈으로 꾸다니.
"교관님!"
그때 당진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킨 수련을 끝내고 찾아온 것.
땀으로 흠뻑 젖은 그는 편을 들고 있었다.
"벌써 다 했냐?"
"네!"
열의에 불타는 두 눈이다.
이놈이 이렇게까지 열심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동기는 아마도 제 누이에 대한 복수심이겠지.
'힘들 텐데······.'
하무백은 굳이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스스로 열심히 하겠다는 녀석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