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열흘
이른 아침.
남궁지후는 이미 새벽부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안휘성 합비.
남궁세가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다.
가솔들은 교룡관에서 돌아온 남궁지후가 연무장에서 수련만 하는 모습을 며칠이고 지켜보았다.
자연스레 평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께서 저리 열심히 하시니 세가의 앞날이 밝구만."
"그러게 말이야. 이제 소가주의 자리에 오르셔도 될 것 같은데, 가주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대공자나 대공녀 같은 분들을 무엇 때문에 교룡관에 보내시는가 했더니. 그래도 가주님께서 생각이 있으셨던 모양이야. 저리 열심이시니."
여기저기서 위와 같은 대화가 오갔다.
가주전의 가주 집무실.
세가에서 가장 높은 전각의 가장 높은 곳이다.
자연히 창밖으로 연무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궁무애검의 검식을 끊임없이 수련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화현의 두 눈은 복잡한 빛으로 가득했다.
정파 제일의 후기지수 중 하나로 평해지는 장남이다.
거기에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저리 열심히 수련까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건만.
그는 그런 장남을 아직 소가주의 위에 올리지 않았다.
해서 가솔들도 남궁지후를 대공자라 칭할 뿐.
거기다 한창 세가의 비전 절기를 익히기에도 바쁠 시기에 교룡관에 보냈다.
교룡관에서 수료하게 되면 정천맹의 무사로 일정 시기를 보내야 함에도 장남을 그곳에 보낸 것이다.
다른 세가와는 분명히 다른 행보다.
'어찌 저리 뛰어날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훌쩍 뛰어넘는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궁화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단순히 창궁무애검의 초식 완성도만을 놓고 봤을 때.
저 나이에 저런 경지에 든 이를 남궁세가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음이니.
'교룡관.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하무백.
그 괴물이 교룡관 맹룡대 교관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남궁지후는 잠룡대다.
그 괴물 놈과 접점이 없을 터인데.
남궁화현은 남궁지후가 직접 하무백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가솔들이 남궁지후를 칭찬하는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남궁화현은 그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남궁지유가 연무장에 나와 수련을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공도 뛰어나고, 재지 또한 뛰어난 재녀.
누구나 부러워할 아들과 딸이건만.
그들을 바라보는 남궁화현의 눈빛은 시리도록 차갑고 스산하기까지 했다.
'소가주 자리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둘 수는 없다.'
최대한 늦추러 남궁지유과 남궁지후를 교룡관에 보낸 것이 작년.
허나 일 년 만에 가문에 돌아와 저런 모습을 보이니 또다시 소가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불과 어제에도 전대 가주였던 아버지가 찾아오지 않았던가.
'가주. 손이 귀하지 않은가. 어서 지후를 소가주의 위에 올리고 혼사를 치르게 해 후사를 두어야지.'
"후사. 후사라······."
그리 중얼거리는 남궁화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후사 때문에 자신이 어떤 짓을 했던가.
그 귀한 손을 얻지 못했으면 자신은 소가주에서 가주가 될 수 없었다.
해서 자식을 얻기 위해 인면수심의 짓을 저질렀다.
그 결과가 장녀 남궁지유와 장남 남궁지후다.
그렇게 남궁화현은 아무런 잡음 없이 가주가 될 수 있었다.
가주가 되고 십수 년.
이제 다음 대를 결정할 때가 되니.
그때의 그 일이 자신의 마음에 걸렸다.
남궁화현은 동생의 자식들을 떠올렸다.
자신은 손이 귀했지만, 남궁세가의 손이 귀한 것은 아니었다.
남궁화현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그 아이들이 각기 아들을 하나씩 두었다.
그 아이들도 뛰어난 아이들이다.
남궁지후가 특출나게 뛰어났을 뿐.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지."
남궁화현은 간밤의 고민 끝에 낸 수를 써야겠다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장남에게 소가주의 자리를 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주가 되기 위해 얻은 자식이었지만.
목적은 이미 이루었으니, 그 소용이 다한 바.
굳이 그 아이를 소가주에 올릴 이유가 없었다.
감히 그 아이가 소가주가 되어서도 안 되었고.
어차피 봄이 오면 교룡관으로 떠날 녀석.
그곳에서 해내기에는 한계가 분명할 터이니.
***
단목운뢰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움직인다.
첫 번째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차례대로.
어설픈 부분이 많았지만 올바른 길로 곧게 나아가는 검로.
단목운뢰의 땀방울이 검신에 뚝 떨어졌다.
온몸이 점점 땀에 젖어 들었다.
그럼에도 검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검은 허공을 수없이 가르고 지나갔다.
점차 단목운뢰의 팔이 떨려왔다.
그럴 수밖에.
무려 팔십일 식에 달하는 변화를 천천히 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검법을 익히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게 몇 번의 변화를 거쳤을까.
여든한 번째.
마지막 검의 변화를 마치고 천천히 두 눈을 뜨는 단목운뢰.
"후우."
심호흡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온몸이 잘게 떨렸다.
깊은 밤.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서 마침내 팔십일식은하환상검법을 모두 펼쳐낸 것이다.
"됐다."
하무백은 그런 단목운뢰를 보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독한 놈."
그럴 수밖에.
아흐레를 예상했건만.
이레만에 해내다니.
후줄근한 지금 모습이 그간 얼마나 수련에 열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겨우 한 발 들어선 거다."
하무백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단목운뢰.
설마 하무백이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교관님······."
"아직 어설퍼도 너무 어설퍼. 그래도 기본 검로는 다 익혔네."
"네!"
하무백의 인정에 단목운뢰는 밝은 얼굴로 답했다.
"우선은 그 어설픈 부분을 없애는 게 먼저다. 대련이나 비무는 그다음."
"네."
"그럼 쉬어라."
그리 말하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하무백.
저 독한 놈 때문에 최근 퇴근이 늦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멀찍이서 지켜보곤 했으니까.
"그래도 다 익히는 데 칠 일밖에 안 걸릴 줄은······."
아흐레, 그러니까 구 일도 상당히 빡빡하게 잡아놓은 일정이었건만.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금세 흘렀다.
해약은 다행히 한 달이 흘렀음에도 잠혼독을 흩어내고 있었다.
완성된 것이다.
어느덧 이월도 중순을 넘어선 시기.
곧 교룡관의 전반기가 시작된다.
생도들이 이 년 차에 접어드는 것이다.
그사이 해약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십 일 동안 해약이 약효를 지속한 것을 확인했을 때.
대량 제조를 시작했다.
이십 일만 해도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다시 해약을 만들더라도, 이십 일의 효과를 지닌 해약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렇게 만든 해약의 단약도 어느새 이천 개가 넘었다.
당지연과 공손비연의 두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하루 종일 단로를 붙잡고 연단을 한 탓이다.
교룡관 대연무장 한쪽에 놓인 단로만 하더라도 그 숫자가 어느새 오십.
당자청, 공손무외, 위지군, 당지연, 공손비연.
다섯 사람이 쉬지 않고 단로에서 연단을 했다.
가끔씩 하무백도 들러서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는 당가와 선유곡에서 계속해서 만들어 둘 것이다.
혈교 놈들이 언제 어디에 잠혼독을 뿌릴지 몰랐으니.
최대한의 양을 비축해둬야 했다.
이 해약은 미리 먹어도 효과가 있지만, 중독된 후 잠복기에 먹어도 효과가 있었으니.
"그간 수고가 많았네."
"고생했어."
"허허. 다행이야."
세 노인은 서로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다.
급한 일은 해결이 되었으니.
대연무장의 단로도 어느새 깨끗이 치운 상태.
교룡관에 천 개의 해약을 남겨두고 남은 것은 당자청과 공손무외가 오백 개씩 나눠 가졌다.
해약의 제조법 또한 교룡관에 두었다.
공손단경에게도 전해두었다.
그러면 정천맹에서도 알아서 해약을 만들 터.
이렇게 잠혼독에 대한 대비는 끝났다.
"마녀. 가기 전에 한 번?"
당진산이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당지연을 바라보며 도발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연단 후, 뒷정리까지 한 터.
뒷정리는 교룡관의 일꾼들과 맹룡대 생도들도 도왔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쉰 건 아니었다.
잔뜩 지쳐 있는 때를 노린 동생의 도발에 피식 웃으며 편을 잡았다.
"단번에 끝낼 거야."
순식간에 강기를 덮어쓴 편이 창처럼 솟구쳤다.
편에 어린 강기가 한 달 사이 진해져 있었다.
그간 몇 번의 비무가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당진산이 빙긋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아니, 아니야. 피곤할 텐데 어서 가야지."
하루 정도 쉬었다 가도 될 터이지만, 교룡관에서 보낸 날들이 많다는 이유로 당자청은 즉각 떠나겠다 했다.
그러니 자연히 당지연도 함께 움직이게 된 것.
"이제 곧 교룡관 전반기가 시작한다니 아쉽군. 언제든 시간이 되면 당가에 한번 들리게."
당자청이 하무백과 생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최고의 귀빈으로 모시겠네."
휴관기가 좀 더 길게 남았더라면 당장에라도 함께 가자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하무백이 정중히 답했다.
"그럼 이만. 그간 고생들 많았네."
"아닙니다. 그동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당자청은 나와 있던 팽도율, 연백진과도 인사를 나누고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당지연이 뒤이어 마차에 오르고.
마차는 곧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전반기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지?"
당진산이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물었다.
"열흘."
연하민이 짧게 답했다.
"휴관기였는데··· 휴관기가 아닌 것 같았어."
당진산의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에 매진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사이 있었던 일들 때문이다.
백리평의 종남행.
그리고 무창의 그 난리.
혈교라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당진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도 며칠 쉬었다가 떠나야겠군."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공손무외가 말했다.
"그 전에 술 한잔하지."
"그럼세."
위지군의 말에 공손무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한 달의 시간은 세 노인을 친구로 만들어 놓았다.
홀로 강호를 주유하다 하무백, 하설란 남매를 만난 이후로는 십수 년의 세월을 청란도에서 보낸 위지군이다.
그에게 마음 맞는 친구가 생긴 것도 오랜만의 일.
하나가 급히 떠났으니, 남은 하나와는 그래도 석별의 정을 나눌 술 한 잔 정도는 해야 할 듯했다.
공손무외와 공손비연은 미리 알아놓은 객잔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하무백과 한설빙, 맹룡대 생도들과 위지군.
팽도율과 연백진, 기유찬이었다.
"어르신. 앞으로는 어찌하실지······."
팽도율이 위지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더 이상 그 정체를 숨길 수도 없게 된 상황이다.
적어도 팽도율, 연백진, 기유찬은 그 정체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난 이대로가 좋네."
위지군의 말에 팽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바란다면 그리 조치를 취해야 했다.
무려 하무백의 사부 아니던가.
그 괴물을 길러낸 사부.
어쩌면 이 괴물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어르신이다.
이런 분이 교룡관에 계셔준다니 든든했다.
그러니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당연한 일.
기유찬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이미 어떤 조치를 취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들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이제 진짜 끝이군. 진짜 휴관기야."
하무백이 후련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열흘 남았지만요."
곁에 있던 한설빙이 말했다.
"그래. 열흘. 난 그 열흘을 충분히 즐길 생각이니까. 찾지 마라."
그 말을 남기고 하무백은 숙소로 향했다.
정말 전력을 다해서 쉬겠다는 듯.
그리고 남은 열흘 동안 하무백의 모습을 본 이는 없었다.
삼월 초하루.
교룡관 전반기의 시작일.
이틀 전부터 조용하던 교룡관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본파, 본가로 돌아갔던 생도들과 교관들이 복귀한 때문이다.
"이 년 차라. 후우. 이제 일 년 남았네."
백리평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대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백리평이 각오를 다졌다.
이미 겪었던 산월마림.
그곳에 다시 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일 년.
연무장에 도착하니 이미 다들 나와 있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이들도 보였고, 건들거리는 이들도 보였다.
맹룡대, 잠룡대, 와룡대의 일 년 차 신입 생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