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뭐요!
"이번 일이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혈교의 잠혼독 사건. 그것을 말함이다.
"광회천. 아니, 우리 입장에서는 형의천의 제거인가. 아니, 아니지. 혈교 놈들을 제거하는 명목이었으니 광회천의 제거인가? 뭐, 사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팽도율의 모습을 하무백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흠흠. 아무튼 광회천 그놈이 단주로 있던 단안상단, 우리가 전부 흡수했네. 장사의 본단까지 말일세."
"그래서 그렇게 바빴던 거구료."
무창의 사태를 처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으니.
공손단경마저 과로한 모양이었다.
서류 업무를 해내는 데 있어서, 공손단경의 경지를 논하자면 가히 하무백 정도였다.
그런 그의 눈 밑이 거뭇거뭇했으니.
무창의 아비규환을 정리하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지만, 그 정도라면 공손단경의 능력 범위 안쪽이었다.
거기에 교룡관의 단안상단 흡수가 더해졌으니.
장사에 있는 상단 아니던가.
"공손 늙은이가 그냥 대가 없이 해주지는 않았을 텐데······."
"반반 나눠 가졌네. 절반은 교룡관 금당이, 절반은 맹주전과 천목각이."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지.
정천맹의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곳은 금해각(金海閣)이다.
돈줄만이 아니다.
정천맹의 내정에, 문사들의 인사까지 담당하고 있는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금해각이 장로원의 입김 아래에 있었다.
즉, 정천맹의 돈줄을 장로원이 쥐고 있다는 의미.
장로원이 맹주전과 천목각 등 맹주 쪽에 대한 돈줄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거기에 대비해 맹주전과 천목각도 각기 돈줄을 만들어 놓기는 했으나.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
이번에 마침 큰 상단이 혈교에 엮였으니, 그곳을 흡수한 것이다.
장로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게 교룡관과 맹주전, 천목각이.
"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가져간다고 하더니. 거기에 귀찮은 일까지 떠맡기고. 이거 내 손해가 막심한 것 같소만?"
하무백의 시선에 이번에는 팽도율이 고개를 돌렸다.
"남궁 당주가 아주 입에 귀에 걸렸다네. 급격히 늘어난 재정에 말이지."
"음. 그럼 이 일은 금세 장로원 귀에 들어가겠구려."
"뭐, 이미 다 흡수한 마당이니 상관없네. 장로원이라도 어찌할 수 없지. 공손 군사가 맹칙에 따라 일을 다 처리해뒀으니."
하긴, 그 철두철미한 인간이 허투루 일을 처리했을 리 없었다.
장로원이 꼬투리 하나 잡지 못하게 철저히 했겠지.
'가만.'
문득 든 생각.
공손단경이 굳이 무창까지 걸음한 이유가 무언가 했더니.
아마도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장로원이 혈교의 잠혼독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있을 때, 그는 광회천의 단안상단에 주목하고 직접 움직인 것이다.
물론 잠혼독에 대한 것도 훌륭히 처리했다.
마교의 대법과 마공에 대한 단서까지 주었고.
"아무튼 그 덕에 예산에 여유가 아주 많이 생겼지."
"그 핑계로 정천맹에서 예산을 줄이면 어떻게 하오?"
"흐. 교룡관의 예산 규모는 맹칙으로 정해져 있네."
"맹칙이야 장로원에서 바꾸면 그만 아니오?"
"맹주와 군사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
돌아온 팽도율의 대답.
"관주는 팽가의 사람 아니오? 팽가는 오대세가의 일원이고."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장로원의 주축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백도회였으니까.
맹주와 군사는 신진팔문의 파벌이었고.
"나는 그런 것 모르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룡관이야."
어쩌면 본가인 팽가보다 이곳을 중요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하무백이다.
"예산이 늘어났으니, 이제 맹룡대에도 충분한 지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겠구려."
하무백의 말에 팽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장비도 모두 상급의 물품으로 새로 다 지급될 걸세. 방패도 물론이고, 검도."
그건 좋은 일이었다.
맹룡대 칠 조와 하설란은 하무백이 만든 검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맹룡대에 한해 휴관기를 없앨 생각이네."
"뭐요?"
그 말에 하무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공식적으로 마음껏 쉴 수 있는 휴관기를 없앤다니.
"솔직히 말해서 맹룡대의 상황이 휴관기에 쉬고 있을 입장인가? 그건 잠룡대와 와룡대 기준으로 만들어진 걸세."
"······."
"맹룡대는 죽자사자 수련해도 모자랄 이들이야. 그런 이들에게도 휴관기를 준 것은······."
"예산 때문이란 말이오?"
"백 명을 먹이고 재우는 것도 다 돈일세. 거기에 교관까지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휴관기의 교룡관은 그야말로 조용했다.
최소한의 인력과 자재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무백을 비롯한 맹룡대 칠 조의 인원은 밥도 먹고 잠도 잤지만.
맹룡대 전원이 그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수련 시간을 늘릴 걸세. 방패술도 더 본격적으로 가르칠 생각이고. 방패술만이 아니라, 거기에 어울리는 검법에 합격술까지 고안할 생각이네."
"제갈 교관이 바쁘겠군."
하무백의 말에 팽도율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요?"
"자네가 좀 만들어주게."
"뭐요!"
하무백이 다시 한번 벌떡 일어났다.
팽도율은 그런 하무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능력 남아돌지 않은가?"
"제갈 교관도 가능한 일 아니오?"
"제갈 교관은 맡은 일이 너무 많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잠룡대 교관이라는 거지. 맹룡대의 일에는 맹룡대 교관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끄응."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맹룡대 생도의 수련은 맹룡대 교관이.
지극히 옳은 말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후우. 한 교관에게······."
하무백이 어떻게든 귀찮은 일을 피하려 입을 떼자.
"자네도 개새끼가 되려는 겐가?"
팽도율의 적나라한 도발.
"젠장."
하무백이 입을 닫았다.
팽도율이 그런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후우. 알겠소이다. 내가 하겠소."
팽도율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면 내일부터 잘 부탁하네."
"후우. 알겠소. 새 장비가 들어오면 그거나 보여주시오. 그래야 맞춰서 가르치지."
"알겠네. 일러두도록 하지. 맹룡대 칠 조의 변화. 무척 인상적이었네."
그 말을 남기고 팽도율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청객이 떠나고 숙소에 홀로 남은 하무백.
침상에 걸터앉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후우. 뭐, 산월마림으로 갈 녀석들이니······."
하무백은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혈교 새끼들을 상대하러 가는 녀석들이다.
거기에 마교 새끼들도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고.
산월마림에는 하무백 자신도 볼 일이 있었다.
숨어 있는 그 새끼들을 잡으러 가야 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굴려줘야지. 가능한 전부 살아 돌아올 수 있게."
생환율 오 푼.
그따위 말은 이제 사라지게 만들겠다 마음먹은 하무백.
교룡관에 온 것은 타의에 의해서였다.
교관도 타의에 의해서 되었다.
그렇게 보낸 일 년.
하무백은 맹룡대 교관이 되고 처음으로 자의로 결정을 내렸다.
타의에 의해 떠밀려 맡은 일인 듯했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하고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대강 일 년이면 쉴 만큼 쉬었고.
"오랜만에 제대로 움직여 봐야겠군. 진짜 개새끼가 되어야겠어. 맹룡대 녀석들에게."
하무백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녀석들을 굴릴지 계획이 차곡차곡 들어섰다.
이제 좋은 시절은 끝이었다.
하무백도.
맹룡대 생도들도.
***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
다섯 사람을 위한 연무장이건만 아홉 사람이 모였다.
칠 조와 이십 조, 거기에 남궁 남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당진산이 남궁지후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들 중에는 아직 기막으로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이가 없었다.
그러니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남궁지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사리 떼지는 못했다.
남궁지유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답답한 듯 결국 그녀의 입이 열렸다.
"가문의 일이야. 가문의 일이긴 한데······."
거기가 말을 멈춘 남궁지유.
그녀를 재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남궁세가의 일 때문이라 하니.
외인인 자신들이 무어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님은. 우리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거지."
남궁지후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후야!"
남궁지유가 놀라서 외쳤다.
"누나가 나보다 더 잘 알 거잖아."
"······."
남궁지유가 아무런 대꾸를 못 했다.
그 모습을 일곱 사람은 그저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번에 교룡관으로 복귀하기 얼마 전에 소가주에 대한 방침을 말씀하셨어."
힘없이 말하는 남궁지후.
그 분위기에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알 수 있었다.
남궁지후가 소가주가 되지 못했음을.
앞으로도 그 과정이 험난할 것임을.
그러니 저런 모습인 것이다.
"제왕검형."
갑자기 남궁지후의 입에서 튀어나온 남궁세가 최강의 절기.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직계를 비롯한 직계에 가장 가까운 방계의 남아들에게 공개한 후. 가장 뛰 어난 성취를 보인 이를 소가주로 삼으며 후반부를 전수하겠다. 그게 아버지의 말씀이셨어."
"······."
다들 말이 없었다.
"남궁세가의 직계라면······."
"나와 누나, 둘. 그게 전부지."
당진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지후가 답했다.
"사촌들과 경쟁을 하라는 말씀이신 거야."
남궁지유가 설명을 보탰다.
당진산은 입을 떡 벌렸다.
그 역시 사천당가라는 세가의 일원이다.
세가에서 이런 식으로 후계를 선정한다는 것은 들은 적도 없었다.
무림세가가 강호무림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지만, 무림문파와 다른 점은 분명히 있었다.
혈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것.
그래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보통은 장자계승이 원칙이었다.
그렇지 않은 가풍을 지닌 세가도 있을 수 있지만, 당진산이 아는 한 남궁세가는 장자계승의 원칙을 지키던 세가였다.
당장 남궁지후의 아버지인 현 남궁세가주 또한 장자였으니까.
그리고 멀쩡한 아들을 두고 굳이 소가주의 자리를 경쟁케 하겠다니.
이제야 남궁지후의 한탄이 이해가 갔다.
"제왕검형의 전반부는 사실 직계면 익힐 수 있는 검공이야."
남궁지유가 설명을 보탰다.
"후반부가 가주의 상징이지. 숙부님들 모두 제왕검형의 전반부는 익히셨고, 다들 본가에 계시지. 사촌들은 제왕검형을 익힐 자격이 없었는데, 이번에 아버지께서 가주의 명으로 그 자격을 부여하신 거고."
"그 말은, 사촌들은 숙부들에게서 제왕검형 수련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거겠네."
백리평의 말에 남궁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후는 교룡관으로 복귀하기 고작 며칠 전에 전수 받은 검법을 교룡관에서 홀로 수련해야 하고."
연하민의 말에 남궁지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말이 없었다.
남궁지후의 얼굴이 어두울 만했다.
이건 너무 노골적이었다.
소가주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노골적인 조건.
"아버지는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그러셨어. 항상 차가운 눈으로 누나와 나를 보셨지. 마치 남을 보는 듯한. 차라리 사촌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따뜻했어."
한이 서린 목소리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겠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발악했는데······. 가문 사람들의 인정은 모두 받았는데, 아버지는! 교룡관으로 가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렇게 남궁지유와 남궁지후는 일 년 전에 교룡관 잠룡대 일 년 차 생도로 입관한 것이다.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던 그들의 입관.
그 사연은 이러했던 것이다.
"뭐, 이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잖아."
그때 입을 떼는 단목운뢰.
그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너 남궁지후잖아.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 그러면 당당히 제왕검형 전반부를 익혀내면 돼. 아버지를 원망할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면 되는 거야."
당진산이 단목운뢰의 팔을 잡았다.
너무 직설적인 말 때문이었다.
"나는 얼마 전에 겨우 찾아낸 가문의 비전무공 비급이 있는데······. 익힐 수가 없었어. 비급을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앉은 자리에서 스무 번을 읽어도 단 한 글자의 의미도 알 수 없었어."
막 무어라 하려던 남궁지후의 입이 멈췄다.
"적어도 너는 그렇지 않잖아. 제대로 전수는 받은 거잖아. 그 뒤로는 오롯이 네 몫이야."
남궁지후가 단목운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동투제 전에 단목운뢰와 비무를 몇 차례 했었다.
그때의 단목운뢰의 눈빛을 기억했다.
그 눈빛 깊은 곳에는 부러움이 자리했었다.
무공에 대한 열망과 함께 자신의 무공에 대한 부러움.
고작 삼재검법으로 동투제 4가에 오른 놈이다.
자신은 8강에 그쳤건만.
대진운 따위의 핑계는 무의미했다.
자신은 못 한 것을 해낸 녀석.
저 녀석이 비급을 얻었는데, 익힐 수가 없어서 좌절했단다.
우스운 일이다.
비급을 읽고 해석할 능력도 없는 녀석이, 삼재검법의 부단한 수련으로 동투제 4강에 올랐건만.
자신은 무공을 모두 전수받고도 제대로 조언해줄 가문의 어른이 없다는 이유로 먼저 포기하고 아비를 원망하고 있었다니.
남궁지후가 앉아 있던 나무 둥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잠룡대의 연무장이었다.
단목운뢰의 말이 맞았다.
원망할 시간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르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