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고맙게 받겠소이다
"고마워."
남궁지유가 단목운뢰를 향해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녀 역시 같은 의미의 말을 남궁지후에게 했었으나, 남궁지후는 그것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그러나 단목운뢰의 말은 달랐던 모양이다.
당장 저리 변한 모습을 보이다니.
"아, 그런데 비급은 어떻게 됐어?"
익히지 못했다는 비급.
담룡동각에서 듣기로는 가문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하 교관님의 도움을 받고 있어."
담담한 대답.
그러나 남궁지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수밖에.
가문의 비전을 타인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이었으니.
단목운뢰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있는 줄도 몰랐던 무공이야. 하 교관님에게는 은혜만 입고 있고."
"당사자가 그렇다고 한다면야······."
"제왕검형 수련이 막히면, 지후에게 하 교관님께 도움을 청해보라 말해 줘.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너무도 진지한 단목운뢰의 표정에 남궁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를 남긴 후 연무장을 떠났다.
동생 남궁지후를 쫓아가는 것이다.
"과연 도움을 청할까? 제왕검형인데?"
당진산이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무백의 가르침은 크나큰 도움이 된다.
당진산 역시 가문의 비전인 영사구편의 수련을 하무백에게 받지 않았던가.
놀라운 것은 하무백은 영사구편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펼치는 것만 보고도 어떤 방향으로 수련해야 할지 그 길을 제시해 주었으니.
'아니, 어느 정도는 아는 것 같기도.'
그런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하무백은 당가 무사들이 사용하는 영사구편을 보고 대략적인 이치를 알고 있었다.
당진산은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무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이니.
만약 알았다면 괴물이라는 말도 모자랐을 일이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그 무공이 지닌 이치를 대략적이나마 알게 된다니.
재능을 뛰어넘어 소름 끼치게 무서운 능력이었다.
"뭐, 스스로 판단할 일이지."
단목운뢰가 담담히 대꾸했다.
***
남궁화현은 답답한 눈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동생들이 조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제왕검형 전반부.
동생들도 익히고 있는 부분이었다.
조카들이 수련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절로 답답해졌다.
뛰어난 아이들임에도 눈에 차지 않았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더 뛰어난 아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남궁지후.
자신의 장남.
허나 타인의 아들이기도 했다.
'나도 나 자신이 답답했었지.'
젊은 시절.
가문에 천재가 한 명 있었다.
허나 아무도 그가 천재인 줄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방계에서도 방계인지라.
신경을 쓰는 이도 없었고, 창궁무애검조차 익힐 수 없었던 이였다.
남궁화현이 그를 본 것은 우연히 외곽 연무장을 지날 때였다.
아직도 그때 본 검식의 움직임이 눈에 선했다.
'아름다웠지.'
가문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이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대연검법이었다.
자신 역시 대연검법을 익히고 창궁무애검을 익힌 후 제왕검형을 익혔으니.
그 녀석의 대연검법은 창궁무애검 그 이상의 성취를 보였다.
우연히 발견한 방계의 무인, 그 천재성에 반해 곁에 두었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그의 검을 보고 자신의 검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제왕검형을 수련하고 있음에도, 그의 대연검법만도 못 하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만든 천재였다.
그놈은.
주머니 속의 송곳이었다.
언제고 그 천재성이 드러날 터.
놈에 대한 열등감에 몸부림치던 남궁화현은 두 가지 목적으로 그놈까지 데리고 외유에 나섰었다.
두 부인과 함께한 이 년의 외유.
그리고 돌아올 때는 남궁화현 혼자였다.
아니 남궁지유, 남궁지후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본가로 돌아왔었다.
남궁지후와 남궁지유의 천재성을 볼 때면, 그놈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게 느꼈던 열등감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런 만큼 정을 줄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아비와 자식이었으나.
남궁화현은 자신의 자식 둘을 자식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나는 당당히 가주가 되었다. 그러니 저 아이들 중에서 가주가 될 녀석이 나올 수도 있을 테지.'
조카들의 수련을 조금 더 지켜보던 남궁화현은 몸을 돌렸다.
***
하무백은 숙소에서 나왔다.
곧장 찾은 이는 제갈명이었다.
"하 교관님. 어서오시지요."
한창 서류 작업으로 바빠 보였다.
교관이 이런 일까지 하고 있다니. 역시 대단한 이였다.
"관주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하무백의 말에 제갈명이 반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달받았습니다. 하 교관님께서 맹룡대의 방패술을 담당해 주신다고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하 교관님 같은 분께서 나서주신다니. 저도 한시름 놓겠습니다."
그의 두 눈은 진심으로 가득했다.
맹룡대를 수료하고 떠나는 생도들을 마지막 날까지 가르쳤다 들었다.
"방패술에 더해 거기에 맞는 검술과 합격술까지 함께 가르쳐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 또한 전달받았습니다."
"그리되면, 방패술에 변형을 좀 가할 수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무백이 조심스레 물었다.
방패술을 만든 이는 제갈명이었으니.
그것을 인계받은 하무백이 변형시키겠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제 방패술은 어디까지나 방어와 생존만을 위한 움직임이니까요. 여기. 이것을 받으시지요."
제갈명이 서책 세 권을 꺼내 하무백에게 건넸다.
"이건?"
"그럴 경우를 생각해서 만들어 둔 검술과 합격술입니다."
하무백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관주는 그가 이것까지 할 시간은 없을 거라 했는데 이미 만들어 두었다니.
"제가 도무지 가르칠 시간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방패술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하 교관님께서 나서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참고만 하시고, 부디 하 교관님 편하신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신뢰 가득한 눈으로 하무백을 바라보는 제갈명. 믿고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태도였다.
하무백의 무얼 믿고?
솔직히 말해, 교룡관에서 하무백이 보여준 모습은 믿음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도 제갈명은 하무백을 지극히 신뢰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다.
본디 제갈명은 하무백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니.
'이제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제갈세가라면 하무백에 대한 정보를 쉬이 구할 수 있을 터였으니.
"고맙게 받겠소이다."
서책을 품에 넣고 하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명이 여전히 바빠 보인 탓이다.
하무백은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칠 조 생도들은 물론 이십 조 생도들까지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한설빙도 이곳에 있었다.
"응? 너는 왜 너네 연무장 놔두고 여기 있어?"
하마북이 한설빙에게 물었다.
"일을 저에게 다 떠넘긴 분이 할 말은 아닌데요?"
그렇게 수습한 하무백은 자신의 자리에 비스듬히 누웠다.
한설빙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오늘은 푹 쉬시겠다던 분이 여기는 어쩐 일이실까요?"
여전히 날 선 목소리.
"오라버니. 저 여기에서 수련하면 안 될까요?"
그때 연이어 들린 하설란의 물음.
하설란은 칠 조가 아니라 이십 조였다.
하무백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설빙만 보다가 그 사실을 순간 깜빡한 것이다.
"그래. 자리도 괜찮은데 편한 대로 해라."
그렇게 수습한 하무백은 자신의 자리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 천천히 서책을 넘겼다.
자세한 도해와 설명이 가득 적힌 책이었다.
"과연······."
상당했다.
역시 제갈세가의 제갈명이다 라는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
굳이 꼬투리를 잡자면 산월마림에서의 실전 경험이 없었기에 미진한 부분이 몇 개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그 부분은 하무백이 보완하면 될 일.
한 번 읽으니 전부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조금만 손을 보면 될 듯했다.
합격술 부분은 새로이 만들 게 있었고.
'이 정도면 일 년은 빡세게 굴릴 수 있겠네.'
하무백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맹룡대 칠 조 생도는 흠칫했다. 어디선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탓이다.
"저, 교관님. 그 서책은 뭡니까?"
당진산이 조심스레 물었다.
항상 이런 일에는 당진산이 나섰다.
조장다운 모습이다.
"너네들이 익힐 거."
그 말에 생도들 전부가 눈을 빛냈다.
"너네들뿐만 아니라, 맹룡대 전체가 익힐 거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 다섯을 가르치는 것도 귀찮아하는 교관이다.
그런데 맹룡대 전체를 가르칠 서책을 보고 있다고.
알 수 없는 일이다.
"맹룡대 과정에 변화가 좀 있을 거다. 언제 발표가 될지 모르겠는데. 근 시일 내에."
하무백의 말에 다들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잠룡대, 와룡대와 함께하는 수업이 생긴 터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맹룡대의 과정에 변화가 생긴다고?
"열심히 수련했는데. 산월마림에 가서 죽으면 억울하잖아. 안 죽게 열심히 굴러야지."
다섯 생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환율 오 푼이라며 집에 가라던 교관이 눈앞의 저 사람이다.
헌데 지금 저런 말이라니.
"다만, 그러자면 보통 수련으로는 안 될 거다."
하무백이 빙긋 웃었다.
살벌한 웃음이다.
"다른 놈들은 물론이고, 너네도 힘들 거야. 정말 제대로 굴려줄 거니까."
그 말에 흠칫 몸을 떠는 이가 있었다.
한설빙이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 교관님?"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연하민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 아니야."
이내 평소의 신색을 회복하는 한설빙.
"좀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설마 그때처럼 하실 건가요, 단주님?"
자신도 모르게 옛 호칭이 튀어나왔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그때 너희들이야 그래도 어느 정도 기반은 있었잖아. 맹룡대 놈들은 그런 거 없는 놈들이니. 더 치열하게 굴러야지."
그 말을 들은 한설빙이 물끄러미 일곱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생도들은 왠지 그 눈빛이 찝찝했다.
그럴 수밖에.
동정심이 가득 찬 눈빛이었으니.
"저, 한 교관님······?"
당진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힘내라. 그리고 오늘은 가급적 푹 쉬고."
한설빙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너도 도와야 해."
막 연무장을 떠나려는 한설빙의 등 뒤로 하무백이 외쳤다.
한설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장에 남은 일곱 생도는 점점 더 불길해졌다.
"그럼 수련 열심히 하고 있거라."
하무백이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으니.
연무장을 떠나는 하무백의 뒷모습은 불길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
언무웅.
진주 언가의 후기지수로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이였다.
올해 잠룡대 일 년차로 교룡관에 입관했다.
그가 입관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교룡관 동투제의 결과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잠룡대와 와룡대는 다 떨어지고 맹룡대의 생도가 우승과 준우승을 했다니.
물론 무당과 종남의 제자라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무당과 종남의 제자가 잠룡대가 아닌 맹룡대에 들었다면, 문제가 있는 이들일 터.
그런 이들에게 우승과 준우승을 뺏기다니, 정파의 명문 세가 후손으로서 통탄할 일이었다.
비록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하나 중원십대세가를 꼽는다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진주 언가다.
그곳의 직계인 자신이 맹룡대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잠룡대에 들어온 것이다.
마침 오전에 수업 하나는 맹룡대 이 년차 놈들과 함께 들어야 한다고 했다.
같잖은 놈들에게 제대로 자신의 위엄을 보여 주리라.
언무웅은 자신은 일 년차이고, 그들은 이 년차라는 사실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맞춰서 교실로 들어섰다.
오늘 받을 수업은 '독과 약'.
간단한 듯 보이는 수업이었으나 무척이나 중요했다.
사파나 혈교 놈들의 독은 끔찍하다 들었으니.
게다가 불과 얼마 전에도 이곳 무창이 혈교 놈들의 독으로 난리가 났다 하지 않던가.
생도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건들거리는 맹룡대 놈들도 눈에 보였다.
앉아 있는 자세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딱 봐도 미천한 놈들이다.
존재만으로 교실 분위기를 흐리고 있었다.
명가의 자제인 자신이 가서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교관이 들어왔다.
선유곡 출신의 와룡대 교관, 비가영.
언무웅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독과 약을 가르친다기에 음침한 남자 교관을 예상했는데, 엄청난 미인이 들어왔으니까.
"흠흠."
맹룡대 생도 놈들을 교육하는 건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수업에 집중해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