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누군데?
"준비! 쉬어!"
하무백은 그야말로 기관이라도 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생도들도 기관의 인형이 된 양 검과 방패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이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점차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무백은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같은 구령을 반복할 뿐.
맹룡대 칠 조 생도들 역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당진산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이나마 있던 내공을 금제 당하는 순간부터 지옥이 펼쳐졌다.
언무웅과의 비무로 인해 이미 지쳐 있는 상황.
거기에 바로 이어진 훈련.
단순 동작의 반복으로 쉬워 보였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어마어마한 무게의 검과 방패를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다.
게다가 하무백은 준비 동작과 쉬어 동작의 지속 시간을 불규칙적으로 지시했다.
길었다가 짧았다가.
덕분에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잔뜩 긴장한 채로 이어지는 훈련은 전신의 근육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어느덧 오후 수련 시간도 끝날 때가 되었다.
이제 저녁 식사 시간.
붉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는 생도들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곧 이 지옥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
그러나.
하무백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석식 시간에 접어든 터.
저 미친 교관은 그럼에도 수련을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은 묵묵히 움직였다.
간간이 당진산을 향해 안타까운 눈빛을 던질 뿐, 수련에 집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관이 어떤 인물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세상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인간이었지만.
하고자 마음먹으면, 그때는 마귀로 돌변하는 인간이지 않던가.
그랬기에 칠 조 생도들은 조금의 불만도 비치지 않은 채 수련에 열중했다.
아니 단목운뢰는 은근히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저 수련귀 녀석······.'
연하민은 그런 단목운뢰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당진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팔짱을 낀 하무백은 여전히 당진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생도를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무백의 시선이 한 생도에게만 고정된 틈을 타 꾀를 부리려던 생도들에게 여지없이 응징이 날아갔으니.
"이, 이게 뭐야. 대체······."
그때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초무하의 근처에서 훈련을 받던 일 년차 생도였다.
"이딴 바보 같은 짓을 내가 왜 해야 해."
그러면서 우뚝 멈춰 섰다.
"씨발. 더 이상은 못 해."
검과 방패를 내팽개친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하무백이 고개를 돌렸다.
그 생도와 두 눈이 마주쳤다.
다른 생도들이 숨을 죽였다. 다들 아까 하무백이 맹룡대 교관을 어찌했는지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생도가 이렇게 반항을 하다니.
하무백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싶은 순간.
짝!
격타음과 함께 움직임을 멈춘 생도가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갔다.
"크윽."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일 년차 생도.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왼쪽 뺨이 퉁퉁 부어 있었다.
"검과 방패를 들어라."
그러나 생도는 하무백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싫으면 꺼지든가. 방해되니까."
하무백은 더 이상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다시 당진산 앞으로 왔다.
"뭣들 하나? 준비!"
하무백의 구령에 다시 생도들은 황급히 검과 방패를 움직였다.
조금 전보다 훨씬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가,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꺼지라 했음에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던 생도.
그가 악을 쓰듯 외쳤다.
하무백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쉬어! 누군데?"
"대 도림의 림주가 본 공자의 아버님이시다!"
다시 한번 악을 쓰듯 외치는 생도.
그의 두 눈에는 기대가 어려 있었다. 자신의 배경을 들은 저 빌어먹을 교관 놈이 꽁지를 말 것이라고.
이런 미친 곳인 줄 알았으면, 그냥 와룡대로 갔을 것이다.
맹룡대라는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외침에 그 주변에 있던 생도들이 오히려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가 도림주의 아들이라는 것은 지금 처음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무백은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도림 림주의 아들 운도헌이라고!"
운도헌은 다시 한번 악에 받쳐 외쳤다.
하무백이 당진산을 스윽 봤다.
"당진산. 오늘 네가 한 짓이 얼마나 어설펐는지 알려주지. 우선, 상대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넌 거기서부터 틀렸어."
당진산이 언무웅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질질 끌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시. 전력을 다해서."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무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짝!
다시 한번 들리는 격타음.
"도림은 어떻게 된 곳인지 최근 제대로 된 인간을 하나밖에 못 본 것 같군."
운도헌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커헉."
양쪽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그는 일어나면서 등에 메고 있던 도를 뽑아 들었다.
본인의 병기를 가지고 오는 것을 딱히 막지 않았기에, 운도헌은 도를 지니고 있었다.
도를 뽑아 든 그는 즉시 하무백을 향해 도법을 펼쳤다.
순간 어마어마한 기세가 그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하무백이 외쳤다.
"준비!"
그 구령에 생도들은 황급히 방패와 검을 움직였다.
그 직후.
쾅! 쾅!
운도헌 주변의 생도들의 방패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그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쓰러지거나 다친 이들은 없었다.
어느새 몸에 좀 익은 준비 자세로 운도헌이 흘려낸 엄청난 기세를 막아낸 것이다.
"도림이 진짜 갈 데까지 간 건가? 개나 소나 죄다 단천참마도라니."
하무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운도헌은 단천참마도의 마지막 초식인 붕천멸마를 펼치며 하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퍽!
퍼퍽!
퍽퍽퍽!
그러나 하무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주먹을 휘둘러 운도헌의 도법을 박살을 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육음.
하무백의 두 주먹은 그야말로 쉬지 않고 운도헌을 두드렸다.
"크허헉."
운도헌은 거친 비명성을 흘렸다.
하무백이 당진산을 스윽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쓰기로 했으면 박살을 내놔야 한다. 뭐, 이건 제대로 한 것 같긴 하다만."
운도헌은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하무백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서는 획 던졌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방금 상황에서 자신의 구령에 제대로 반응을 했고, 자세도 그럴듯하게 나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무백은 그 말을 남기고 연무장을 떠났다.
연무장에 남은 생도들은 즉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헉헉. 죽는 줄 알았네."
"그런데 분명 단천참마도라 그랬었지?"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초무하 역시 근처에 있었기에 그 말을 똑똑히 들었었다.
"그래. 그랬었어."
초무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걸 맨주먹으로 박살을 냈다고?"
"끄응. 내가 이야기했잖아. 괴물 교관 하나 있다고."
어느새 다가온 당진산이 풀썩 주저앉았다.
"아, 선배님."
초무하가 황급히 일어서려 했으나 당진산이 손을 흔들어 말렸다.
"됐어. 쉴 기운도 부족할 텐데······."
"아까 비무는 정말 멋있었습니다."
초무하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개뿔. 조금 전에 우리 괴물 교관님께 깨지는 거 못 봤냐?"
봤다.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훌륭한 비무를 보고 제대로 못 했다고 질책을 하다니.
"그런데 진짜 도림 사람은 왜 저러지?"
어느새 다가온 단목운뢰가 당진산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난들 알까."
연하민은 바닥에 널브러진 운도헌을 잠시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연무장을 떠났다.
작년의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저, 그런데 괜찮을까요?"
그 말에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초무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도림 림주님의 아들이라면 엄청난 신분인데······."
초무하.
그는 무창에 자리한 이름 없는 작은 무관의 제자였다.
그런 그에게 도림의 제자, 그것도 림주의 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신분인 것이다.
그 물음에 당진산과 단목운뢰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괜찮을 거야."
당진산의 대답.
"안 괜찮다면, 아마도 도림이 안 괜찮겠지."
단목운뢰의 대답.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의 교관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것은 교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무백이 생도들의 훈련을 종료한 직후 한설빙이 교관들의 훈련도 종료했으니까.
"에고고. 일단 빨리 움직이자. 너무 늦게 가면 담룡각에 밥 없다."
당진산이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우리 점심도 걸렀지?"
단목운뢰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초무하를 일으켜 세워줬다.
"빨리 가서 먹자. 버티려면 먹어야지."
담룡각에서의 잠깐의 인연 때문일까.
꼬박꼬박 선배님이라 부르며 다가오기 때문일까.
단목운뢰와 당진산이 초무하를 챙겼다.
그렇게 세 사람이 움직이자 다른 생도들도 슬금슬금 움직였다.
모두가 떠나고 생도 두 명이 운도헌에게 다가갔다.
미처 나서지 못하고 모든 것을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던 두 생도.
도림에서 운도헌에게 붙여준 제자였다.
호위나 시종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교룡관의 특성상, 제자 두 명을 운도헌과 함께 맹룡대 생도로 들여보낸 것이다.
두 사람은 운도헌을 들쳐 업고 의당으로 향했다.
***
"거, 벌써 터졌는가? 허허."
팽도율이 찻잔으로 입술을 축이며 웃었다.
"도림. 거기 대체 왜 그런 거요?"
"난들 알겠나. 정 그러면 맹주님께 물어보던가."
팽도율이 찻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쓰읍. 진짜 한번 다녀와야 하나."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정천맹주 소휘웅.
굳이 일부러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의 등을 맡기고 함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든 전우였지만.
그 능글맞음은 가히 천하제일이었다.
하무백으로서는 공손단경, 그보다 더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또 없소?"
하무백이 팽도율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맹룡대 안 같은 맹룡대 말이오."
"뭐, 몇 명 더 있네."
곧 팽도율은 운도헌같이 특별한 문파 출신의 생도들을 알려 주었다.
"화 안 내나?"
팽도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작년에는 정말 불같이 화를 냈었으니까.
"내 담당 생도도 아니고, 그냥 단체 훈련만 봐주는 거라. 딱히 상관없소."
하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자네가 맹룡대 전체를 담당하는 건데?"
피식 웃는 하무백.
"다른 교관들도 있잖소. 지금이야 교관들도 굴려야 하지만. 한두 달 지나면 뭐."
하무백이 두 눈을 빛냈다.
"혹독하게 굴릴 생각인가 보구만."
"교관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오늘이야 첫날이니 잠깐 맛만 보여준 거요."
그 말에 팽도율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이제 맹룡대의 일은 전적으로 하무백의 일.
"그보다 도림은 어쩔 건가? 림주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운교철?"
당금 도림 림주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하무백.
팽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치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나한테 덤비기라도 할 것 같소?"
곰곰이 생각하던 팽도율은 고개를 저었다.
도림은 맹주 소휘웅의 출신 문파다.
그런 만큼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도림은 전력으로 소휘웅을 도왔고, 가장 선두에 선 이가 현 림주 운교철이다.
그는 전장에서 몇 번이나 하무백을 겪었다.
그러니 고작 이런 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제 아들이 곤죽이 되었다지만.
훈련 중 생도가 교관에게 반항하고 덤빈 것이니.
명분이 하무백에게 있었다.
무엇보다 하무백이 더 강했다.
작년 한평과의 일을 떠올려도.
무릎을 박살을 냈는데, 도림에서는 딱히 대응하지 않았다.
하무백을 모르고 덤볐던 한평이 멍청한 놈이었던 것이다.
***
의당 침상에서 운도헌이 두 눈을 떴다.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얼굴은 지독하게 아팠다.
등불이 겨우 밝히고 있는 작은 병실.
운도헌이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으나 통증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아닌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지난 교룡관 동투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자인 관하경의 이야기도, 우승자인 주우명의 이야기도.
올해는 자신이 동투제의 우승자가 되고자 하는 포부를 품고 맹룡대로 들어왔다.
'와룡대 출신 동투제 우승자보다 맹룡대 출신 동투제 우승자가 더 멋지잖아.'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그리 느꼈으니.
그러면 자신의 아비도 자신을 보는 눈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빌어먹을 맹룡대. 씨발. 두고 봐."
이제 멋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독에 찬 운도헌의 중얼거림이 어둑어둑한 병실에서 조용히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