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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214화 (214/312)

214화. 쟤보다 강해?

어둑어둑한 집무실.

막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연자경은 등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서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곱게 놓여 있는 봉서.

자신의 서탁에 이리 봉서를 두고 갈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서찰이나 서류는 모두 자신의 수행위사를 통해서 올라오는바.

자신의 서탁에 이렇게 직접 서찰을 올려놓는 건방진 짓을 하는 놈들은.

'건방진 혈교 놈들······.'

그랬다.

혈교였다.

복수를 위해 잠시 더러운 놈들과 손잡고 있는 것.

연자경은 일단 품에 손을 넣었다.

무창의 그 난리가 난 후.

당가에서 만약을 대비해 정천맹으로 보낸 해약이 있었다.

지금도 당가에서 꾸준히 조금씩 만들어 비축 중인 해약.

연자경도 그것을 세 개 받아 두었다.

일단 그중 하나를 품에서 꺼내 먹었다.

혈교 놈들이 저 봉서 안에 무슨 짓을 했는지 어찌 알겠는가.

각자의 이득을 위해 거래하는 관계다.

즉, 이득에 따라 자신을 얼마든지 노릴 수도 있는 사이라는 의미.

항시 조심해야 했다.

해약이 완전히 흡수된 것을 확인한 후에 연자경은 봉서에 손을 뻗었다.

봉투를 뜯고 안에 든 서찰을 펼쳤다.

그의 표정이 냉막하게 굳었다.

"건방진······."

차가운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혈교 일로. 건방진 새끼.'

서찰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최근 몇 년 봉마단과 맹룡대의 활약으로 산월마림의 강시 개체수가 조금씩 줄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부탁한다.

즉, 더 많은 희생양을 산월마림으로 보내달라는 요구였다.

'내 아들마저 잡아먹어 놓고는······.'

서찰을 든 연자경의 손이 잘게 떨렸다.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던 아들의 죽음을 떠올린 것이다.

욕정에 눈이 멀어 날뛰다가 죽은 녀석이지만 어쨌든 자신의 장남이다.

가슴이 아프지 않을 리 없었고, 분노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저 후일을 위해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을 뿐.

혈교 일로의 서찰은 그 분노를 살짝 끄집어낸 셈이다.

'대가는 백화자광초······.'

그 대목에서 연자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산월마림은 아직 명확한 혈교의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봉마단의 활동을 놈들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다.

백화자광초를 채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고.

결국 놈들의 손바닥 위라는 의미.

'놈들은 강시를 부릴 수 있다.'

지난 전쟁에서 수많은 강시를 이용해 공격했었으니.

즉 그들은 산월마림에서도 강시를 신경 쓰지 않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 놈들이 강시가 조금씩 줄어드니 대책을 요구했다.

'백화자광초. 많을수록 좋기는 하지.'

꼭 하무백 때문만은 아니다.

당장 보유한 백화자광초로 만든 산공독만으로도 하무백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을 중독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으니.

잠깐 생각에 잠긴 연자경.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하투제라 했던가. 그것이 끝날 즈음이 좋겠군."

***

지칠 대로 지쳐서 밥맛도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음식을 앞에 두니 꿀맛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석식 시간에 맞춰서 훈련이 끝났지 않은가.

덕분에 담룡각은 북적거렸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니 맹룡대 생도들은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다들 힐끔거리면서 바라보는 곳.

맹룡대 칠 조와 이십 조 생도가 식사하는 자리였다.

그들은 그저 평소처럼 식사에 열중하며 작은 담소만을 나누고 있었다.

사방의 시선을 알 텐데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신경을 안 쓰는 것인지.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를 못하고 있었다.

몇몇 생도의 시선은 방향을 달리했다.

그 끝에는 초무하가 있었다.

네가 가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정신없이 음식을 씹어 삼키던 초무하는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그런 시선을 느끼고는 쭈뼛거렸다.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당진산을 향해 다가갔다.

겨우 한 번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지만, 그나마 저 중에서 가장 친분이 있다고 생각되었으니까.

"저, 선배님."

초무하가 조심스레 당진산을 불렀다.

"응? 왜?"

식사하던 당진산이 고개를 돌렸다.

"그··· 이런 훈련은 언제까지 해야 하나요?"

초무하만이 아닌 맹룡대 일이 년차 생도들 전부의 심정을 대변한 물음일 터.

그 물음에 함께 식사하던 칠 조 생도들은 일제히 웃음을 머금었다.

"곧 끝날걸?"

당진산이 빙그레 웃으며 답해줬다.

그 대답에 초무하보다 맹룡대 생도들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내가 전에 말했지?"

"네?"

"집에 가라."

다시 한번 들은 똑같은 말에 초무하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 훈련이 곧 끝난다는 말에 웃음이 지어질 정도면 그게 맞을 거야."

당진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건 이제 시작이거든."

이어진 말에 기괴하게 얼굴이 일그러지는 맹룡대 생도들.

"시작이라니요?"

"이런 훈련이 곧 끝나고 더 힘든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지."

"······."

초무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지? 괴물 교관님 한 분이 너희들 멱살 잡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초무하.

"그게 지금이야."

멍한 표정의 초무하.

"죽는 거보다야 지금 이렇게 죽도록 훈련하는 게 훨씬 낫지. 이게 싫으면 집에 가면 되고."

"강해지려면 그만 한 노력을 해야 해. 가만히 맹룡대에 있는다고 저절로 강해지는 게 아니야."

묵묵히 듣고만 있던 단목운뢰가 한마디 보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느새 식사를 마친 상태.

"벌써 다 먹었어? 어디 가는 거야?"

당진산은 알면서도 단목운뢰에게 물었다.

"수련."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걸음을 옮기는 단목운뢰.

초무하는 그런 단목운뢰의 뒷모습을 보았다.

당진산이 빙긋 웃으며 초무하를 바라보았다.

"너. 쟤보다 강해?"

"아니오······."

"너 앞으로의 일정은?"

"식사 후 씻고 숙소에서 쉴 예정······."

더듬더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초무하.

"쟤는 지금 뭐하러 간다고?"

"그··· 수련······."

초무하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 그거야. 그게 운뢰와 너희의 차이지. 너희는 지금 훈련도 힘들다고 언제 좀 편해지는지 궁금해하지만, 운뢰는 지금도 부족하다고 다시 수련하러 가니까."

"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순순히 현 상황을 받아들인 초무하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당장 지금부터 수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산 선배님께서도 식사 후 수련을 하러 가시는 거죠? 함께 하겠습니다!"

초무하가 우렁차게 외쳤다.

담룡각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볼 정도로.

그 말에 당진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킥."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하설란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당진산의 오늘 일정은 초무하의 본디 일정과 같았으니까.

당진산은 언무웅과의 비무 이후 지독하게 구른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근데 저런 초롱초롱한 눈의 후배라니.

곤란한 표정을 짓던 당진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자, 해. 이게 내 업보지. 수련하러 가자. 나도 식사 끝."

당진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단목운뢰는 맹룡대 칠 조 연무장에서 열심히 검을 움직였다.

팔십일식은하환상검법.

익힐수록 어려운 검법이었기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매일매일 이렇게 조금씩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성과가 있으리.

그런 마음으로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연무장에 다른 조원들도 수련하러 온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단목운뢰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남궁지후였다.

고개를 끄덕인 단목운뢰는 검을 검집에 꽂고는 남궁지후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시선에 열심히 검과 방패를 움직이는 초무하가 들어왔다.

피식 웃은 단목운뢰는 남궁지후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그가 향한 곳은 잠룡대 일 조의 연무장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연무장.

"이야기하기에는 여기가 좋을 것 같아서."

사람으로 가득한 맹룡대 칠 조 연무장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무슨 일인데?"

"일단 비무부터 한번 할까?"

검병에 손을 올리는 남궁지후.

어깨를 으쓱한 단목운뢰가 간격을 벌리고 섰다.

그리고 동시에 뽑히는 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반기 시작 후 첫 비무.

두 사람의 검은 서로를 향해 사납게 날아들었다.

챙! 채챙!

초반은 탐색전.

그것이 끝나고 이윽고 둘 모두 본격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단목운뢰는 더 이상 삼재검법을 펼치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팔십일식은하환상검법.

'이게 새로이 얻었다는 가문의 검법인 모양이군.'

남궁지후는 단목운뢰의 검에 감탄했다. 그러나 확실히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나도.'

남궁지후는 즉시 제왕검형 전반부를 펼쳤다.

생전 처음 보는 검법.

단목운뢰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제왕검형임을 알았다.

새로이 익혀야만 한다는 남궁세가의 최강의 검법.

두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검법으로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남궁지후가 조금씩 밀렸다.

그럴 수밖에.

익숙지 않은 검법이니만큼 틈이 많았고, 단목운뢰는 그 틈을 놓치는 법이 없었으니.

'이번에는.'

남궁지후는 검의 움직임을 바꿨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가르친 대로였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구결에서 느낀 바를 펼칠 차례였다.

단목운뢰는 대번에 검의 움직임이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빈틈이 점점 사라진다.'

대강 봐도 보이던 빈틈들이 점점 희미해지며 메워졌다.

단목운뢰는 더욱 집중해서 검을 휘둘렀다.

허나 이번에는 오히려 단목운뢰의 빈틈이 컸다.

이런 허점을 놓칠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남궁지후는.

그렇게 몇 초를 나누었을까.

두 사람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들었다.

다시 간격을 벌리고 마주 선 둘.

"여기까지 하지."

"그래. 여기까지."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내렸다.

"제왕검형이 문제인 거야?"

단목운뢰의 물음에 남궁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어느 쪽이야?"

"둘 다."

단목운뢰의 물음에 남궁지후가 담담히 대답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목운뢰.

"분명 비슷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러면서 또 달랐는데

"첫 번째는 아버지의 해석, 두 번째는 나의 해석."

"그런 게 가능해?"

"그러니까."

단목운뢰의 물음에 남궁지후가 답답하다는 듯 답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두 번째가 좀 더 까다로웠어."

남궁지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쯤이야 사실 펼치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하 교관님께. 구결을 모두 보여드리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어때?"

"······."

듣고 싶던 말이다.

하무백의 한 마디에 제왕검형의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답답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으니.

지금까지는 답안이 정해진 길을 걸어왔다.

적어도 방향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검형.

법이 아니고 형이라는 말에.

아버지가 제시한 길을 뒤로 하고 혼자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어렵고 두려웠다.

혹시나 잘못된 길은 아닐까?

제왕검형을 수련하면서 처음과 같은 답답함은 사라졌으나 이번에는 두려움이 찾아온 것이다.

그랬기에 남궁지후는 이정표가 필요했다.

현재 교룡관 내에서 자신에게 그런 이정표가 되어줄 사람은 하무백이 유일했다.

알고 있음에도.

그를 찾아가기 전에 마지막 확인은 하고 싶다는 심정이었다.

남궁세가 최강이자, 극비의 검법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으니.

"음··· 재밌어, 어렵지만. 결국은 내가 해야 한다면서 간간이 조금씩 가르쳐 주시는 편이랄까? 귀찮아하면서 상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네."

단목운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지후.

역시 하 교관님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무공에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하였으니.

그날 별것 아닌 듯 던진 그 한마디에 자신의 검이 이렇게 바뀌지 않았던가.

***

홀로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하무백.

하설란의 화가 언제쯤에야 풀릴까 고민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평소와 달리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것.

"쯧. 어떻게 해야 하나······."

답답한 듯 중얼거리는 그가 귀를 긁적였다.

괜스레 가려운 듯해서였다.

쪼르르.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고 꿀꺽.

단숨에 넘겼다.

앞에 놓인 튀긴 돼지고기 한 점을 입에 가져가서 씹어 삼키고는.

다시 한 잔.

튀긴 돼지고기의 느끼한 맛을 술 한 잔이 깨끗이 씻어줬다.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려던 하무백이 멈칫했다.

그의 기감에 잡힌 움직임 탓이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하무백.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자니, 움직임이 점점 가까워진다.

'설마······.'

벌써 이 정도 수준이라고?

지금 하무백은 기척을 완전히 죽이고 있었는데?

잠시 후 하무백이 느낀 움직임의 주인공이 주점에 들어섰다.

허름한 주점에 손님은 하무백 혼자.

주인공은 곧장 하무백에게로 다가왔다.

"오라버니."

하설란이다.

"여긴 어찌 알았냐?"

"그 기척이 느껴져서요."

"완전히 죽이고 있었는데?"

"실낱같이 느껴졌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라버니인데요."

그 대답에 하무백은 헛웃음을 흘렸다.

"많이 성장했구나."

하설란이 하무백 맞은편에 앉았다.

"저도 한 잔 줘요."

그 말에 하무백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마실 줄은 알고?"

"저도 어른이거든요?"

그렇게 남매는 처음으로 술잔을 나눴다.

전날의 서운함과 미안함이 한 잔 술에 실려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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