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217화 (217/312)

217화. 쓰레기들

안면이 있는 사내였다.

언가의 언무웅과 비무를 했었던 사내.

그리고 오늘 자신들을 걱정스레 바라봐 주던 사내다.

그 일행이 자신에게 말도 걸었었다.

괜찮냐고.

"당진산······."

은화량이 작게 중얼거리자 사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후배들. 내가 당진산이다. 잠깐 시간 좀 괜찮을까?"

"이제 곧 수련 시간이······."

은화량의 곁에 있던 이가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잔뜩 주눅 든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자신들이 와룡대고 상대가 맹룡대라 해도 아무짝에 의미가 없었다.

사천당가의 직계와 신진팔문의 허드렛 일꾼인 자신들이었으니.

"뭐, 그렇긴 한데. 나도 잊고 있던 내 본능이 오늘 눈을 떠서 말이야."

다섯 사람이 묘한 시선으로 당진산을 바라보았다.

"나, 성도에서 유명한 망나니거든. 크."

스스로에게 감탄한 듯 말하는 당진산의 모습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저게 감탄할 일인가?

"그러니까. 수련쯤은 가끔씩 땡땡이쳐도 된다는 거지. 어차피 후배들 수련 시간에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을 것 같은데?"

그건 당진산의 말이 맞았다.

와룡대의 수련이란, 본인이 익히고 있는 사문의 절기를 갈고 닦는 것이다.

배운 것이라고는 기본 심법이 전부인 자신들이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교관도 그 사실을 알기에 특별히 자신들에게 관여하지도 않는 듯했다.

첫날에도 그랬으니.

"그러니까. 따라와라."

"어디로······?"

"따라와 보면 알아."

당진산이 앞장섰고 다섯 사람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쭈뼛거리는 걸음걸이.

허나 거기에 관해서 당진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속도에 맞춰 걸을 뿐이다.

연무장에서 점차 멀어져 당도한 곳은 교룡관의 서쪽 담장.

"분명 여기 어디였는데······. 아, 찾았다!"

한참을 뒤적이던 당진산은 무엇인가를 옮기더니 담장 아래의 작은 구멍을 찾았다.

성인 한 명이 기어서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크기다.

개구멍.

이런 곳이 교룡관에 군데군데 있었고, 당진산은 재주도 좋게 그중 몇 곳을 알고 있었다.

"따라와."

당진산이 먼저 낑낑거리며 흙투성이가 된 채 기어나갔고, 다섯이 뒤를 따랐다.

대낮에 이런 일이라니.

"자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려면 술이라도 한잔 있어야지."

그렇게 흙투성이로 변한 이들을 이끌고 당진산이 걸음을 앞장섰다.

대로의 사람들이 힐끔거렸으나, 당진산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

묵해진은 텅 빈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음······."

작게 흘리는 침음.

그가 맡은 조는 와룡대 이십 조.

오늘이 전반기 네 번째 날인데,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한다."

당황스러웠다.

생도들의 상태를 보고 대강 짐작은 했지만, 설마 벌써 이렇게 포기할 줄이야.

철기방의 제자도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떤 사정인지는 사문에서 따로 연락받았다.

마음에 안 드는 지시였지만, 사문의 지시였기에 일단은 지켜보자 했었는데.

"난감하군."

우직하게 무공 일로 정진만 한 묵해진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도 와룡대에 들어온 아이들이니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자 결심했건만.

그새 포기를 해버렸다.

관주에게 알리자니 그건 해결책이 아니었다.

묵해진은 팔짱을 낀 채 계속해서 텅 빈 연무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교관이 하나 더 있었다.

하무백.

그의 시선이 맹룡대 칠 조에게로 향했다.

인원이 비었다.

"당진산······."

작게 중얼거리는 하무백.

다른 놈도 아니고 자신이 담당하는 생도가 훈련을 쨌다.

"이걸 어떻게 한다······."

고민 어린 눈빛.

칠 조 생도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하무백을 살폈다.

훈련을 빠진 생도는 당진산 하나가 아니었다.

연하민과 하설란도 없었다.

하무백이 당장 폭발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일지 몰랐다.

당진산은 당당하게 말했었다.

교관님이 자신을 찾으면 자율학습 하러 갔다고 말하라 했던가.

팔짱을 낀 하무백이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칠 조만의 수련이라면 딱히 상관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맹룡대 전체 훈련.

이 녀석들을 그냥 두면 다른 놈들도 훈련을 빠지기 시작할 터.

'내일 죽었다고 생각해라.'

물론 거기에는 여동생 하설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잔 술로 겨우 화해했나 싶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공은 공, 사는 사였으니.

***

"여기야?"

연하민의 물음에 하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진산이 떠난 후 연무장에서 훈련 시간을 기다리던 연하민이 갑자기 움직였다.

아무래도 자신도 가봐야겠다고.

그 말에 홀린 듯 하설란도 따라나섰다.

오전에 봤던 다섯 사람의 눈빛을 잊을 수 없는 탓이었으리라.

자신 역시 그런 눈빛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흘러가는 현실에 몸을 맡긴 자의 눈빛.

오라버니와 사부님은 모른다.

절맥증의 병세가 극에 이르렀을 때.

자신을 치료하려고 애를 쓰는 사부님의 모습을 보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홀로 남은 자신의 눈빛이 꼭 저랬다.

동경에 비쳤던 자신의 모습을 이제는 잊었다 여겼는데, 저들의 눈빛을 보는 순간 떠올라 버린 것이다.

그런 하설란이 함께한 것이 연하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사라진 당진산의 움직임을 하설란이 파악할 수 있었으니.

그녀의 기감 감지 능력에 연하민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지금 눈앞에 있는 서쪽 담장이다.

두 사람의 시선은 담장 아래로 향했다.

당진산이 지나간 개구멍.

그것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저기로 기어서 나갔다고?"

연하민이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현재 무복 차림이니 기어나가지 못할 것은 없으나 그래도 선뜻 움직여지지는 않은 탓이다.

"일단 면사부터 하자."

하설란이 품에서 면사를 꺼냈다.

연하민도 얼굴을 면사로 가렸다.

"그리고. 담은 그냥 넘어도 될 것 같아."

이어진 하설란의 말에 연하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지금은."

기감으로 주변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은근히 부러운 능력이다.

하설란이 먼저 훌쩍 뛰어올랐고, 연하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교룡관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허름한 주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그저 앞에 놓은 술잔을 기울일 뿐.

"어?"

연하민과 하설란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당진산이었다.

그녀들의 등장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피식 웃고는 옆자리를 가리켰다.

새로이 술잔 두 개가 나왔다.

술이 들어간 덕일까.

다섯 사람은 각자의 사연을 술술 이야기했다.

대동소이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연고가 없는 고아에, 본파에 있을 때는 이 정도 대접까지는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운이 없게도 교룡관으로 보내진 이들이 하나같이 인성에 문제가 있었던 터.

당진산이 팔짱을 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한다?"

다섯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그놈들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여긴 너희들의 문파가 아니라 교룡관이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교룡관의 생도들은 모두 동등해. 맹룡대는 아니었지만 뭐, 지금은 또 바뀌었으니."

"하나 확인할게. 일 조의 다섯 명. 문파 내에서 위치가 어느 정도야? 너희들을 함께 보낸 걸 보면 힘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잠자코 있던 연하민이 물었다.

"본파에 지원을 많이 하는 상인의 아들이에요, 벽이겸은."

은화량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이곳에 온 것도, 벽이겸의 아버지가 뇌정루 장로에게 부탁해서······."

연하민의 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다들 비슷비슷했다.

문파가 있는 지역 유지의 자제라던가 하는 식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진산 같은 직계 핏줄이거나 한 이는 없다는 것.

"웃기는 놈들일세."

당진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유세 떠는 꼴이 문파 내 고위직의 자제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재능이 있는 이들일 거야. 와룡대 일 조면."

"그만큼 싸가지가 없고."

하설란은 그런 이들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낼 거야?"

연하민이 깊은 눈빛으로 다섯 사람을 보며 물었다.

"방법이 없잖아요."

은화량이 우물쭈물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목소리 깊은 곳에는 작은 열망이 담겨 있었다.

방법만 있다면 이대로 있지 않겠다는.

연하민은 그것을 확인했고.

다른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방법이 있나요?"

그때 누군가 물었다.

"있다면?"

되묻는 연하민.

다섯 사람의 고개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하투제라고 알아?"

당진산의 물음에 다섯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은화량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저희에게 신경을 써 주시는 거죠?"

그것이 궁금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신들을 돕는 유일한 이들.

"뭐, 이야기 들으면 알게 되겠지만. 먼저 그 이유부터 말하자면 남 일 같지 않아서다. 병신 같았던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내가 화가 나."

거기에서부터 설명이 시작되었다.

당진산과 연하민이 번갈아 가면서.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다섯 사람 아니, 하설란까지 여섯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당진산과 연하민을 바라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당진산이,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탓이다.

당연했다.

이들 모두 당진산과 언무웅의 비무를 봤으니까.

"그··· 저희 교관님은 다른 분이신데······."

은화량의 말에 당진산이 피식 웃었다.

"내가 도와줄게. 보아하니 하민도 그럴 마음인 것 같고."

"그래도 저희가 선배님들처럼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와룡대 일 조가 재능은 뛰어난 이들인데."

"일대일로는 힘들지."

당진산이 냉정하게 평가했다. 연하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 역시 그랬으니까.

"그럼······."

"다수로 싸워야지. 검진으로."

자신들이 행했던 방법.

"검진은······."

"앞으로 수업에서 배울 거야. 검법, 권법, 신법, 검진까지. 유룡이라 이름 붙은. 아마 상당히 뛰어난 무공일 거야."

당진산이 이미 알아보고 온 듯 말했다.

"문제는 너희들이 얼마나 해내느냐지."

"만약 실패하면요?"

다른 누군가 살짝 두려움을 띤 채 물었다.

"동투제를 노려야지."

"······."

다들 말이 없다.

"본파에서 괜찮을까요?"

은화량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진산이 잠깐 생각을 한 후 대답했다.

"너희가 뛰어나다면 괜찮을 거야."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된 대답이다.

"뛰어나지 않다면요?"

"지금과 비슷하겠지."

"······."

다시 아무 말도 없었다.

침묵.

"그리고 뛰어난지 아닌지는 해보지 않으면 몰라."

연하민이 말했다.

"해보지 않으면 혹시 뛰어날지도 몰랐을 일 푼의 가능성도 포기하는 거고."

"생각 있으면 찾아와.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니까."

당진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하민과 하설란도.

당진산이 술값을 치른 후 그들은 먼저 교룡관으로 향했다.

당진산이 기어 나왔던 개구멍으로 낑낑거리며 들어갈 때.

연하민이 하설란을 바라보았다.

하설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훌쩍 뛰어올라 담장을 넘었다.

겨우겨우 구멍을 빠져나오다가 그 모습을 본 당진산이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두 사람을 가리켰다.

"너, 너, 너희··· 그래서 옷이······."

그제야 두 사람의 깔끔한 무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있을 줄 알고 그렇게 교룡관 담을······."

당진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었어."

하설란이 짧게 답하고는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당진산이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왔냐?"

하무백이 빙긋 웃으며 세 사람을 맞았다.

그 웃음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당진산이 앞장서서 자리를 찾아가려 하는 찰나.

검과 방패가 그들에게 날아왔다.

겨우겨우 받아 든 세 사람.

"너희는 그거 들고 달린다."

하무백의 짧은 말.

커다란 방패와 무거운 검.

당진산은 주섬주섬 검과 방패를 등에 멨다.

그 순간 하무백의 지풍이 세 사람의 내공을 금제했다.

"이건 안 풀리는 거다."

그 말대로다.

삼재심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달려."

하무백의 호령에 세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훈련하는 생도들은 그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그들.

이 정도라면 다음 훈련을 빠져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이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한 시진 후 그들은 그런 생각을 지웠다.

당연했다.

아직도 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두 눈은 이미 풀려 있었다.

그럼에도 교관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교관이 그들에게 호령을 내릴 때는 그들이 멈췄을 때뿐.

세 사람은 이제 걷고 있었다.

달리려 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두 시진 내내 쉬지 않고 저 무거운 걸 짊어지고 달렸으니.

단순하지만 무서웠다.

훈련이 끝이 났다.

맹룡대 생도들은 해산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달리는 이들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여전히 걸으며 달렸다.

하무백이 팔짱을 끼고 차가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단으로 훈련을 빠진 것에 대한 처벌은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훈련을 마친 생도들이 담룡각에서 석식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도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몇몇은 호기심에 어둠이 내린 밤에 슬적슬쩍 나와보았다.

그때도 달리고 있었다.

해정(玄正, 밤 10시경).

그제야 하무백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 순간 그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칠 조의 훈련이 아니라, 맹룡대 전체의 훈련이다. 무슨 오지랖을 부리고 왔는지 모르겠다만. 빠질 때는 이만한 각오는 해둬라."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헉헉헉. 이거 손해가 막심인데······. 헉. 헉. 헉."

당진산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난 도와줄 거야······."

거친 숨 가운데 조용히 흘러나오는 연하민의 말.

그녀가 대체 왜 그들에게 저리 관심을 가지는지 당진산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연하민은 연무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연하민의 눈에 자신의 과거들이 주르륵 흘러가 보이는 듯했다.

연가에서 당했던 설움들.

기분 나쁜 시선들.

자신이 연가의 핏줄이 아니라서.

그리고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인이라 겪었던 오욕의 시간.

그 시간이 다섯 사람에게 투영되었다.

'쓰레기들.'

연가의 사람들과 와룡대 일 조 생도들을 떠올리자 바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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