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218화 (218/312)

218화. 생각보다 뻔뻔하구나

"후우."

남궁지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렸다.

단목운뢰와의 비무 후, 남궁지후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제왕검형의 수련을 중단했다.

대신 자신이 해석한 대로 수련을 시작했다.

이게 맞을까란 막막함과 두려움이 있었으나, 적어도 검을 휘두를 때 본능적인 저항감은 사라졌으니.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본 남궁지후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대연무장이 있는 방향이다.

"내일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홀로 나직이 중얼거릴 때.

"그럴 필요 없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남궁지후는 화들짝 놀랐다.

이 교관은 항시 이렇게 귀신처럼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남궁지후는 애써 태연한 척 하무백을 맞았다.

하무백은 품에서 필사된 비급을 꺼냈다.

남궁지후가 정성을 다해서 쓴 제왕검형의 전반부.

"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나한테 맡긴 거냐?"

"강해지고 싶습니다."

하무백의 대답에 남궁지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가주가 되고 싶습니다."

솔직한 대답.

남궁지후의 두 눈은 가주에 대한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왜?"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니까요."

"누구에게?"

무표정한 얼굴의 하무백이 물음을 계속 이어갔다.

"······."

남궁지후의 대답이 처음으로 막혔다.

하무백은 그저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요."

희미하게 흘러나온 대답.

작은 목소리였지만 남궁지후의 진심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하무백이 그런 남궁지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궁지후는 그런 하무백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인정이라는 거 꼭 받아야 하는 거냐? 가문의 비전절기를 타인에게 맡기면서까지?"

하무백은 아직 제왕검형을 펼쳐보지 않았다.

타 문파의 비전절기 비급을 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받았으나 그대로 둔 것이다.

첫 장을 넘기게 되더라도 그 사연을 알고 넘기자는 생각에.

"아들이니까요."

굳은 의지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 의지라는 것은.

자신이 분명히 아버지의 아들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무백은 그 의지를 읽었다.

'하긴. 제 녀석도 모를 수가 없겠지.'

분명 세가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알게 모르게 들었으리라.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스스로 아비의 아들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 아비의 차가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모자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 혼자 되뇌며.

"아버지와 다른 방식의 제왕검형을 펼쳐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강자존(强者尊). 제왕검형은 미완성의 검공입니다. 아니, 끊임없이 강해져야만 하는 검공이지요. 그것을 더 강하게 한 걸음 내딛었다면 인정하실 겁니다."

"미완성?"

"네. 후반부를 보지 못했지만, 전반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구결에 그 의지가 담겨 있으니까요."

"외인의 도움을 받더라도 강해지기만 하면 된다?"

하무백이 다시 물었다.

"······."

남궁지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외인이 아니십니다."

하무백이 눈을 치켜떴다. 이건 또 무슨 신기한 개소리인가 하는 눈빛이다.

"교관님이시지요."

"너는 잠룡대고, 나는 맹룡대다."

"저는 교룡관의 생도고, 교관님은 교룡관의 교관이시죠."

하무백의 말에 남궁지후는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실제로 제게 가르침을 주시기도 하셨고요. 스승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무백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남궁지후를 바라보았다.

"너. 생각보다 뻔뻔하구나."

하무백의 솔직한 말에도 남궁지후는 변화가 없었다.

그 정도로 간절한 것이다.

거기엔 아비의 인정을 향한 간절한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마음이 숨어 있었다.

하무백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무언가 절박하고 치열하면서··· 뜨거운······. 뜨거운?'

하무백 역시 그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가슴 한켠에 품고 있었고.

그것은.

'복수.'

살고 있던 마을을 유린하고 부모님을 죽인 마교과 혈교 새끼들에 대한 복수.

어리디 어린 동생의 삶을 시궁창에 처박아 버린 혈교과 마교 새끼들에 대한 복수.

그 복수심이었다.

다시 남궁지후를 바라보았다.

분명했다.

인정에 대한 욕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어쩌면 자세히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이제 설명이 됐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외인에게 세가의 비전절기를 은밀히 보여주는 것 정도야.

상대가 세가주이니 능히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타오르는 거냐?"

잠시 말이 없던 하무백이 던진 질문.

그 물음에 남궁지후가 흠칫한 기색을 보였다.

"네 녀석에게 중요한 건 가문이 아니로군."

확신하는 듯한 그 말에 남궁지후는 하무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

그 눈빛을 마주하며 하무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젠가.

어디선가.

접했던 것만 같은 눈빛이었으니.

"알려주마."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복수를 향한 저 절박함이 하무백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무백 역시 모르는 감정이 아니었기에.

천천히 비급의 첫 장을 넘겼다.

사라락. 사라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울렸다.

일 각.

하무백이 제왕검형 전반부의 비급을 한 번 살피는 데 소모한 시간이다.

그야말로 그냥 책장을 천천히 넘기기만 했던 시간.

그 모습에 남궁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강 비급의 개괄적인 내용만 살피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자세히 살피는 것은 돌아가서 할 모양이시네.'

그리 결론을 내렸는데.

"네 녀석 말대로군. 이건 씨앗이야."

남궁지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지금 남궁세가주가 익힌 제왕검형은 잘못된 방향으로 줄기를 뻗은 것이고."

지난 전쟁에서 하무백이 보았던 제왕검형.

그리고 지금 보는 비급.

그 두 가지를 종합해 보니, 왜 현재 남궁세가가 천하제일세가의 위명을 호북연가에게 빼앗겼는지 알 것 같았다.

잘못된 방향으로 줄기를 뻗고 뿌리를 내렸기에 남궁세가는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대연검법."

"네?"

하무백의 나직한 말에 남궁지후가 되물었다.

"대연검법을 완성하는 게 먼저다."

씨앗이 뿌리내리고 줄기가 곧게 자라기 위해서는 단단한 토양과 양분이 필요한 법.

하무백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바로 남궁세가의 기초 검공이라는 대연검법이었다.

그리고 창궁무애검 또한.

"그거라면 이미······."

얼떨떨해하는 남궁지후의 말에 하무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봐 둬라."

하무백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휘둘렀다.

지극히 간단한 움직임이다.

남궁지후도 알고 있는 초식.

당연했다.

삼재검법 이었으니까.

그러나 남궁지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검 일검에 담긴 거대한 힘을 느꼈으니까.

단순한 움직임이지만, 자신은 도저히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불가해한 변화가 담겨 있었으니까.

"나도 아직 이건 완성하지 못했어."

하무백의 한 마디에 남궁지후는 둔중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엄청난 경지의 삼재검법인데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말하다니.

"십이 성 극성을 이루었다는 게 곧 완성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의미가 담긴 가르침이었다.

"대연검법 전에 삼재검법부터 한번 돌아봐. 휴관기 동안 좀 수련해 본 모양이니."

"······."

"그 절박함. 나 또한 모르지는 않으니. 그래도 경거망동은 하지 마라."

그 말을 남기고 하무백은 연무장을 떠났다.

저벅저벅.

하무백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으나, 남궁지후는 아직 충격에 헤어나지 못한 듯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괴짜인 줄로만 알았던 교관이건만.

지금은 그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인의 일부를 본 듯했다.

***

하설란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누워있었다.

당진산은 숙소로 돌아갔다.

연하민도 돌아갔다.

그녀가 함께 가자 했지만, 하설란은 이렇게 좀 더 있고 싶었다.

대연무장의 흙바닥.

등과 허리가 아플 법도 했지만 하설란은 마냥 좋았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당장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몸을 혹사한 것은.

"왔어요?"

옆에 풀썩 주저앉는 하무백을 힐끔 보는 하설란.

"무슨 일이냐?"

"네?"

"와룡대 녀석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아."

역시 오라버니의 기감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

"사연이 있더라고요. 절망에 빠진 사연이. 제가 절망에 빠졌을 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어서."

"······."

돌아온 대답에 하무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자신은 동생을 곁을 지키기는커녕 복수에 미쳐서 피를 뒤집어쓰며 강호를 종횡무진했다.

"미안하다."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

"오라버니 덕에, 사부님 덕에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는걸요."

하설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덕분에 지금 이런 상쾌함도 느끼는 거고요. 탈진할 때까지 몸을 혹사한다는 느낌. 처음이에요. 상쾌하네요."

달리는 내내 하무백은 하설란의 몸 상태를 살폈었다.

그녀가 감당해내고 있었기에 해정까지 계속해서 달리게 한 것이다.

건강해졌다.

동생은.

"저도 사부님과 오라버니처럼 누군가의 눈에서 부조리한 절망을 거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와룡대 이십 조의 사연이 하설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아.'

그중 하무백의 귀를 사로잡은 말이다.

절망이라 함은 아마 저 부분도 컸으리라.

"쉽지 않을 거다. 무리하지 말고. 어려우면 찾아와라."

하무백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아직 춥다. 감기 걸릴라."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연무장을 떠났다.

하설란이 바닥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멀어져 가는 하무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부모님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의 첫 장은.

사부를 만나기 전.

오라버니가 자신을 품에 안고 강호를 유리걸식하던 시절이었다.

당장 자신이 먹을 것이 없음에도 하설란 자신만을 챙겼던 오라버니.

혈육을 버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던 지옥 같던 그 시절에.

오라버니는 자신만을 돌보았으니.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안다.

***

이른 아침.

맹룡대 칠 조 연무장에서의 심법 수련.

당진산과 연하민은 더욱 열심히 심법 삼매경에 빠졌다.

간밤에 자기 전에도 심법 운공을 열심히 했었고.

그 덕에 근육통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데 조금 거슬리는 정도?

그건 하설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학당으로 향했다.

오늘 수업은 '검법의 시작'.

교실로 들어서자 당진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듯.

"없네."

작게 중얼거린 그.

오늘 수업에는 와룡대 일 조도, 이십 조도 없었다.

수업의 내용은 예상대로 유룡검법이었다.

어제 신법을 배우면서 느낀 대로 과연 훌륭한 무공이다.

대체 교룡관에서 누가 이런 무공을 만든 것일까.

당진산은 더욱 집중해서 수업을 들었다.

그것은 연하민 역시 마찬가지.

두 사람의 계획에 있어 유룡검법은 정말 중요한 무공이었기에 집중도를 최고조로 유지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자.

당진산이 가장 먼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학당 앞의 정원.

그곳에 볼일이 있었다.

다른 맹룡대 생도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당진산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으니.

연하민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을 만나는 건 오늘 석식 시간 이후에나 가능할 터.

무엇이 저리 바쁜 것일까.

그렇게 정원으로 나와 당진산을 찾으니.

그는 다섯 명의 생도 앞에서 팔짱을 끼고는 당당한 표정으로 피식 웃고 있었다.

"뭐야?"

벽이겸이 당진산을 알아보고는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당진산이 그런 벽이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내가 입이 심심해서 그러는데, 담룡각 가서 닭튀김 좀 가져와라. 목 막히지 않게 시원한 물이랑 같이."

그 말에 벽이겸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씨발. 뭐라 지껄이는 거야? 맹룡대 생도 주제에. 무슨 다른 생도에게 심부름시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기세를 잡겠다는 듯.

"이 년차가 일 년차에게 심부름 좀 시키겠다는데, 같잖은 게 반항이냐?"

당진산이 벽이겸을 노려보았다.

시선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우우."

벽이겸이 기세에서 밀렸다.

정확히는 언무웅과의 비무에서 보여주었던 당진산의 실력에 밀린 것이다.

부딪혀봐야 자신의 손해인 게 뻔히 보인 탓.

벽이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씨발. 교룡관에서 생도와 생도는 동등하다며! 소속이나 연차에 상관없이!"

다른 생도들이 들으라는 듯 외쳤다.

자신이 이리 당하면 너희들도 이 새끼한테 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의도.

당진산이 피식 웃었다.

"너도 어제 다른 생도한테 심부름시키더니만?"

"아,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뭐가?"

"그 새끼들은 우리······."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다급히 다른 일 조 생도가 벽이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이상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알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들이 대놓고 떠들어 버리면 문제가 될 테니.

벽이겸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는 분한 얼굴로 당진산을 노려보았다.

"너. 나랑 내기 하나 할래?"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벽이겸을 바라보던 당진산이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