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미안해
이른 새벽 연무장.
연하민 그리고 낙우진.
두 사람의 검이 빠르고 유려하게 움직였다.
현재 두 사람이 수련하고 있는 검법은 유룡검법.
삼재심법을 기반으로 검법을 펼치고 있었으나 아무런 어색함이 없었다.
정말 심법을 가리지 않는 무공이었다.
유룡권법도 유룡신법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특별한 무공이 없었던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유룡공을 익혔다.
와룡대 일 년차 이십 조를 돕는 한편, 자신들의 무공도 갈고 닦을 겸 해서였다.
유룡검법을 익히는 것은 맹룡대 칠 조의 다른 세 사람은 물론 주우명와 하설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와룡대 이십 조를 돕기로 한 이상, 이십 조가 사용할 무공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로 대련을 하며 유룡공의 장단점을 확인했다.
실전에서 어찌 쓰일지도.
그 와중에 연하민은 하투제의 전략도 생각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두 달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지나가고도 남을 짧은 시간.
할 일은 많고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하투제는 올해도 목란산에서 열릴 거야."
잠깐 숨을 돌리며 쉬는 시간 연하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투제는 매년 같은 장소에서 열렸으니 당연한 추론이었다.
"그런 만큼 작년 우리처럼 한 달 정도 그곳에서 미리 훈련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맹룡대의 단체 훈련 때문이었다.
"대신에 휴식일마다 근처 산으로 가서 유격전 훈련을 할 거야. 지형은 최대한 우리가 익힌 부분을 설명해주고."
연하민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진으로 한 명을 상대하는 훈련 역시 할 거고."
연하민의 시선이 주우명, 백리평, 단목운뢰에게로 향했다.
현재 이들 중 가장 강력한 무위를 보이는 이들이었다.
"문제는 그 녀석들이 사용할 무공을 모른다는 거야. 뇌정루, 철기방, 대해문, 빙천궁, 천검파. 이 중에서 뇌정루와 철기방, 천검파의 무공은 동투제에서 보기는 했는데······."
"빙천궁의 무공이라면 내가 도와줄게."
갑자기 들려온 한설빙의 목소리에 생도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네?"
깜짝 놀란 연하민.
그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었다.
"궁을 오래 떠나 있기는 했는데, 저렇게 변한 줄은 몰랐다. 탁가 인간들 마음에 안 들어서라도 내가 좀 도와줄게."
탁가.
탁무전을 말함이리라.
그렇게 한설빙까지 참여하여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고 수련을 이어 갔다.
유룡검법, 권법, 신법에 더해 검진까지.
몇 번에 걸쳐 수련과 비무를 하고 점검을 했다.
오전 수업 시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맹룡대 훈련.
그리고 석식 시간 후.
제법 길어진 해 덕택에 아직 어스름만 내린 시간.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에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검진 수련에 들어갈 거야."
연하민이 담담히 말했다.
초췌한 얼굴의 다섯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야말로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수련을 하는 중이었으니.
"연습은 하고 왔지?"
연하민의 물음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검을 뽑아 들고 검진을 만들고 섰다.
방패는 없었다.
유룡검진은 검만 가지고 펼쳤기에.
그 부분이 아쉬웠다.
이들이라면 방패술도 큰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거기까지 연습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럼 내가 먼저 간다!"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백리평이었다.
와룡대 생도 다섯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평이 허공에 발을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챙!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백리평의 검을 막는 와룡대 생도들.
백리평은 그 움직임을 살피면서 검을 움직였다.
일단 이들의 검진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기에 백리평은 막기 쉬운 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백리평 역시 유룡검진을 익혔기에.
한동안 검진의 움직임에 맞춰서 검을 휘둘러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검진의 움직임이 백리평의 검에 익숙해졌을 무렵.
"진짜로 간다!"
백리평의 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천성검법이 제대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검법의 전개 속도를 두 배로 높인 천성검법.
갑자기 사방에서 짓쳐 드는 검에 와룡대 생도들의 검이 어지러워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 검진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마!"
검을 휘두르면서 백리평이 외쳤다.
이제는 두 배 빠른 천성검법을 펼치면서도 주변을 살펴 소리를 칠 정도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백리평의 외침에 와룡대 생도들은 이를 악물고 검진을 펼쳤다.
그러나 한계는 금세 드러났다.
"으윽."
가장 먼저 탈락한 이는 심철산이었다.
하나가 무너지자.
검진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영후인, 임대치, 은화량, 나중천의 순서대로 백리평에게 일격을 허용하고 쓰러졌다.
"다음은 나."
단목운뢰가 나섰다.
그가 사용하는 검법은 유룡검법이었다.
단목세가의 검법은 아직 실전에서 사용할 정도까지 다듬지 못한 탓이었다.
오히려 유룡검법의 성취가 훨씬 빨랐다.
단목운뢰로서도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렇게 검진을 향해 검을 떨치는 단목운뢰.
백리평을 상대하면서 잔뜩 지친 와룡대 생도들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집요하게 검진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단목운뢰의 공격에 이들은 반의 반각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쉴 틈 없어."
연하민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나선 이는 주우명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태극혜검이 펼쳐졌고, 와룡대 생도들은 십 초도 버티지 못했다.
"헉···헉헉······."
"아아."
"크헉. 헉헉."
바닥에 널브러져 거친 숨을 토해내는 이들.
"여기 세 사람을 상대로 최소 반 각은 버텨야 해."
연하민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수련에 임하는 동안.
와룡대 일 조의 생도들은 교룡관 밖의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놈들 죽어라 수련한다던데?"
탁무전이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봐야 쓰레기는 쓰레기야."
벽이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기루로 가자니까."
철령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러다가 또 지난번처럼 교룡관 문 닫힌 다음에 나오려고?"
공구패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때 상당히 곤혹스럽지 않았던가.
교룡관에서의 한 달은 이들끼리 상당한 친분을 쌓게 했다.
그 방향이 이런 쪽이라서 문제였지만.
이들은 딱히 이십 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같은 교룡관 와룡대라 하나, 그 수준이 자신들에 미치지 못했으니.
그만큼 재능만은 확실한 이들이었기에, 지금은 그 재능에 잔뜩 취해 있었다.
마치 일 년 전 잠룡대 일 조처럼.
그나마 그들은 남궁지후와 남궁지유가 중심을 잡았기에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올해의 와룡대 일 조는 정말로 유유상종이라 할 이들로 모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마다 술판을 벌였으니.
이들이 술을 마시는 객잔의 다른 식탁.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한설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녀석들이 뭐 하나 살피다 보니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관이었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한설빙은 객잔을 나섰다.
그때, 그녀의 뒷모습을 철령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좋은데?'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인이었으나 음욕이 동할 만한 모습이었다.
당장 일어나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동료들이 있었다.
아쉬웠다.
교룡관이라는 곳.
그에게는 맞지 않았다.
역시 철기방이 좋았다.
마음대로 행할 수 있었던.
객잔 밖으로 나온 한설빙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개새끼들 사이에 개잡종 새끼가 하나 섞여 있군.'
저놈은 하투제 이후 자신이 제대로 족쳐야겠다 마음먹었다.
일단 그때까지는 저놈들은 와룡대 이십 조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화를 삭이며 한설빙이 연무장 근처에 도착하자.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에서는 아직도 수련하는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딜 그리 돌아다녀?"
하무백의 물음.
"신경은 쓰고 계신 모양이네요?"
한설빙이 하무백이 있는 곳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그냥저냥 노는 꼴이 재미나서."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와룡대 이십 조에 관한 일에는 일절 나서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그놈들 그러고 놀고 있다고 우습게 보면 큰코다칠 수도 있다."
하무백의 말에 한설빙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딴 놈들이요?"
"그래도 가진 실력들이 만만치가 않아. 올해 들어온 녀석들은. 언무웅이라는 녀석도 그렇고. 내가 박살을 낸 운도헌이라는 녀석도 그렇고. 싹수는 노란데, 실력은 있으니. 정말 신기한 노릇이지."
거기까지 말한 하무백이 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은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을 등지는 쪽.
"어디 가세요?"
한설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잠깐 봐줘야 할 곳이 있어서."
짧게 대꾸하는 하무백의 신형이 곧 사라졌다.
***
휘잉. 쌩.
검이 지나가며 파공성이 울렸다.
달빛을 받은 검이 어둠을 가르며 현묘한 기운을 흩뿌렸다.
대연검법.
남궁세가의 기초검법이건만 그 움직임은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남궁지유는 놀랍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가에서 본 적이 없는 검법이었다.
분명 대연검법이 맞는데, 저런 대연검법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는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언제 온 것일까?
하무백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제법. 대강 기초는 잡혔군."
남궁지유는 그 말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저 엄청난 대연검법을 보고 기초가 잡혔다니.
그 사이 대연검법을 모두 펼친 남궁지후가 호흡을 진정시켰다.
"오셨습니까?"
남궁지후가 하무백을 향해 꾸벅 고래를 숙였다.
"그래. 이제 제왕검형을 한 번 펼쳐봐. 그간 간질간질한 거 참느라 죽을 것 같았지?"
하무백의 말에 남궁지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말대로였다.
삼재검법과 대연검법을 수련하는 내내.
제왕검형의 구결이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간지럽혔다.
어서 자신을 펼쳐보라고.
그런데도 남궁지후는 꾸준히 삼재검법과 대연검법만을 수련했다.
창궁무애검조차 수련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나아갈 때가 되면 하무백이 알려주리라 믿으며.
남궁지후는 기수식을 취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첫 구결에 따라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아!"
그 모습에 남궁지유가 자신도 모르게 경탄성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일찍이 본 적이 없던 검의 움직임이 펼쳐졌으니까.
쩌저적.
검술을 펼치는 남궁지후의 귓가에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첫 번째 움직임.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내부에 있는 씨앗에 금이 갔음을 느꼈다.
싹을 틔우기 위해 씨앗이 갈라지고 있었다.
일 검, 이 검.
검을 움직일 때마다 씨앗의 균열은 점점 커졌다.
전반부를 모두 펼쳤을 때.
결국, 작은 싹이 돋아났음을 남궁지후는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하무백은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 기운은?'
익숙한 듯 낯익은. 그러나 뭔가 다른 듯 낯선 기운.
그것이 남궁지후가 펼치는 제왕검형에서 느껴졌다.
일찍이 다른 이들이 펼치는 제왕검형에서는 느낀 적이 없는 기운이었다.
달랐다.
분명 제왕검형이 맞는데, 제왕검형이 아니었다.
새로운 제왕검형.
그것이 지금 남궁지후의 손끝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급만 보아서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기운과 모습.
하무백은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검형. 그래 검형인 거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하무백.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면서 쉬어가려던 교룡관에서 재미난 일들이 자꾸 생기고 있었다.
"후우우우······."
깊고 긴 호흡이 남궁지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고작 제왕검형 전반부를 한 번 펼쳤을 뿐인데.
"어땠어?"
"싹을 틔운 것 같습니다."
하무백의 물음에 흥분을 애써 억누르며 답하는 남궁지후.
"제왕검형이 씨앗이라 하신 연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남궁지후의 두 눈에는 하무백을 향한 존경이 가득 담겨있었다.
겪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연검법만이 아니야. 창궁무애검도 마찬가지다. 두 검법이 결국은 씨앗을 위한 거름이니. 계속 더 수련해봐라. 제왕검형에만 얽매이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잠룡대 일 조의 연무장을 떠났다.
남궁 남매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남궁지유가 속삭이듯 말했다.
"응?"
"제왕검형의 비급을 하 교관님께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 미친 짓이라고 반대한 거."
누이의 말에 남궁지후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반대에도 기어코 비급을 전한 자신이었고.
결국 자신의 판단이 옳았기에.
무공의 성과가 고작 한 달여 만에 나타난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 제왕검형을 아버지가 인정하실까?"
"더 강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제왕검형이란 완성된 검법이 아니라 완성해 가야 하는 검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