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일단 먹자
당진산은 구령에 맞춰 검과 방패를 움직였다.
그저 기관이 작동하는 듯, 구령에만 반응하는 움직임.
두 눈은 다른 생각으로 잠겨 있었다.
하무백이 있었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맹룡대 교관들이 돌아가면서 훈련을 진행 중.
그랬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공. 내공이 문제야.'
와룡대 이십 조 녀석들과 함께 수련하면서 느꼈다.
내공심법이 다른 만큼 내공이 쌓이는 양이 달랐다.
자신들은 교관님이 씨앗을 심어주어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반전이 가능했었다.
그게 평범한 삼재심법이었을지라도.
그런데 신진팔문의 기초 심법을 제각각 익힌 와룡대 이십 조 녀석들은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느렸다.
이대로는 상대가 압도적인 내공으로 찍어 눌러 버리면.
'검진이 뚫린다!'
실제로 자신들도 남궁지후의 검격에 탈락자가 나왔으니까.
최대한 생존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할 테지만, 후기지수가 모인 와룡대 일 조나 잠룡대 일 조와 조우하는 경우도 상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당진산에게도 방법이 없었다.
지금 와룡대 녀석들은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훈련 중이었으니까.
하루 한 시진은 자고 있을까?
그 외의 시간은 수련과 운공이었다.
이 이상으로 내공을 쌓을 방법이 당진산에게는 없었다.
'마녀에게 영단 좀 보내달라고 해볼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떠올릴 정도였다.
얼마나 집중했을까.
당진산은 멀리 학당 건물의 지붕에 오른 하무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럭저럭 훈련이 끝나고.
저마다 지친 몸으로 담룡각으로 향했다.
당진산 역시 그런 사람들의 흐름에 합류하려 했으나.
앞을 막은 사람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교··· 관님?"
하무백이었다.
"잠깐 술 한잔할까?"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하무백은 걸음을 옮겼고, 당진산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의 시선이 당진산의 등에 머물렀다.
무슨 일인가 하는 궁금함을 가득 담고서.
하무백은 늘상 가는 허름한 주점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당진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오늘도 주점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식전이었기에 식사도 될 만한 것들.
식탁 위에 놓이는 술병의 입구에서 전해지는 향에 당진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엽청주.
'늘 싸구려 화주만 마셨는데?'
이름 그대로 대나무 잎과 여러 약재들을 넣어 만든 술이 죽엽청주다.
상당한 고급술이다.
당진산이 사천에서 성도화화공자라 불리며 유흥가에서 살 때 즐겨 마시던 술이기도 했다.
그 맛을 알기에 금세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하무백은 아무 말 없이 잔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채워 한번에 비웠다.
그 모습에 당진산도 자신의 잔을 단번에 비웠다.
달달하면서도 화끈한 맛, 그리고 대나무 향이 목과 코를 가득 채웠다.
"크으. 좋아."
오랜만에 마신 덕일까.
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
하무백이 그런 당진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진산은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랬냐?"
묵직하게 흘러나온 물음.
"네?"
너무 짧은 물음이었기에,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당진산은 되물을 수밖에.
"내기."
다시 이어진 짧은 말.
그러나 의도는 알 수 있었다.
왜 와룡대 일 조에게 내기를 제안했으냐 하는 물음이다.
할 말은 많았다.
머릿속에 무수한 말이 흘러 지나갔다.
자신들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이건 대문파의 부조리다.
그대로 두면 다른 문파들도 저런 편법을 쓸 것이다.
자신들이 와룡대 일 조에 직접 손을 쓰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다.
등등.
그러나 당진산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짧았다.
"그랬어야 하니까요."
"다른 조원들의 의사는?"
곧장 이어진 물음.
그 질문에 당진산은 흠칫했다.
그럴 수밖에.
그러잖아도 그 부분은 내기를 한 날 당장 문제였으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동료들은 당진산의 결정을 존중해주었지만, 자신이 경솔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와룡대 일 조의 행태에 다같이 분노하기는 했지만.
연하민을 제외한 다른 조원들과는 사전에 상의가 없었으니.
"그러라고 조장을 시킨 건 아닌데."
쪼르륵.
잔에 술을 채우며 말하는 하무백.
이번에도 당진산의 잔을 채워 주었다.
"네 결정에 이제 칠 조의 후반기가 내기의 대상으로 올라간 거야. 이기면 된다지만."
꿀꺽.
잔을 다시 한번 비우는 하무백.
"할 수 있을 것 같나?"
당진산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술잔만 바라보는 당진산.
이 물음에는 쉬이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기를 제안할 때만 해도 자신이 있었는데.
그랬는데.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다.
구 할은 자신이 있는데, 나머지 일 할이 문제다.
내공.
그것 때문에.
차라리 자신이 나서서 그놈들 쓸어버리는 게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못난 놈."
대답하지 못하는 당진산에게 던져진 하무백의 평가.
당진산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그 녀석들이 그런 행패를 부리고 있는데. 그 아이들을 어떻게 그냥 두냐고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 당진산.
"네놈들이 갈 곳은 산월마림이야."
뜬금없이 흘러가는 이야기.
"십 할의 확신이 없는 일에 조원들의 생명을 걸게 될 수도 있다."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 다르고 말고. 그런데 이런 작은 일에도 앞뒤 생각 없이 그렇게 질러 버리면, 다른 일은 어떨지······."
"생각 없이 지른 것은 아닙니다만."
하무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머리를 굴리긴 했던데. 좀 전의 내 물음에 너는 대답을 했던가?"
"······."
다시 입을 다무는 당진산.
답답한 듯 눈앞의 잔을 비우고는 스스로 잔을 채웠다.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몇 놓여 있으나, 술에만 손이 간다.
"내공."
짧은 하무백의 말.
막 술잔을 향해 다시 손을 뻗던 당진산이 흠칫했다.
"답이 안 나오지?"
손을 슬그머니 내리는 당진산.
그 사이 하무백이 한 잔을 마셨다.
"만에 하나 와룡대 일 조를 만났을 때 내공에서 밀려 패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당진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는 당진산.
"왜 안 찾아왔냐?"
그런 당진산에게 다시 묻는 하무백.
지금까지의 추궁과는 달랐다.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한 잔 술이 하무백의 목으로 넘어갔다.
"똥을 쌌으면 치워야 하고, 못 치울 것 같으면 도와달라고 해야지."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당진산.
"왜? 내가 한 교관처럼 먼저 나서서 도와준다고 할 줄 알았나?"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당진산이다.
"감당할 수 없게 일이 벌어졌을 때는,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 도와주실지 몰라서······."
갑자기 기세가 확 꺾인 당진산이다.
그 대답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자신을 뭐로 보고 저러는 걸까.
"귀찮아할 것 같아서······."
눈살을 찌푸리는 하무백.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자신의 생도들이 싸놓은 똥을 치우는 걸 외면하지는 않을 터.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하무백의 물음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당진산.
하무백이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식탁 위에 툭 놓았다.
"운도 좋은 녀석. 동료들이 착해서 망정이지. 조장이라는 놈이 독단으로 조원들을 내기에 올려놓고. 잘하는 짓이다."
"이건······."
조심스레 묻는 당진산.
"열어봐라."
목함을 여니 거무튀튀한 단환 다섯이 있었다.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는 당진산.
저 끔찍한 것이.
저 귀한 것이.
"네 녀석들이 먹은 거랑은 달라. 더 맛없고, 효과는 반절 정도일 거다."
하무백을 바라보는 당진산.
"그래도 하투제에 필요한 정도의 내공은 만들어 줄 테지."
"···가,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진심을 다해 감사를 전했다.
"네놈이 이뻐서 주는 거 아니다. 다른 조원들이 불쌍해서 주는 거지."
마지막 잔을 비운 하무백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이번 일 끝나고 대가는 치러야 할 거야."
마지막 말을 끝으로 셈을 치르고 주점을 떠난 하무백.
자리에는 목함과 함께 당진산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하, 하하하······."
긴장한 웃음이 당진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굳어 있었을까?
그제야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취기도 살짝.
내공을 일으켜 취기를 날린 당진산이 오리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 먹자."
***
연무장에 갖가지 장애물들이 세워졌다.
정말 이리저리 꼬아버린 길.
연하민이 만족스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략은 잘 숙지하고 있지?"
"최대한 오래 생존이요."
은화량이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연하민.
"그러면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잠입, 매복, 은신."
심철산이 짧게 답했고.
연하민은 다시 한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법이야."
그러 면서 장애물을 바라보는 그녀.
"목란산의 산세는 제법 험해. 전력으로 달릴 수 있는 곧은 길이 드물고, 여기처럼 급격한 방향 전환과 회피를 반복해야 하는 길이 대부분이지."
"도주를 상정하는 건가요?"
영후인이 물었다.
"도주에 유인까지."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와룡대 이십 조의 생도들.
"그러니까. 유룡신법을 펼쳐서 전력으로 달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빙긋 웃는 연하민.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아니, 어울리던가.
"우리가 쫓을 거야. 잡히면 알지?"
아름다운 얼굴에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하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그럼, 시작."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 생도는 전력으로 신법을 펼쳤다.
지금까지 함께 수련했기에, 어찌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달리라 하면 전력을 다해 달린다.
잠시 후 그 뒤를 연하민, 백리평, 단목운뢰, 낙우진, 주우명이 쫓았다.
하설란은 한쪽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교대하기 위해 대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당진산이 나타났다.
맹룡대 생도들의 시선이 힐끔 그를 향했다가, 이내 다시 전력으로 달렸다.
그 모습에 당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법 수련에 대한 내용은 미리 의논했던 것이니.
잠시 후.
"잠깐. 쉬자."
당진산의 외침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 와룡대 생도들은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었어?"
제법 거친 호흡을 고르며 맹룡대 생도들이 모였다.
하무백과 함께 나갔었으니 궁금할 수밖에.
"이걸 주시더라."
앞뒤 다 떼고 가장 중요한 것만 내보였다.
목함이 열리자마자.
네 사람이 아연실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뭔데 그래?"
주우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곱게 놓인 다섯 개의 단환.
색이나 냄새가 무언가 가까이하면 안 될 느낌이었다.
"이게 뭔데?"
무언가 께름직한 얼굴로 묻는 주우명.
그사이 다가온 하설란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는 냄새가 살짝 달랐던 탓이다.
"좋은 거."
당진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을 본 칠 조의 네 사람.
그들의 얼굴에도 비슷한 웃음이 떠올랐다.
"귀한 거야."
백리평이 말했다.
"다섯 개밖에 없는 게 아쉽네. 너도 하나 먹으면 좋은데."
당진산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주우명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거절할게."
"진짜 좋은 건데······."
하설란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는 정말 진심이 담겨 있었기에 살짝 마음이 동했으나, 주우명은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칠 조 녀석들의 표정이 영 수상한 탓이다.
"효과가 절반이라고 하시더라."
당진산이 덧붙인 말.
"그래도 그 정도면 내공 문제는 해결되겠네."
연하민이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그녀 역시 내공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해결 방법도 고심했으나, 그녀라고 해서 딱히 답은 없었다.
정 안 되면 하무백에게 도움을 청할까도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영약이 왔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 봐!"
단목운뢰가 와룡대 생도들에게 외쳤다.
잠깐이나마 숨을 돌린 다섯 사람이 다가왔다.
그들에게 단환 하나씩 쥐여주는 당진산.
"이, 이게 뭔가요?"
그냥 봐도 수상한 단환이었기에 임대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좋은 거."
낙우진이 답했다.
"귀한 거."
단목운뢰가 보탰다.
"그러니까 꼭꼭 씹어 먹어야 해."
연하민의 마무리.
다섯 사람이 다섯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압박에 하나둘 단환을 입에 넣었다.
"으윽."
"우웁."
"큭."
바로 입을 틀어막고 구토하려는 이들.
"절대 뱉으면 안 돼! 꼭꼭 씹어서 삼켜!"
당진산이 외쳤다.
눈물을 흘리며 입안의 단환을 씹는 생도들.
"어, 그러니까··· 아······."
당황한 하설란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연하민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도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하설란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정도였던가······."
와룡대 생도들의 반응에 백리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효과가 반절이라서, 맛도 더 없대."
당진산이 태연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즉시 그들 향하는 네 사람의 시선.
악마 같은 놈.
네 사람은 눈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으, 으으으."
그러던 중 은화량이 먼저 단환을 삼켰고.
풀썩.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저, 저 정도로 맛이 극악한 거야?"
단목운뢰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맛이 더 없다고 했지만, 설마 단환을 먹은 사람이 정신을 잃을 줄이야.
풀썩. 풀썩.
나중천과 영후인이 쓰러졌다.
풀썩.
이번에는 심철산이다.
"헉, 헉, 헉······."
임대치만이 침을 질질 흘리며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대단한 녀석이야."
당진산이 그 모습에 중얼거리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효성이라 다행이네. 기절해도 상관없이."
연하민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당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참. 이게 진짜 몸에 좋은 건데······. 어떻게 지금은 얘들한테 설명할 방법이 없네."
난감하다는 듯 혼잣말을 하는 당진산.
임대치가 부들부들 떨리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당진산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들은 것이다.
"아니, 이게 진짜 몸에 좋아, 좋다고. 근데 이건 설명을 할 수가 없네. 지내보면 알게 될 거야."
당진산이 임대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는 순간.
"우읍."
갑자기 치미는 구역질.
당진산이 다급히 그 입을 막았다.
"안 돼! 토하면 안 된다! 이거 진짜 좋은 거라고!"
임대치의 입에서 살짝 흘러나오는 토사물이 당진산의 손에 묻었지만, 당진산은 아랑곳 않고 임대치의 입을 막고 있었다.
이게 다 귀중한 내공이었기에.
"대체··· 오라버니는 뭘 만든 거야······."
하설란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