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뭐 하는 짓들이냐!!
깊은 밤.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다.
산속에는 짙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코오오."
간간이 고요를 깨는 하설란의 작은 코골이.
그 외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냐?"
그때 낮게 울린 당진산의 목소리.
하설란도, 주우명도.
와룡대 생도들도 모두 잠든 때에 당진산이 나직이 물었다.
"아니."
"아직."
"잠이 안 오네."
"그러게."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네 사람.
당진산은 깜깜한 밤하늘의 별을 잠시 응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담담하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다.
"뭐가?"
백리평이 물었다.
다른 세 사람은 그저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볼 뿐.
"제멋대로 일 벌인 거."
짧은 대답.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침묵을 깬 이는 의외로 낙우진이었다.
"나를 보는 것 같았거든."
그리고 다시 입을 닫는 낙우진.
"우진의 말이 맞아."
연하민이다.
그녀가 당진산과 함께 이 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좀 시원했어."
단목운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놈들 박살 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내기를 제안했을 뿐인데, 박살 내는 모습까지라니.
"난 우리 조장을 믿어."
마지막으로 백리평의 말이었다.
"고맙다."
당진산의 나직한 말에는 습기가 살짝 어려 있는 듯했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코오오."
하설란의 작은 코골이가 잠깐 침묵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
합비.
안휘성의 성도로 번화한 이곳은 남궁세가가 자리를 잡은 곳으로도 유명했다.
남휘라는 중년 사내는 남궁세가가 잘 보이는 객잔의 이 층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얼굴 가득 흉측한 흉터가 남은 외팔이 사내.
객잔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그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그 이상의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흑도의 무림인처럼 보이는 외양 때문에 그럴 뿐.
남궁세가의 앞마당에서 허튼짓할 리는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남휘는 복잡한 시선으로 남궁세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거대한 세가였다.
천하제일세가.
불과 이십 년 정도 전까지 남궁세가를 지칭하던 말이었으니.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드디어 소가주가 누가 될지 곧 결정이 되겠구만."
호사가들의 대화가 남휘의 귀에 들려왔다.
자연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마침 그가 알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쩝. 근데 남궁가주의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구만. 남궁지후라는 걸출한 장남이 있는데······."
"뭐, 그만큼 공명정대하다는 거지. 대남궁세가의 가주 아니겠나."
"허. 그런데 제왕검형이라······."
남휘의 귀를 사로잡는 이야기다.
남궁지후, 그리고 제왕검형.
오른쪽 어깨가 찌르르 아파 왔다.
"훗."
작은 웃음과 함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한 잔 술로 갑자기 찾아온 통증을 눌렀다.
귀만 기울이는 걸로 알고 싶은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니.
객잔의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한 잔, 한 잔 술을 넘겼다.
취기가 오를 무렵.
그 호사가들은 자리를 떴다.
필요한 내용은 다 들었다.
이름 모를 그들에게 너무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교룡관이라······."
작게 중얼거리는 남휘.
마지막 잔을 비우고, 셈을 하여 탁자에 올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남궁세가.
그곳을 등지고 남휘는 비틀비틀 걸었다.
단번에 걷어낼 수 있는 취기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취한 채로 걷고 싶었다.
다음 목적지는 호북성 무창.
교룡관이었다.
***
태양이 서쪽 하늘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시간.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어떻게 몸을 굴리면 이렇게 되는 걸까.
무창성으로 들어선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은 단 하루 만에 거지가 되었다.
뱃속에서는 연신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어제 점심 이후로 먹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 역시 수련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맹룡대 생도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거지꼴까지는 아니라는 것 정도가 다른 점이라 할까.
그렇게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진 채, 힘없는 걸음으로 교룡관 정문을 향해 움직였다.
어서 담룡각에 가서 밥을 먹고, 숙소의 목욕장에서 몸을 씻고 싶은 마음뿐.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희희낙락해서는 왁자지껄하게 걸어오는 무리와 딱 마주쳤다.
"풋. 푸하하하! 이게 웬 거지새끼들이냐! 크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무리는.
와룡대 일 조였다.
얼굴에 아직 붉은 기가 도는 것이 이때까지 기루에서 질펀하게 놀다가 나타난 것이다.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어찌 아니 그럴까.
자신들은 산속에서 정말 개같이 굴렀는데.
저 녀석들은.
지독한 술 냄새에 기녀들의 분 냄새까지 풍겼다.
철령의 시선이 맹룡대에게로 향했다.
역시나 형편없는 몰골.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하는 모습이었건만, 연하민과 하설란은 그 속에서도 미모가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놀았던 기루의 기녀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철령의 시선이 연하민에게 고정되었다.
"크크. 어차피 우리 시중들게 될 텐데. 어때 그냥 지금 본 공자의 시중을 드는 연습을 해보는 건?"
여전히 남아 있는 취기 때문일까.
아니면 만 하루를 기루에서 질펀하게 놀았던 탓일까.
철령이 연하민을 향해 다가가며 음흉하게 손을 뻗었다.
"좋구나!"
"철령! 남자다!"
"잘 해봐라!"
"휘이익!"
와룡대 일 조의 다른 생도들은 휘파람을 불고 낄낄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부웅!
텁.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 소리와 그 주먹을 막는 소리가 울렸다.
철령은 여전히 음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 한 자 앞에 멈춰있는 당진산의 주먹.
뒤늦게 그것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하는 철령.
헌데 그 주먹을 막은 것은.
연하민이었다.
시리디시린 눈으로 철령을 바라본 채.
그것까지 확인한 철령.
입꼬리가 샐쭉하니 올라간다.
"크크. 네년도 본 공자가 마음에 든 거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퍽.
연하민의 다른 한 주먹이 철령의 턱주가리를 아래에서 위로 후려갈겼다.
그대로 바닥에서 한 치 정도 떠서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는 철령.
"너 이 씨발 새끼. 내가 많이 참았어. 이제 죽여줄게."
북풍한설도 이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질 얼음 같은 목소리다.
전설 속 만년빙정에 필적할 것 같았다.
"이, 이 쌍년이······."
철령이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내 휘청거렸다.
턱을 아래에서 위로 후려치며 골을 제대로 뒤흔든 탓이다.
주변의 생도들은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그대로 굳었다.
"하, 하민······."
당진산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장. 미안해. 멋대로 나서서. 그런데 오늘은 끝장을 봐야겠어."
그리 말하며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연하민.
철령이 정신 차리는 것을 기다렸다.
와룡대 생도 넷은 떨떨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진산이 후려친 거라면 끼어들 명분은 있었다.
삼자가 나선 것이니.
그런데 지금 연하민이 후려쳤다.
그 전에 철령이 연하민을 희롱한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고.
자신들이 그 희롱을 더 부추기기까지 하였으니.
철령이 맞았다고 나서기에는 그 꼴이 우스웠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철령이 이내 머리를 흔들며 바로 섰다.
연하민은 그런 철령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며 오른손을 들었다.
까딱.
검지를 움직이는 연하민.
"들어와봐. 어디."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철령.
"이··· 개잡년이. 오늘 네년은 본 공자 아래에서 가랑이를 벌리게 될 거다."
철령의 두 눈이 분노와 음욕으로 번들거렸다.
타핫.
땅을 박차고 연하민을 향해 달려드는 철령.
그의 두 손은 조법을 펼치고 있었다.
철랑조(鐵浪不).
철기방의 무공 중 하나로, 창을 잃었을 때 펼치기 위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조법을 펼친 의도가 추잡스러웠다.
권법이나 박투술, 금나수도 있는데 굳이 조법을 펼친 것이다.
그런 철령의 손이 향한 곳은 연하민의 가슴.
그 목적은 분명했다.
공격하는 와중에도 희롱을 하는 것이다.
연하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것은 분명한 살소(殺笑)였다.
그녀의 몸에서 넘실넘실 피어오르는 살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휘익, 휙.
연하민의 주먹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허나 그 위력은 폭풍과도 같았다.
유룡권법.
그것이 지금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퍽! 퍼퍽!
철령의 공격은 가볍게 피하고 이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두 방.
"이익."
철령은 집요하게 철랑조를 펼치며 연하민의 가슴을 노렸다.
잔뜩 세운 손톱 끝은 마치 그녀의 옷을 당장에라도 찢어발기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빠직.
"크으으윽 "
연하민의 주먹이 그런 철령의 손가락을 강타했다.
왼손 중지와 약지가 그대로 부러졌다.
그 고통에 철령이 신음을 흘린 것이다.
그러는 것도 잠시.
연하민의 주먹이 다시 철령의 얼굴을 강타했다.
퍽! 퍼퍽!
피가 튀었다.
그럼에도 연하민의 표정은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쓰레기를 두드려 부수는 듯한 모습이다.
"꿀꺽."
은화량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수련할 때의 연하민도 무서웠지만.
지금 저 모습은.
정말이지.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서웠다.
"이이······."
와룡대 일 조의 생도들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그 모습을 노려보았다.
당장 나서서 막아야 하는지.
끝날 때까지 이리 지켜보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연하민 혼자 있다면 나섰으리라.
허나 지금 저쪽은 일곱, 이쪽은 다섯이다.
자신들이 나선다면, 저쪽의 동료들도 나설 터.
자신들이 불리한 싸움이다.
"고작 이 정도로 그리 까분 거야?"
연하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우어어어! 이 쌍년이!!"
철령이 온몸의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살짝이나마 남아 있던 취기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철령의 옷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연하민을 향해 휘두르는 그의 팔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철랑조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여전히 조법을 펼치는 철령.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창이 없을 때 철령이 가장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철기방의 절기가 바로 철랑조였다.
조금 전과의 차이라면, 음습하게 가슴만을 노리던 그의 손이 이번에는 연하민의 허점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부러진 왼손 손가락 두 개가 덜렁거렸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펼치는 조법.
연하민은 유룡신법의 보법을 밟으며 유룡권법을 펼쳤다.
파팍! 파파파파!
순식간에 몇 합을 부딪쳤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손과 주먹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연하민의 기세가 점점 올라갔다.
그녀의 옷자락도 끌어 올린 내공에 펄럭였다.
그럴수록 철령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연하민의 주먹이 더 빠르고 더 강맹해졌기에.
철령이 이를 악물고 조법을 펼쳤으나.
퍽.
옆구리를 얻어맞았고.
퍽.
복부에 주먹이 꽂혔으며.
퍽.
왼쪽 눈을 두들겨 맞았다.
비틀비틀 물러서는 철령.
"으윽······."
"마음 같아서는 그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
섬뜩한 말이 아름다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개소리를 지껄인 그 입을 박살 내주마."
철령이 다시금 양손을 휘두르려 할 때.
퍼억!
전력을 다한 연하민의 주먹이 철령의 입에 틀어박혔다.
그대로 부러져 떨어지는 이빨이 다섯 개.
그와 동시에 피도 흩뿌렸다.
"우와!"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이 탄성을 흘렸다.
슬금슬금 사람들이 모인다 싶더니 곧 어마어마한 구경꾼들이 몰렸다.
그럴 수밖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이다.
그것도 교룡관의 생도들이 무공을 써서 싸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동투제가 아니면 언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덕분에 인파가 순식간에 몰려 그들을 둘러쌌다.
"이거 괜찮을까?"
잔뜩 모여든 인파에 은화량이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하설란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 인파를 살폈다.
어쩐지 일이 제법 커질 것 같았다.
교룡관에서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진 탓이다.
"뭐 하는 짓들이냐!!!"
커다란 노호성이 교룡관 정문 쪽에서 터져 나왔다.
잠룡대주 능우담이었다.
정문의 수문위사들이 자신들이 끼어들 수준을 넘어섰다는 판단에 서둘러 능우담에게 알린 것이다.
싸우고 있는 이들이 와룡대와 맹룡대임을 알아본 위사가 재치 있게 잠룡대주에게로 향한 것이다.
능우담의 노호성과 함께 싸움은 멈췄다.
아니, 끝났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그때 철령의 이빨이 부러져 흩날리며 떨어졌으니.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철령.
연하민은 오연하게 서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다리 사이의 한 곳.
입을 박살 낸 다음은.
그곳을 자근자근 밟아버리겠다는 듯 발끝을 움찔거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그리했을지도 몰랐다.
철령에게 있어서는 능우담이 평생의 은인이리라.
그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교룡관 생도가 대로에서 싸움질이라니. 정녕 네놈들이 미친 게로구나! 모두 따라와라!"
능우담의 말에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는 움찔거렸다.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설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연하민을 바라보았다.
와룡대 일 조 생도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철령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들이 교룡관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잔뜩 몰려들었던 인파가 서서히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