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말을 준비하라 일러라
일행은 일단 와룡숙으로 향했다.
이십 조 생도들을 데려다주는 것이다.
"와룡숙에서는 그 새끼들이 시비 걸거나 그러지 않지?"
당진산의 물음에 은화량이 대표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없는 사람 취급입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어서 씻고 쉬어라."
당진산이 은화량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그들이 와룡숙으로 들어가고, 연룡숙으로 향했다.
연하민과 하설란을 데려다주는 것이다.
그때.
"어?"
남궁지후와 남궁지유였다.
"여~. 시원하게 해치웠다며?"
남궁지후가 당진산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니고, 이쪽."
당진산이 연하민을 가리켰다.
"터트렸어?"
남궁지유가 연하민을 보고 물었다.
그 의미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연하민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막 그러려고 했는데 능 대주님이 오셔서."
"아쉽네. 그놈 눈빛이 늘 기분이 나빴는데······."
남궁지유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잠룡대와 와룡대.
역시 학당에서 자주 마주쳤다.
이 년차와 일 년차였지만.
그때마다 철령이 자신을 향해 은근히 보내는 그 끈적한 시선을 모를 리 없는 남궁지유다.
다만 명분이 없었기에 손을 쓰지 못했을 뿐.
"잘했어."
남궁지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처벌은?"
남궁지후의 물음.
"면벽 열흘."
"흠. 교룡관 밖이었으니 어쩔 수 없나······."
남궁지후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남궁지후의 조와 당진산의 조가 싸운 적도 있었다.
다만 교룡관 내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비무라는 핑계로 처벌 없이 넘어갔었다.
"열흘 금방이다. 뭐 도와줄 건 없고?"
남궁지후의 물음에 연하민이 답했다.
"시간 될 때, 와룡대 이십 조 애들 상대 좀 해줘."
도와준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양한 상대로 경험을 쌓으면 좋았고.
"뭐, 그 정도야. 알았어."
그렇게 시끄러웠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
짹짹짹.
이른 아침.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연하민.
함께 방을 쓰고 있는 하설란 역시 눈을 떴다.
"이제 가야 하지?"
하설란의 물음.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연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고 채비하고, 간단하게 씻었다.
그리고 방을 나선다.
그녀의 곁에는 하설란이 있었다.
아무래도 면벽실이 있는 면벽당에 함께 가려는 모양이었다.
면벽당.
이름 그대로의 장소다.
온통 면벽실로 가득 찬 곳.
징계를 받을 일이 있는 이들이 와서 면벽만 하다가 가는 곳이다.
전반기 개관 후, 한 달 남짓 지난 지금 몇몇이 다녀갔다.
지금은 모든 면벽실이 비어있는 상태.
오늘 이곳에 세 사람이 들게 된 것이다.
연룡숙을 나와 면벽당을 향해 가는 길.
맹룡숙에서 나오는 당진산 일행과 마주쳤다.
역시나 맹룡대 칠 조 전원에 주우명까지 있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그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실실 웃기는. 좋냐?"
갑자기 날아든 물음.
하무백이었다.
그가 이른 아침 징계를 받으러 가는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곱 사람의 시선이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연하민."
"네."
하무백의 부름에 짧게 답하는 그녀.
"어제 괜찮았다. 제법이었어."
그 말에 연하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무백의 시선이 당진산에게로 향했다.
"뭐, 잘했다."
역시나 짧은 칭찬.
당진산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휙.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는 하무백.
"이건?"
종이에 곱게 쌓인 것이 단환처럼 보였다.
"면벽이 징계라 생각하지 말고, 수련이라고 생각해. 열흘 동안 내공을 갈고 닦아 나오면 될 거다."
당진산과 연하민이 각자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불안한 얼굴로 하무백을 보고 물었다.
"이거, 그거 아니죠?"
"그거야."
대번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당진산.
그 모습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다더니?"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에게 했던 말이다.
하무백이 그 말을 꺼내자 슬쩍 고개를 돌리는 당진산.
"이제 혈을 점하고 먹으면 되는 것도 알잖나? 그러니까 열심히 해라. 뭐, 안 먹는 것도 본인 자유고."
하무백이 그리 말하고는 훌쩍 걸음을 옮겼다.
생도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면벽 내가 한다고 할 걸 그랬나······."
단목운뢰가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열흘 간 내공심법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 아니던가.
당진산이 그런 단목운뢰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무튼 수련에 미쳤지, 미쳤어. 그럼 이것도 네가 먹고?"
농담 삼아 묻는 당진산.
단목운뢰는 그 물음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환.
저것의 효과는 이미 온몸으로 체험하지 않았던가.
"아냐, 이거 내 거야. 교관님 말씀대로 혈을 점하고 먹으면 괜찮을 거고."
바로 단환을 소중히 감싸는 당진산.
백리평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미각을 마비시키는 혈을 알고 있어? 나는 모르는데."
타당한 지적에 당진산이 움찔했다.
몰랐다.
그도 미각을 마비 시키는 혈을 몰랐다.
하설란이 이야기를 해줬기에 그런 혈도 있구나 알게 되었을 뿐.
당진산과 연하민의 시선이 하설란에게로 향했다.
"어, 저, 그게··· 사부님이 점해주신데다, 무공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이라 나도 정확히 어디인지 기억이 안 나. 양쪽 턱 아래 어디였던 거 같은데······."
당진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끔찍한 것을 또 그대로 먹어야 한다니.
"그, 어르신께 부탁드리면······."
다급히 말하는 당진산.
그러나.
"그러기엔 시간이 늦을 거 같은데."
그랬다.
어느새 면벽실에 들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터덜터덜.
당진산이 넋이 나간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연하민은 무표정한 채로다.
그렇게 면벽당 앞에 도착하니, 마침 철령도 도착했다.
그는 혼자였다.
연하민을 노려보는 철령.
"이게 끄티라 생가카면 오사니다."
그리 말하고는 먼저 면벽당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터트려야겠네."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연하민.
그 말에 괜히 함께 있던 남자 생도들의 등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어딘가 찌르르 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들이 아닌 철령을 향해 한 말임에도.
뒤이어 연하민과 당진산이 면벽당으로 들어갔다.
자신들에게 배정된 면벽실에 들어서니.
좁았다.
작았다.
정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바로 앞의 벽을 마주하고 있을 공간뿐.
벽을 보고 있는 것뿐 아니라 좁은 공간에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괴로울 듯했다.
괜히 징계가 아닌 것이다.
이건 면벽실이라 이름 붙었을 뿐, 징벌방이다.
그러나 하무백이 그러지 않았던가.
면벽이 아닌 수련이라 생각하라고.
내공심법을 수련하는 데 장소가 무에 중요할까.
연하민은 단환을 입에 넣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경험이 있는 맛이다.
끔찍한.
그래도 와룡대 생도들에게 줬던 것이 아니라 다행이랄까.
단환을 꼭꼭 씹어 삼킨 후 운공에 들어가는 연하민이었다.
당진산도, 연하민도 면벽실의 일상에 금세 적응했다.
적응하고 말 것도 없었다.
운공삼매에 들었다가 때가 되면 벽곡단을 먹고, 때가 되면 잤다.
그야말로 집중적인 내공수련을 위한 폐관이라 해도 될 생활이었다.
다만.
철령은 달랐다.
"비러머글. 비러머글. 비러머글."
두 눈에 분노의 겁화를 띠며 계속해서 화가 넘치는 말을 중얼거렸다.
몇 번이나 관리 교관에게 주의받았음에도.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두들겨 맞은 곳도 아프고.
좁아서 답답하고.
사방에서 죄어 오는 것 같고.
하루만 있었는데도 미칠 것만 같았다.
'씨발. 씨발. 씨발. 미치겠네. 이 개잡년놈들 때문에. 씨발.'
머릿속에는 원망과 욕설만이 가득했다.
***
하북성 석가장(石家莊)
태행산맥과 화북평원 사이에 있는 작은 촌락.
하북성 남단에 자리한 곳으로 주변으로 산동성, 하남성, 산서성이 둘러싸고 있는 나름의 교통의 요지였다.
그러한 입지를 알아보고 철기방이 이곳에 자리한 후, 작은 촌락이었던 석가장은 커다란 도시로 발전했다.
북방과 멀지 않아 질 좋은 전마를 구하기 쉽고, 태행산맥과 화북평원이 지척에 있는.
그야말로 훌륭한 입지였다.
덕분에 철기방의 세는 날로 커졌다.
종국에는 북경의 하북 팽가와 하북성의 패권을 다투는 위치에까지 올라갔으며, 신진팔문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 거대 문파의 주인인 철기방주.
그는 지금 갑자기 찾아온 여동생이 터트리는 화를 그대로 받아주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요! 령이가 령이가 그런 꼴을 당하다니요!!"
정신없이 몰아치는 철령의 어미 구소소.
철기방주 구탄길은 구소소가 가지고 온 전서를 살폈다.
전서를 읽으면서 그의 얼굴에도 서서히 노기가 떠올랐다.
"감히 철기방의 제자를 이따위로······."
말과 달리 철기방의 제자라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조카라서 분노하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아끼는 여동생의 아들이다.
그 행실이 여색을 밝히는 것 때문에 주변에서 말이 많아 교룡관에 잠시 보내뒀건만.
그곳에서 이런 참담한 일을 당하다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소소야."
"네. 오라버니."
"가자. 말을 준비하라 일러라."
구탄길의 말에 구소소가 빠르게 움직였다.
갑작스레 철기방이 분주해졌다.
방주가 직접 출타하겠다고 했으니, 준비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장 떠나겠다는 방주 때문에 준비는 최소한으로 끝났다.
그리고.
철기방의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기마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전력으로 달렸다.
목적지는 호북성 무창.
교룡관이었다.
석가장에서 질 좋은 말을 전력으로 달렸을 때 나흘에서 닷새의 거리다.
말을 희생시킬 각오로 달린다면 사흘에서 나흘.
열흘간의 면벽이라 하였으니,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했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그 아이를 무고한 처벌에서 구해줄 수 있다.
철갑철기군(鐵甲鐵騎軍).
지금의 철기방이 있게 한 최정예들이다.
이들 중 열이 구탄길과 구소소를 따랐다.
빠른 이동이 목적이었기에, 철갑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곧장 무창을 향해 달렸다.
***
"도착했군."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각.
무창성의 성문을 들어온 남휘가 주변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곳에 있다고 했다.
일단 먼저 적당한 객잔을 잡았다.
일 층은 온갖 손님으로 소란스러웠다.
'남궁세가의 장남과 장녀가 교룡관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
어느 세가가 가문의 후계자를 교룡관에 보낸단 말인가.
오대세가로서 다른 문파에 모범을 보이겠다는 명분으로 보냈다고 들었지만.
남휘는 알고 있었다.
핑계임을.
가주가 되고 쓸모가 다했으니, 버리는 것이다.
버리지 않으면 남궁세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니 아까웠을 테지.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인 줄 모르고 믿고 따랐던 자신의 과거가 한심하기만 했다.
하지만 남휘 아니 남궁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원의 하급 무사.
성이 남궁이라는 것뿐, 언제 방계로 갈라져 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방계 중의 방계였다.
스스로 검에 대한 재능이 있다고 자부했으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익힐 수 있는 무공은 대연심법과 대연검법, 대연신법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열심히 수련했고, 우연히 소가주의 눈에 띄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의 재능을 소가주는 한번에 알아봐 주었고, 크게 평해 주었다.
그랬기에, 소가주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소가주의 외유를 따라나섰다.
그의 유일한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외유였으나, 그때는 그저 기분 전환을 위한 외유인 줄로만 알았다.
소가주와, 그의 두 부인을 홀로 수행하며 천하를 떠돌았다.
그리고.
그날.
남궁휘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생각은 여기까지.
가슴 아픈 일, 분노할 일들은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운 좋게 살아남아 하나 남은 왼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얼마나 마음을 가다듬었던가.
남궁세가를 보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마음이다.
헌데, 무창에 오니 조금씩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남궁휘는 삼 층의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