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희롱?
구구구.
교룡관에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 앉았다.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린 전서는 즉시 검사를 거쳐 기유찬에게 전해졌고, 기유찬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관주실로 향했다.
전서를 모두 읽은 팽도율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기시감 가득한 상황이었으니까.
아니, 기시감이 아니었다.
불과 몇 달 전 한 번 휘몰아치고 지나간 일이니.
하필이면 이 전서를 보낸 철기방도 하북에 자리하고 있다.
팽가와 하북의 패권을 다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난 그 일로 팽가의 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 덕에 하북에서 철기방의 기세가 확장일로였는데.
"흐음. 이렇게 균형을 맞춰주려고 그러는 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홀로 이런 농을 중얼거릴까.
"관칙대로 행한 일에 이리 달려온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기유찬도 마찬가지 심정인 듯 그리 말했다.
"애초에 이걸 전서구로 집에 시시콜콜 알린 생도 녀석의 머릿속이 궁금하군."
팽도율의 말에 기유찬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으니.
교룡관은 애들을 데려다가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성인에 이른 이들이 모여서 교육을 받는 곳.
그런데 관칙에 따른 처벌에 생도의 부모가 말을 달려 찾아오겠다니.
전서는 철령의 징계에 대한 부당함을 따지는 글로 가득했다.
"철기방주가 막내 여동생을 그리 아낀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아이의 모친이 그 사람인 모양이군."
팽도율이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조용히 넘어가지 않겠죠?"
기유찬의 말에 팽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철기방은 하무백이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몰랐으니까.
철갑철기군.
대규모의 기마대가 주전력인 철기방이다.
그런 만큼 혈교나 마교와의 전쟁 때도 주로 대회전이 일어나는 전장을 주로 누볐다.
하무백이 작전을 수행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전장이었다.
교주들을 상대한 최후의 결전 때도 철갑철기군은 넓은 전장을 정리하는 역할이었으니.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터이니 준비해야겠군."
"네?"
팽도율의 말에 기유찬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찌 안 그럴까.
전서구가 조금 전에 도착했다.
하북 석가장에서 무창까지.
먼 거리였다.
헌데 전서구랑 고작 하루 이틀 차이로 도착을 할 것이라고?
"여기 전서에 적혀 있지 않나. 전력을 다해 갈 터이니, 철령의 부당한 처벌을 멈추라고. 그들이 전력으로 달린다면 그 정도면 도착할 걸세."
철기방.
그들의 기마 실력만은 진짜였으니.
***
위지군은 오랜만에 교룡관을 벗어났다.
비번인 탓이다.
애들끼리 투닥거린다고 교룡관이 좀 시끄러웠던 모양이지만 위지군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교룡관에서 비질이나 하는 노인네인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니까.
하설란도 이제는 교룡관 생활에 완연히 적응해서 자신이 노심초사 붙어 있을 이유도 없었다.
물론 지금도 기감으로 교룡관을 살피고는 있었지만.
요즘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흘흘. 이런 때 낮술도 하고 그러는 것이지."
위지군은 교룡관 앞의 수많은 주루 중 한 곳에 들었다.
교룡관 금당에서 운영하는 주루인 금룡루.
그 이름부터 금당의 금룡상단에서 따왔다.
주변 객잔과 주루들 중 가장 높은 곳이다.
최상층이 무려 오 층이었으니.
교룡관 근처에 있는 곳 중 가장 높은 곳으로 주변 전경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었다.
위지군은 오 층에 올랐다.
창가의 빈자리가 마침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위지군은 그 자리에 앉았다.
교룡관의 전경이 아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눈치 빨라 보이는 점소이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흐음. 오랜만의 여흥이니 오늘은 좀 좋은 녀석으로 마셔 볼까? 백화로(百花露) 있는가?"
"물론입죠, 어르신. 진정 술을 잘 아시는 주선(酒仙)이 오늘 본 주루에 강림하셨군요. 헤헤."
점소이의 말에 위지군은 피식 웃었다.
백 가지 꽃의 이슬을 담아 빚은 술이라는 이름답게 귀한 술이었다.
그만큼 비싼 술이었고.
달콤하고 주독이 없어 몸에도 좋다는 이 술은 기분이 좋을 때면 위지군이 종종 즐기는 술이었다.
"혼자 마실 터이니 작은 병으로 하나 가져다 주게나."
"요리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백화로 같이 달콤한 술에는 적당히 맵거나 짭짤한 것이 제법 잘 어울립니다."
위지군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점소이를 바라보았다.
"자네 제법이구만. 그래. 혹시 계정(鷄丁) 되는가?"
"당연합죠. 마침 저희 주루의 숙수 중 하나가 사천 출신입니다."
계정.
매콤하게 만든 닭튀김의 한 종류였다.
달콤한 백화로와 함께 먹으면 제법 어울릴 터.
"좋구만. 그리 가져다주게나."
"넵!"
자신을 향해 튕긴 작은 철전 하나를 잽싸게 낚아챈 점소이가 부리나케 사라졌다.
잠시 후 작은 술병 하나와 계정 요리가 식탁 위에 놓였다.
쪼르르.
한 잔 채워 넘기니 과연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이 좋았다.
거기에 매콤한 계정을 한 입 먹으니.
"허허. 극락이 따로 있을까. 이런 게 극락이지."
빙그레 웃던 위지군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멈췄다.
창가 자리를 둘러보았으나 빈자리가 없어 난감해하는 외팔이 사내.
복잡한 눈빛으로 교룡관을 힐끔거리며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사연이 가득한 눈빛이다.
'허······.'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던 위지군은 깜짝 놀랐다.
설마 저런 경지의 무인이 무창에 들어왔을 줄은 몰랐으니.
'반박귀진의 경지에 든 모양이군. 그러니 단순히 기감만으로는 알아차리기 어려웠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위지군.
위지군 정도의 경지가 되니 상대가 초절정에서도 상위의 경지인 반박귀진에 들었음을 아는 것이지.
경지가 낮은 이들의 눈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외팔이로만 보였을 터다.
반박귀진이 그런 경지다. 너무도 뛰어나기에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위지군은 그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흥미가 동한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초절정의 고수라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음인가.
사내의 고개가 위지군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위지군과 두 눈이 마주친 사내는 흠칫했다.
위지군의 경지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위지군의 표정과 기운에서 특별히 적대적인 기운을 느끼지 못했기에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다시 교룡관을 바라보았다.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려는 것 같았다. 안쪽으로 빈자리가 있었으나 그리로 가지 않고 창가 주변에서 있는 모습이.
'흠. 무슨 사연인고.'
타인의 사연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눈이 마주쳤을 때 보았던 사내의 눈매가 낯설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경지를 추측할 수 없는 고수다. 저런 고수가 어찌 무창에······.'
고개를 돌린 남궁휘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아니, 애초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색을 뒤늦게 느꼈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다는 방증이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반박귀진에 든 것이 작년의 일이다.
그러고도 일 년을 더 갈고 닦았다.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에 마을을 떠났건만.
저런 고수를 주루에서 맞닥뜨리다니.
역시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만큼이나 많았다.
남궁휘는 다시금 교룡관을 바라보았다.
저곳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찾으며.
'잠깐 호의를 좀 베풀어 볼까?'
이윽고 결정을 내린 위지군.
"이보게나."
남궁휘를 불렀다.
그 부름에 그의 시선이 위지군에게로 향했다.
"저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위지군.
"보아하니 창가 자리를 찾는 것 같은데, 나와 함께 합석하는 것은 어떤가?"
남궁휘는 그 말에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위지군이 앉은 자리는 교룡관이 정말 잘 보이는 소위 명당이라 할 만한 자리였다.
"그럼 신세 좀 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앉은 남궁휘.
위지군은 점소이를 불러 잔 하나를 더 가져오게 했다.
"사해가 동도라는데 이런 것도 인연이지. 자, 받게나."
남궁휘는 위지군이 주는 술을 조심스레 받았다.
살짝 입술을 축이고는 이내 교룡관으로 시선을 던졌다.
"함께 드세나. 나이가 많으니,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한다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빙긋 웃고는 위지군도 교룡관에 시선을 던졌다.
굳이 다른 이의 사연을 캐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렇게 얼마나 시선이 흘렀을까.
"저, 어르신."
남궁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룡관. 저곳은 어떤 곳입니까?"
"재미난 곳이지. 헐헐. 내 저곳에서 일꾼으로 일하고 있네만. 참 재미난 곳이야."
위지군의 말에 남궁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꾼이라니.
이런 고수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남궁휘의 동요를 느꼈음인가. 위지군이 말했다.
"내 제자가 저곳에 교관으로 있다네. 해서 소일 삼아 노후를 보내는 중일세. 허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위지군.
남궁휘의 두 눈이 다시 교룡관을 바라본다.
"혹, 저 같은 사람도 일꾼으로 일할 자리가 있을까요?"
조심스레 묻는 남궁휘.
저 같은 사람이라 한 까닭은 뻔했다.
한 팔이 없었으니.
"흠. 일할 곳이 필요한가?"
위지군이 물었다.
"저곳에서 일을 하고 싶어서요."
그의 시선은 여전히 교룡관을 향하고 있었다.
***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고 있다.
말들은 이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까.
전력으로 달린 며칠.
이제 그 끝이 보이고 있었다.
점심때가 좀 지난 시각.
무창성의 성벽이 보였다.
"다 왔다. 조금만 더 버텨라."
철기방주 구탄길은 그렇게 말의 허리를 세차게 찼다.
보통이라면 예비 말을 두세 필 대동하여 달리는 속도다.
허나 워낙 빠른 강행군인지라 제대로 따라올 만한 예비 말이 얼마 없었기에.
그냥 열두 명이 열두 필의 말로 미친듯이 달려왔다.
조금씩 거품을 무는 말들.
무창성의 성문 앞에 당도했을 때, 열두 필의 말 중 세 필이 쓰러졌다.
남은 아홉 필도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정리해라."
구탄길의 명령에 철갑철기군의 수하 중 세 사람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남았다.
구탄길과 구소소가 앞장서고.
말을 정리하기 위해 남은 셋을 제외한 수하 일곱이 뒤를 따르며 그들은 무창에 들어섰다.
주변을 살필 것도 없었다.
그들은 곧장 교룡관으로 향했다.
거대한 기병용 장창을 빗겨 든 채 대로를 걷는 아홉 무림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딴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금세 교룡관 정문에 도달했다.
수문위사는 이미 전달받은 것이 있었기에 그들을 즉시 안으로 안내했다.
'며칠 전의 그 소란 때문인 모양이로다.'
금룡루 오 층에서 교룡관 정문 주변의 정경을 살피던 위지군의 두 눈에 흥미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굳이 자신까지 움직이기에는 지금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니까.
'철기방. 저들이 교룡관에는 무슨 일이지?'
남궁휘 역시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병용 장창이라는 독문병기만 보더라도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풍기는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그런 이들이 저렇게 흉흉한 모습으로 교룡관을 찾다니.
혹시 자신이 찾는 이들과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었으나 금세 진정했다.
그럴 수밖에.
아무리 철기방이라 한들, 남궁세가의 직계를 함부로 할 수는 없을 테니.
***
"허허. 어서 오십시오. 철기방의 방주께서 먼 걸음 하셨군요."
팽도율이 관주각의 일 층 대전에서 철기방 일행을 맞았다.
일전에 철령이 징계받은 곳이다.
"령이는 어디에 있소이까?"
철령부터 찾는 구탄길.
그의 옆에 있는 구소소는 연신 주변을 살폈다.
"당연히 면벽실에서 면벽하고 있지요."
팽도율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갈!"
그 말에 구탄길의 몸에서 흉흉한 기세가 사방으로 퍼졌다.
피부가 따끔따끔해지는 기세다.
팽도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과연 철기방의 방주.
분명한 사실은 그가 팽도율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
"아무리 방주시라 하나, 무례가 지나치십니다."
팽도율이 내공을 끌어올려 구탄길의 기세에 대항하며 말했다.
"내 분명 출발하면서 전서구를 보냈을 터. 그것을 보았으니 이리 맞은 것일 텐데, 어찌 령이가 여 기에 없는 것이오!!"
"교룡관의 관칙에 따라 진행된 처벌이외다. 아무리 철기방주라 하나 교룡관의 관칙에 간섭할 수는 없소!"
팽도율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흥. 우리 령이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피해자예요. 그런데 어찌 처벌받아야 하지요? 이건 관칙이 틀린 겁니다."
구소소가 끼어들었다.
"맞는 말. 맹룡대의 그 발칙한 년놈들이 징계받으면 받아야지, 왜 죄 없는 우리 령이가 그 모진 꼴을 당해야 하오!"
두 사람이 연신 노성을 터뜨렸다.
"여생도를 희롱한 것은 철령이외다."
"흥. 가벼운 농으로 희롱이라니 우습군요."
팽도율의 말에 구소소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받아쳤다.
"하. 이거 참. 더 이상 못 들어주겠군."
그때 들려온 목소리.
하무백이 관주각 대전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네놈은 뭐냐?"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난입에 구탄길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나 하무백은 그의 말은 무시한 채 곧장 구소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 시중을 들게 될 텐데. 어때 그냥 지금 본좌의 시중을 드는 연습을 해보는 건?"
하무백의 말에 구소소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휘잉!
구소소가 하무백을 향해 장창을 휘둘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구탄길과 철갑철기군 일곱의 장창도 하무백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미친놈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딴 희롱을 하느냐!"
구소소가 분노에 찬 일갈을 터뜨렸다.
"감히 본 방주의 여동생에게 그런 희롱이라니, 네놈이 죽여 달라고 발악하는구나!"
구탄길 역시 분노를 터뜨렸다.
두 사람의 반응에 한 발 뒤로 물러나 그들의 공격을 모두 피한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희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