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싫음 말고
식탁 세 개 정도를 차지하고 앉은 생도들은 음식이 나온 직후 젓가락을 들었다.
허기가 반찬이라.
젓가락질 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럴 수밖에.
저녁때가 지나도 한참이 지났음이니.
그렇게 정신없이 식사하고 있을 때.
하무백이 금룡루 일 층에 들어섰다.
그는 금세 생도들을 발견하고 그리로 걸음했다.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단목운뢰였다.
"교관님?"
하무백이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천천히들 먹어라. 그러다 체하면 약도 없다."
하무백이 생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백리평이 물었다.
오후 맹룡대의 훈련에도 역시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하무백이었기 때문이다.
"전해줄 게 좀 있어서."
"무엇을요?"
하설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탓이다.
"일단 먹어라. 다들 허기져 보이는데."
하무백의 말에 멈췄던 젓가락이 다시금 움직였다.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무백.
'음?'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기감에 걸리는 한 무인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그 기척을 느끼고서야 제대로 된 수준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교룡관에서 기감을 퍼뜨렸을 때는 그저 보통 사람들만 있다고 여겼는데.
설마 반박귀진에 이른 고수가 오 층에 있었을 줄이야.
금룡루에 들어오고서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관없으려나?'
천하는 넓고 고수는 많았다.
무창을 지나쳐 가는 기인이사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하무백이었다.
'이제 슬슬 가볼까?'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난 교룡관에도 고요가 내려앉았다.
간간이 보이는 횃불과 등불들만이 빛을 밝힐 뿐.
사람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이제 그만 숙소로 잡은 객잔에 가야 할 듯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남궁휘.
주루답게 어둠이 짙어질수록 이곳은 더욱 활기가 넘쳐났다.
어느새 일 층에 도착한 남궁휘는 문으로 나가는 길에 잔뜩 몰려 앉은 무리를 발견했다.
얼마 전 교룡관에서 우르르 몰려온 이들이다.
그리고 그중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저 자는?'
그의 얼굴을 알아본 남궁휘는 내심 깜짝 놀랐다.
초면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남궁휘가 지내던 마을은 산월마림에서도 최고의 격전지 중 하나였다.
그곳을 정리하기 위해 소휘웅이 왔었다.
자신의 직속 무력부대인 호천단을 이끌고.
'호천단주.'
그때 남궁휘가 도움을 줬었다.
실력은 지금에 비하면 일천하기 짝이 없을 때였지만, 그래도 그 주변 산월마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때는 이름도 밝히지 않았었다.
하무백 역시 남궁휘를 발견했다.
그리고 흠칫했다.
검상으로 인한 흉터 투성이의 얼굴.
빈 오른팔 소매.
허리에 찬 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무백과 호천단원들이 아직은 산월마림에 익숙하지 않을 때.
산월마림에서도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곳의 길잡이를 해준 사내였으니.
'무명이라 불러 달라 했었지······.'
당시에도 사연이 많아 보였다.
눈빛도 죽어 있었다.
가끔 살아있는 눈빛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좀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사연은 많은 듯했으나, 눈빛이 살아 있었으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초절정의 경지라니.
가히 환골탈태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깐 눈이 마주치고.
남궁휘는 걸음을 계속 옮겼다.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는 하무백과 마주보는 자리, 그러니까 남궁휘와는 등을 진 자리였다.
그랬기에 남궁휘는 그 두 사람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금룡루를 벗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하설란이 물었다.
"방금 상당한 고수 한 명이 지나가서."
하무백의 대답에 맹룡대 생도와 남궁 남매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 괴물 같은 교관님이 상당한 고수라 평하는 사람이 있다니.
남궁지후가 호기심에 등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허나 남궁휘는 이미 사라진 후.
"이미 갔다."
하무백이 짧게 말했다.
"그보다. 식사가 대강 끝난 듯하니."
하무백이 품에서 목함을 꺼내 식탁에 올려 두었다.
"히익?"
"따, 딸꾹."
그 모습에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뇌리에 박힌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그건?"
백리평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단목운뢰의 눈에는 어느새 기대가 어렸다.
딸각.
목함이 열렸고, 하얀 종이에 쌓인 단환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무량환을 챙겨 온 것이다.
"너희는 필요 없을 거고."
하무백의 말에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진산을 통해 전한 반량환을 이미 먹은 이들이었으니.
아직 그 약효를 모두 녹이는 데 바쁜 이들이다.
"너희들도 먹어볼래?"
하무백이 남궁지후, 남궁지유, 주우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뭔가요?"
남궁지후가 물었다.
이들 남매는 무량환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
"몸에 좋은 거."
하무백이 짧게 말했다.
몸에 좋은 것이라 하기에는 와룡대 생도들이 보이는 반응이 수상했다.
낙우진과 백리평의 표정도 썩 좋지는 않았고.
"싫음 말고."
하무백은 단환을 백리평과 단목운뢰, 낙우진 그리고 하설란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 모습에.
"저도 먹어보겠습니다."
주우명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호기심이었다.
대체 저게 무엇이길래 하는 호기심.
"저도 먹어볼게요."
남궁지유 역시 결정을 내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무언가 위험한 냄새가 났지만.
저 교관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저 정도 되는 교관이 몸에 좋은 거라 했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남궁지유는 모험을 택했다.
하무백이 남궁지후를 바라보았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
"이게 몸에 진짜 좋아. 뭐라 설명은 못 해주겠지만."
그 말에 와룡대 생도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도 당진산에게 한번 들었던 말이었으니.
하무백이 목함 뚜껑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 덮으려는 그때.
"저도 먹겠습니다."
남궁지후가 결정을 내렸다.
하무백은 무량환 하나를 꺼내 남궁지후에게 건네고 목함 뚜껑을 닫았다.
"그럼, 난 간다."
그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곧장 금룡루를 떠났다.
교룡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하무백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조금 전 남궁지후가 무량환을 먹겠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의 눈빛.
남궁지후에게 제왕검형에 대한 조언을 건네고 수련을 지켜보았을 때 봤던 눈빛과 같은 눈빛이었다.
언젠가 어디선가 봤던 것만 같은 눈빛.
지금 기억이 났다.
그 눈빛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무명······."
그랬다.
산월마림의 길잡이를 해주다 맞닥뜨렸던 위기의 순간.
필사의 각오로 빛나던 그의 눈빛.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죽어 있는 눈빛을 한 그였지만, 위기 순간에만은 눈빛이 살아났다.
절대 죽을 수 없는 절박한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하무백이 고개를 돌려 금룡루를 돌아보았다.
"흠. 남궁세가라······."
아직은 모른다.
당시 무명이 사용했던 검법 중에 남궁세가의 검법은 없었다.
오히려 삼재검법이나 오행검법 같은, 강호의 누구나 아는 기초적인 검법만을 사용했었으니.
"뭐, 지켜보면 알겠지."
그렇게 하무백은 무명과의 만남을 결론지었다.
"그나저나, 씀씀이가 헤퍼졌어. 쯧."
숙소에 가까워진 하무백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무량환.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단환이다.
해서 아껴서 사용했는데, 교룡관에서 이렇게 마구 쓰게 될 줄이야.
뭐, 쓴 만큼 다시 만들면 된다.
문제는 몇 가지 필수적인 약재를 모두 사용했다는 거다.
"언제 약재도 챙기러 가야겠네."
사문의 비고를 떠올리며 하무백이 말했다.
사부가 그곳에 약재가 남아 있다고 했었다.
심지어 한 가지는 아예 그곳에서만 자생한다고 했기에.
"무량환이 아직은 제법 남아 있으니."
뭐, 당장 급한 것은아니었다.
"그보다 무언가 잊은 것 같은데······."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게 뭔데?"
남궁지후의 물음.
이들은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
"나도 잘은 모르는데. 상당히 맛이 없는 모양이더라고."
주우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옥입니다."
은화량이 말했다.
"지옥이지요."
임대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남궁지후가 인상을 찡그렸다.
"몸에 좋은 거라며?"
"좋습니다."
영후인이 답했다.
"극락이지요."
나중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남궁지후의 인상이 더욱 찡그려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먹어 보면 알아. 쟤들이 먹은 건 이거보다 더 끔찍한 거였다고 하더라고."
단목운뢰는 망설이지 않고 무량환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우걱우걱 씹는 단목운뢰.
그래도 세 번째라 제법 버틸 만했다.
뭐, 단목운뢰에게 맛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걸 먹고 나서 증가할 내공이 중요했다.
백리평과 낙우진 역시 이제는 덤덤하게 먹었다.
세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주우명이 조심스레 무량환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으니.
입에 넣고.
한 번 씹었는데.
"크윽."
두 눈을 부릅떴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이것보다 더 지독한 게 있다고?'
주우명의 시선이 와룡대 생도들에게로 향했다.
새삼 저들이 엄청나게 대단해 보였다.
주우명은 필사적으로 단환을 씹어서 삼켰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모습에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옥이라는 말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 것이다.
"아!"
그때 하설란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왜 그래?"
남궁지유가 물었다.
"혀, 혈. 미각을 마비시키는 혈을 점하고 먹어야 하는데······."
그 말에 남궁지후와 남궁지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이것의 문제는 맛이었으니, 미각을 마비시키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혈이 있어?"
그녀도 그 혈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뭐, 어쩔 수 없네. 그냥 먹어야지."
남궁지후는 무량환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흡."
그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주우명과 그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겨우겨우 씹어 삼킨 그의 두 눈이 붉게 변해 있었다.
"너희는 이걸 어떻게 그렇게 태연히 먹은 거지?"
남궁지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세 번쯤 먹으니까 괜찮네."
백리평이 담담하게 답했다.
"이걸 세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백리평.
남궁지후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남은 이는 남궁지유와 하설란 두 사람.
남궁지유가 두 눈을 꼭 감고는 무량환을 먹었다.
맹룡대 생도들이 세 번이나 먹었다고 하니.
분명 효과가 있는 것이리라.
그녀 역시 그 끔찍한 맛을 느끼며 겨우 삼켰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지막 남은 하설란.
'언제까지 오라버니와 사부님께 의지할 수는 없어.'
그렇게 결정을 내렸고.
두 눈을 꼭 감고 무량환을 입에 넣었다.
"흐읍."
입에 넣자마자 느껴지는 기괴하고 끔찍한 맛.
이건 정말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는 맛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 모공은 모두 열려 버리는 듯한 감각.
미각에 대한 자극만으로 사람의 몸을 이렇게까지 바꿀 수 있다니.
하설란은 안간힘을 쓰며 무량환을 겨우겨우 씹어서 삼켰다.
'오, 오라버니!! 혈은 점해줬어야지요!!!'
마음속으로만 외치는 하설란의 소리 없는 아우성.
그것이 하무백에게 전해질 리는 없었다.
***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남궁휘는 전날 주루에서 싸온 식은 오리구이로 대강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객잔의 점소이에게 물어 교룡관으로 향했다.
어제 합석한 노인의 말대로 교룡관은 항시 일꾼을 구하고 있었다.
점소이도 알고 있을 정도.
다만 점소이가 안타까운 눈으로 남궁휘를 바라보며 알려 주었다.
한쪽 팔이 없어, 일꾼이 되기는 어려울 거라는 기색이 완연한 눈빛.
남궁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소이가 알려준 대로, 교룡관 서쪽 담장 쪽의 작은 문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니,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오?"
"일꾼으로 일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남궁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대번에 인상이 굳었다.
"무림인이오?"
허리의 검을 보고 묻는 것이다.
"아닙니다. 이건 몸이 이렇다 보니 혹시나 하여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남궁휘가 담담히 답했다.
"일은 제대로 할 수 있고?"
"이런 몸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장 일당은 안 주셔도 되니 며칠 제가 일하는 것을 보시고 결정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내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봐도 외팔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교룡관의 생도들이 어떤 인간들인가.
몇몇 미친놈들이 일꾼들을 힘들게 하여, 관두는 사람이 매일같이 한둘은 나온다.
오늘도 벌써 한 녀석이 그만두었다.
"뭐, 그럽시다. 일당 안 줬다고 난리 피우고 그래도 소용없소? 물론 일을 제대로 한다면 내 일당을 쳐서 주리다."
손 하나가 아쉬운 판이라 일단 하루 정도 일을 시켜보기로 한 사내다.
"이리로 들어와 잠깐 기다리시오."
그렇게 남궁휘는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사내가 한 노인과 함께 돌아왔다.
"어?"
안면이 있는 노인이다.
어제 함께 술잔을 기울이지 않았던가.
"자네로구만. 허. 추진력이 대단함세."
위지군 역시 남궁휘를 알아보고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