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하기 싫은 모양이군
따가운 햇살이 얼굴에 드리워 눈을 떴다.
맑은 하늘.
기분 좋은 아침이다.
남궁지유는 기지개를 켜며 조금 남아 있던 수마를 완전히 몰아냈다.
적당한 겉옷을 걸치고는 세안을 하러 방을 나섰다.
씻고 나니 그나마 실낱처럼 남아 있던 졸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전날 전해 받은 무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응?"
옷매무새를 살피던 남궁지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같은 자신의 무복인데, 무언가 느낌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럴 수가 있을까?
새로 지은 무복도 아니고, 입던 것을 일꾼들이 빨래만 해서 가져다준 것인데.
다르게 느껴지다니.
다시 한번 입고 있는 무복을 살폈다.
"더 깨끗해진 것 같은데······."
그랬다.
여느 때보다 유독 깨끗해져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 다르다고 느낀 것이다.
상쾌한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가 잘 풀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학당으로 향하는 길에 남궁지후를 만났다.
그의 무복에 시선이 갔다.
자신처럼 깨끗하게 변한 무복.
신기한 일이다.
다른 생도들의 무복과 비교했을 때 유독 깨끗했으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려나.
그저 기분 좋은 날이라 생각했다.
그냥 운이 좀 좋은 것이겠지.
"응? 누이도?"
"뭐가?"
남궁지후의 말에 남궁지유가 물었다.
"무복이 깨끗하다고."
놀라운 일이다.
이 무던한 동생이 무복의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라니.
그 정도로 깨끗했다.
대체 누가 세탁을 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어쩌다 우연히 그런 거겠지. 일솜씨가 좋은 일꾼이 들어왔는지도."
남궁지유의 말에 남궁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담룡각으로 향하는 길.
"어?"
한 일꾼이 눈에 띄었다.
잊을 수 없는 일꾼이다.
외팔에 얼굴 가득한 흉터.
인상적인 일꾼이었으니까.
어제 위 어르신이 나섰기에 망정이지, 정말 눈살 찌푸릴 곤혹스러운 일까지 겪지 않았던가.
주변을 살피니 다행히 황력이라는 그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남궁지유는 그 일꾼을 지나칠 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흠칫하면서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래도 저러는 건 너무 과한데··· 부담스럽게.'
그리 생각하며 담룡각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
상쾌한 아침이 밝았다.
일꾼들이 숙소를 나섰다.
마침 구석진 빈방이 생겼고.
객잔의 짐을 옮겨 남궁휘가 이곳에서 묵기 시작한 지도 이제 엿새째.
교룡관 안에서 묵으니 편했다.
온종일 교룡관 곳곳을 누빌 수 있었으니 .
일꾼이 일을 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물론 일꾼들이 갈 수 있는 곳 한정이지만.
그렇게 요즘 남궁휘가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맹룡대 연무장의 끝자락이다.
교룡관 중심을 향한 끝자락.
가끔 잠룡대나 와룡대 생도들이 담룡각을 갈 때 이곳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담룡서각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근처를 지나치는 길목이었다.
사흘째다.
중식과 석식 무렵 이 근처를 청소한 것이.
그러나 그 아이들은 볼 수가 없었다.
헌데 오늘.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 아이들이다.
비질에 집중하면서, 기감을 한계까지 퍼뜨려 둔 터다.
그 거리는 반경 삼 장(약 9미터).
무공을 숨긴 상태에서는 그것이 최대치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스치듯 보고, 나흘 만이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어디로 지나갈까.
궁금했으나, 고개를 들기가 두려웠다.
그저 두 아이의 기척에 집중하면서 비질을 더욱 열심히 했다.
그 방향이 남궁휘 자신이 있는 쪽이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았다.
정성을 다해 빨았던 두 아이의 무복.
오늘 그 무복을 입고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정성을 다했던 무복인데.
심장이 더욱 거칠게 뛰었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찰나.
남궁지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남궁휘를 알아본 듯했다.
하긴 이 모습을 기억 못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리라.
그런데.
그 아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건넸다.
이 흉측한 모습의 외팔이 일꾼에게.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인 남궁지유가 살짝이나마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를 건네다니.
남궁휘는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다시 들지를 못했다.
이미 눈시울이 시뻘겋게 변해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머리를 들어 혹시라도 그 아이가 그것을 볼까 두려웠기에 그저 계속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정말 착하게 자랐구나. 심성이 참으로 곱디 곱구나.'
작은 행동 하나였지만, 충분히 그 성정을 알 수 있는 행동이지 않았던가.
자신이 빨아준 무복을 입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오늘은 참으로 운수가 좋은 날인 것 같았다.
그날.
금룡루를 찾기 잘했다.
위 노인의 합석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잘했다.
일꾼으로 지원해 보라는 조언을 듣기를 정말 잘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이 있었으니.
두 아이의 기척이 점점 멀어졌다.
그럼에도 남궁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뚝.
눈물 한 방울이 막 비질을 끝낸 바닥을 적셨다.
***
오후 수련 시간.
남궁지후는 개인 수련에 들어갔다.
제왕검형을 갈고 닦기에 한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솔직한 심정에서는 오전 수업도 빠지고 싶었지만, 나름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결국 강호에서 살아야 하기에.
다양한 지식은 얻어야 했다.
가문에서 해주지 않으니 교룡관에서라도 얻어야지.
그렇게 검을 뽑았다.
낡은 검.
우스운 일이다.
나름의 명검이었다.
허나 하투제와 동투제를 겪으며 이리되었다.
가문에서 손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다.
이제는 이 애검과 작별을 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남궁지후도 느끼고 있었다.
검을 보는 남궁지유도 살짝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은 새로운 검을 마련해 주실 법도 한데······.'
남궁세가의 장자다.
그런데 저 검을 아직도 쓰고 있다니.
"뭐 하나? 안 움직이고."
어느새 나타난 하무백이 남궁지후에게 말했다.
그 말에 남궁지후는 천천히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하무백.
역시 재능이 있는 녀석이다.
아니 재능이 넘쳐나는 녀석이다.
제법 그 태가 나오고 있었으니.
교룡관.
각대문파에서는 정말 재능 있는 제자는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하무백이 강호에 나와서 본 정말 재능 있는 녀석들은 전부 교룡관에 있었다.
신기한 노릇이다.
정파 명숙이라는 인간들이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재능은 범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는 것인지.
"좋아."
그 말에 검을 움직이는 남궁지후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저 깐깐한 괴물에게 인정을 받았으니까.
"이제 한번 어울려 줄만 하겠군."
그 말에 남궁지후는 검을 멈출 뻔했다.
저 말의 의미 때문이다.
대련을 해주겠다는 것이었으니.
하무백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하기 싫은 모양이군."
그 말에 남궁지후는 더욱 제왕검형에 집중했다.
그렇게 전반부를 모두 펼치고.
하무백이 남궁지후를 향해 다가갔다.
"제왕검형이 아니라 대연검법으로 해라."
"네?"
"대연검법이 제왕검법의 씨앗이라 했지? 대연검법이 더욱 완벽해져야 제왕검법 또한 제 모습에 가까워진다."
"네."
진중한 얼굴을 한 하무백의 설명에 남궁지후가 수긍했다.
스르릉.
하무백이 검을 뽑았다.
타핫.
선공을 취한 것은 하무백.
그의 검이 곧장 남궁지후를 향해 날아갔다.
'대연검법?!?'
남궁지후는 대경했다.
어찌 외인이 이토록 완벽한 대연검법을 펼친단 말인가.
역시나 저 교관은 괴물이다.
배운 적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비급을 본 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냥 대연검법을 보았으리라.
본 것을 따라 펼치는 흉내.
그것만으로 저토록 완벽한 대연검법을 펼치다니.
잡념은 여기까지.
남궁지후의 검 역시 움직였다.
자신을 쪼갤 듯 날아오는 검을 응수하는 그의 검법 역시 대연검법.
챙!
채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무백의 검이 남궁지후의 빈틈을 쉼 없이 찔렀다.
그러면 남궁지후는 그곳을 막았다.
그렇게 어울리노라니.
남궁지후의 대연검법이 점점 더 완벽해졌다.
그럴 수밖에.
하무백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검법의 허점만을 노렸기에.
그것을 막아나가면서 자연스레 검법이 보완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지도 대련이었다.
남궁지유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저 교관은 어떻게 된 괴물이란 말인가.
상상을 초월한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니, 이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남궁지후의 두 눈의 초점이 점점 사라졌다.
그 모습에 남궁지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재빨리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았으니까.
'무아지경.'
남궁지후가 그 상태에 돌입한 것이다.
그저 대련하는 것만으로 거기까지 끌고 들어가다니.
하무백.
상상하는 것을 포기했다 했지만, 여전히 상상했나 보다.
이렇게 놀란 것을 보면.
'응? 역시 재능 있는 녀석들은.'
하무백 역시 남궁지후가 무아지경에 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저 검법의 허점만을 집요하게 공격한 것뿐인데.
그것을 막으면서 스스로 깨달아 저런 지경에 든다니.
'재수가 없어. 너무 빨라. 재미없게.'
누군가가 알았다면 쌍욕을 해도 수없이 했을 생각을 하는 하무백이다.
재능.
그것에 있어서 최고봉이 누구던가.
타문파의 절기를 몇 번 보는 것만으로 적당히 흉내를 내는 인간이.
재능있는 녀석들은 재수가 없다니.
그리 따지면 천하에서 가장 재수가 없어야 할 인간이 하무백 본인이었다.
'그래도 이왕 들어간 것이니 최대한 어울려 줘야지.'
그리 마음먹은 하무백은 남궁지후의 수준에 맞춰 계속해서 허점을 공략해 나갔다.
매 순간.
남궁지후의 검은 조금씩 완벽해져 갔다.
적어도 하무백의 눈에 보이는 대연검법의 허점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음이니.
물론 그 이상의 경지도 존재할 것이다.
하무백이 대연검법을 극한까지 익힌 것이 아니니.
그 부분은 온전히 남궁지후의 몫이었다.
여기까지 이끌어준 것만 해도 하무백은 충분한, 아니 과한 도움을 준 것이다.
흥을 돋우며 어울려 주길 얼마였을까.
챙강!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가 울리며.
휘리리릭.
남궁지후의 검 절반이 부러져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어······."
남궁지후의 무아지경도 깨졌다.
얼떨떨한 얼굴로 잠시 자신의 검을 바라보는 남궁지후.
그리고 찾아오는 탈력감에 더한 짙은 아쉬움.
조금만 더 그 감각을 느꼈더라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훌륭하다. 너무 욕심을 내면 오히려 주화입마에 든다."
그 심정을 짐작한 하무백이 무심히 툭 던지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남궁지후가 하무백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래. 당분간은 오늘 얻은 것을 네 것으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면 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이 떠났다.
둘만 남은 연무장.
두 사람의 시선은 남궁지후의 검에 고정되었다.
아쉬웠다.
저 검이 조금만 더 버텨줬으면.
그런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리에 동시에 떠올랐다.
'운수 좋은 날인 줄 알았더니.'
남궁지유가 아쉽다는 듯 생각했다.
아니, 운수 좋은 날은 맞았다.
남궁지후가 무아지경에까지 들지 않았던가.
다만 마무리가 이러니, 운수 좋은 날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기가 모호했다.
"검은 어떻게 하지? 수련해야 하는데?"
남궁지후가 무심히 툭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검은 저것 한 자루였으니.
다시 한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궁지유다.
"급한 대로 교룡관에서 지급되는 가검이라도 써야지. 나중에 괜찮은 대장간을 찾아서 주문을 넣든지 하고."
남궁지유의 말에 남궁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진 검편을 집어 검집에 넣었다.
부러졌으나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검이었으니.
그 아버지가 준 정말 몇 안 되는 선물 중 하나였으니.
그렇게 두 사람은 병기고를 찾았다.
지키는 이 없는 병기고.
"아무리 수련용 병기만 보관하는 곳이라지만 너무 허술한 거 아냐?"
남궁지후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네."
하지만 입구는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어디에 이야기해야 하지?"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남궁지후.
"허허. 무슨 일들이신가?"
그때 위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