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혹시 힘들겠는가?
"아, 어르신을 뵙습니다."
위지군의 등장에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는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위지군이 손을 내저었다.
"허허. 일꾼 노인네에게 예가 과하구만."
허나 남궁 남매는 이 노인이 보통 노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교관 하무백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찌 예를 차리지 않을까.
"그래, 여기는 어쩐 일들이신가?"
위지군이 다시 물었다.
"아, 제 검이 부러져서, 제게 지급된 수련용 가검을 찾으러 왔습니다."
위지군의 시선이 남궁지후의 검집에 닿았다.
"그렇구만. 이 꼴을 보고 당황했겠구만. 그래."
자물쇠를 가리키는 위지군.
곧 그는 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
"이곳은 내가 관리하는데, 마침 청소가 끝나서 당분간은 봉해두려고 자물쇠를 채웠네. 어차피 찾는 이들이 없어서 말이야. 내 실수할 뻔했구만."
끼익.
위지군이 문을 열자 경첩이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자, 자네 검을 찾아보게나."
위지군이 문을 활짝 열어주고 남궁지후가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검, 도, 창, 봉 등.
다양한 병기들이 가득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역시나 검과 도.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는 검을 빠르게 훑었다.
검들은 검집 없이 검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금세 자신들의 이름이 각인된 검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곳에서 가장 빛나고 있는 검 두 자루였으니.
자연스레 그것에 시선이 끌렸는데, 검신에 각인된 자신들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이게, 대체······."
남궁지후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작 수련용 가검이거늘.
대체 어떻게 관리를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남궁지유 역시 멍하니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본래 남궁지후만 검을 가지러 온 것이다.
그런데 남궁지유 역시 자신도 모르게 검을 챙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가검임에도 그녀를 유혹하듯 그 검신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음이니.
남궁지유는 그 빛깔에 저도 모르는 이끌림을 느낀 것이리라.
자신들의 검을 찾고 나니, 다른 병기들도 눈에 들어왔다.
다른 병기들 역시 번쩍번쩍하게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걸 전부 어르신께서 하신 건가요?"
남궁지후가 놀라서 물었다.
"내가 한 것도 좀 있고, 다른 사람이 한 것도 있고. 뭐, 이번에는 대부분 다른 이가 했지. 내가 다른 일을 좀 보느라 말이야. 허허. 그보다 그 두 자루는 검집을 입혀야겠는데? 기다려 보게나."
위지군은 그러고는 병기고의 구석으로 향했다.
커다란 천에 덮인 무더기.
천을 들추니 그 아래에 검집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여기 있었지. 그래. 허허. 대체 이걸 왜 이렇게 가져다 둔 건지는 나도 모르겠네만. 여기 있네."
검집 두 개를 건네받은 두 사람은 잠시 망설였다.
먼지 쌓인 검집에 검을 꽂으면 이 빛나는 검이 상할 것 같았다.
결국 두 사람은 검을 검대에 다시 올려두고 검집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야 가검을 꽂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병기고를 나왔다.
위지군은 다시 병기고의 입구에 자물쇠를 채우고 떠났다.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는 다시금 연무장으로 걸음했다.
'운수 좋은 날이 맞았나 봐.'
남궁지유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검이 부러지는 것을 보고 운수 좋은 날이 아니라 여겼는데.
덕분에 이런 검을 보게 되다니.
검 자체는 흔한 수련용 가검이었다.
다만, 대체 검을 어떻게 닦고 관리하면 이렇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에 깔끔한 무복까지.
오늘 하루.
운수가 좋은 것이 분명했다.
***
어느새 밤이 깊었다.
남궁휘는 어디선가 가져온 술을 홀로 자작하고 있었다.
"내 잠시 들어가도 되겠는가?"
"들어오시지요. 어르신."
위지군의 목소리에 남궁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래, 지내기는 어떤가?"
"배려해주신 덕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작은 다탁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침상 하나와 작은 다탁 하나, 그리고 옷장 하나가 전부인 작은 방이었지만.
일꾼이 홀로 이런 방을 사용한다니 호사라면 호사였다.
"일 하기는 괜찮고?"
"네. 어려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위지군의 물음에 남궁휘는 슬쩍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오늘은 그 아이들을 보지 않았던가.
그것도 자신이 정성 들여 세탁한 옷을 입고는.
"병기고의 병기들은 자네가 다 닦은 게지?"
"네. 제가 다 닦았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위지군.
"나도 한 잔 줄 텐가?"
그 말에 남궁휘는 술잔을 하나 꺼내 위지군에게 따라 주었다.
단번에 잔을 비운 위지군.
안주는 없었다.
그저 홀로 술만 자작하고 있던 남궁휘.
"죽엽청주인가? 깔끔하니 괜찮군."
위지군은 술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적응하고 있다 하니 다행이군. 내 자네에게 다른 곳도 좀 부탁하려는데 괜찮은가?"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허면, 내일 오후부터는 잠룡대 연무장 쪽을 청소해주게나. 내 알려줄 터이니."
위지군의 말에 남궁휘가 멈칫했다.
"자, 잠룡대 말씀입니까?"
목소리도 살짝 떨려 나왔다.
위지군은 심유한 눈빛으로 그런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혹시 힘들겠는가?"
"아, 아닙니다. 문제없습니다."
"좋구만. 그럼 내일 중식을 나와 함께 하고, 그리고 가도록 하지. 오늘 병기고를 보니 자네가 너무 잘해두었더군. 적어도 이달은 병기고 일이 없을 듯해서 잠룡대 연무장 쪽 청소를 부탁하는 걸세. 그럼 쉬시게나."
그 말을 끝으로 위지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휘의 방을 나갔다.
방문 앞에서 위지군에게 인사를 건넨 남궁휘가 다시금 다탁에 앉아 술잔에 술을 채웠다.
주책맞게 손이 살짝 떨렸다.
목으로 넘기는 죽엽청주.
달았다.
달기만 했다.
이런 맛의 술이 아닐진데, 남궁휘는 오직 단맛만이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잠룡대 연무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남궁지후와 남궁지유가 소속된 잠룡대.
내일 오후부터 어쩌면 두 아이를 좀 더 자주 마주치게 될지도 몰랐다.
한 잔 더 마시는 남궁휘.
이번 잔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목으로 넘겼는데.
여전히 달았다.
오늘 밤은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
햇살이 제법 따가워지고 있었다.
완연한 봄을 지나 이제 조금씩 더위가 시작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설빙은 오랜만에 학당이 아닌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전 시간은 늘 학당에 매여 있었는데, 이 상쾌한 공기를 쐬며 걷는 것이 얼마 만인지.
오후는 대연무장에서 맹룡대의 훈련에 매여 있었다.
자신에게 다 떠넘기고 또 사라진 하무백 덕에.
해서 오늘은 자신도 좀 쉬어 보자고, 아무도 없을 맹룡대 이십 조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일꾼인데 외팔이다.
'응?'
외팔이 일꾼이라니.
일하는 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 발 더 가까이 가서 열심히 비질하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검상으로 인한 흉터가 가득한 얼굴.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저 자가 어떻게······.'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궁휘가 한설빙을 발견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놀라기는 남궁휘 역시 마찬가지.
'호천단 부단주마저······.'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지나쳤고, 한설빙은 걸음의 방향을 바꿨다.
이십 조의 연무장이 아닌 칠 조의 연무장으로.
역시나 하무백은 바위 위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다, 단주님!"
얼마나 놀랐는지, 오랜만에 단주라는 호칭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만났던 시절엔 하무백이 단주였고, 한설빙 자신은 부단주였던 시기이니.
"뭐야? 피곤한데."
어제 나름 흥이 돋아 남궁지후를 상대해줬다.
무아지경에까지 드는 것을 보았으니, 나름 신경 써서 대련을 이끌어 주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심력 소모가 상당한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하무백이 피곤하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무백의 경지에서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그, 봤어요? 그 사람?"
"누구?"
"무, 무명이요. 무명."
그가 교룡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찾아와서 저리 호들갑이란 말인가.
아니, 그게 호들갑을 떨 일이기나 할까?
"봤지. 그게 뭐 어떻다고?"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하무백의 반응에 한설빙이 이내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신기하잖아요. 평생 그곳을 안 떠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교룡관 일꾼으로 나타났으니까요."
"내 생각에는 그 친구가 더 놀랐을 것 같은데? 호천단 부단주가 교룡관에서 교관이나 하고 있으니까?"
하무백의 물음에 한설빙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보다 너. 그 친구 수준은 제대로 파악은 하고 그러는 거냐?"
하무백의 물음에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 무공 수위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산월마림에서 만났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너 요즘 너무 노는 것 같다."
하무백의 말에 한설빙이 인상을 와락 썼다.
지금 자신이 누구 때문에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 친구 사부님이 데리고 다니시는데, 너보다 강한 것 같더라."
막 열리려던 입이 그 말에 닫혔다.
설마?
그럴 리가?
산월마림에서는 자신의 경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반박귀진에 들어선 것 같더라고. 그러니 그 마을을 떠났겠지. 목표한 성취는 이뤘으니."
그 말에 한설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반박귀진이라니.
당시 만났던 무명은 강하기는 했다.
그러나 고작 절정의 초입을 바라보던 무인이었다. 일류의 끝자락에 겨우 다다랐던.
그런데 지금은 초절정, 그것도 반박귀진?
자신조차 들지 못한 경지였다.
초절정에 들어선 후 벽에 막혀 닿지 못한 경지.
무명이 그 경지에 들었다 하니.
"수련을 해야겠네요. 저도. 정말 단주님 말씀대로 최근 너무 나태해졌어요. 제가 지금 누구 훈련이나 봐줄 때가 아닌데······."
그 말을 남기고 한설빙이 사라졌다.
다만.
마지막 말.
하무백은 그것이 걸렸다.
흡사 오늘부터 당장 맹룡대의 훈련에 빠지고 수련을 하겠다는 것 같아서.
***
담룡서각에서 위지군과 남궁휘가 나왔다.
이제부터 잠룡대의 연무장 쪽 청소를 할 예정이라 일부러 담룡서각에서 점심 식사를 마쳤다.
청소에 별달리 알려줄 것이 있을까.
다만 연무장이 어느 조의 연무장인지, 길은 어떤지 정도는 알려 주어야 했다.
그렇게 위지군과 빠르게 청소해야 할 구역을 한 바퀴 돈 남궁휘.
그 후로는 혼자서 비질을 시작했다.
황력과의 일 이후 위지군이 조치를 취한 것인지, 더 이상 시비를 거는 관리인은 없었다.
오늘 오전에도 황력과 한 번 마주쳤는데, 그는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쳤다.
그랬기에 남궁휘는 마음 편히 주변 청소를 할 수 있었다.
남궁휘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씩 잠룡대 이 년차 일 조의 연무장 쪽으로 청소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비질하다 보니.
어느새 잠룡대 일 조의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네 명의 생도가 열심히 각자의 병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중 남궁휘의 눈에 들어오는 병기는 딱 두 개였다.
눈이 시리도록, 태양보다 찬란히 빛나는 가검 두 자루.
바로 남궁지후와 남궁지유가 휘두르는 검이었다.
'저 검도 가져갔구나.'
왈칵.
눈물이 다시금 흘러나오려 했다.
남궁휘는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비질에 열중했다.
영호준이 남궁휘를 발견하고 힐끔 바라보았으나 이내 신경을 껐다.
일꾼들이 연무장 주변을 청소하는 일이야 일상이었다.
외팔이에, 얼굴에 흉측한 흉터가 가득한 일꾼이라는 게 신기했지만.
그뿐.
자신의 수련에 더욱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남궁휘는 잠시 동안 잠룡대 일 조의 연무장 주변을 청소한 후 자리를 떴다.
언제까지고 그곳만 쓸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 그는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대연검법. 훌륭하다만, 부족하구나······.'
자신이 저 나이였을 때를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는 남궁지후였다.
허나, 현재 남궁휘의 경지에서 보자면 분명 아쉬움이 여기저기 보였다.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했다.
직접 알려주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하는 상황이요, 입장인지라.
순간 얼굴이 욱신거렸다.
그날 이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미 사라지고 없는 오른팔 어름도 지끈거렸다.
다시는 검을 들 수 없는 팔임에도.
남궁지후가 펼쳤던 대연검법의 움직임이 남궁휘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