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누, 누구십니까?
죽엽청주를 꺼내 들었다.
아직 반 병 넘게 남아있었다.
생각날 때 가끔 자기 전 한 잔 정도 자작하는 술이었기에.
마신 것보다 남은 것이 더 많았다.
전날 위지군의 방문으로 두 사람이 전부 석 잔을 마신 것이 가장 많이 마신 날이다.
헌데 오늘은 잔으로는 이 답답함이 가시질 않을 것 같았다.
남궁휘는 술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작은 방에 있으면 답답함이 더욱 가중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마침 반달이 밝게 떠 있었다.
'훗. 달도 내 꼴과 같구나.'
꼭 한쪽 팔이 없는 자신과 같은 모습이다.
하필 반듯하게 사라진 곳이 오른쪽인 상현달이다.
그대로 병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지근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가슴의 답답함은 씻기지가 않았다.
"허허. 갑자기 무에 그리 답답한가?"
어느새 나타난 위지군이 물었다.
"갑자기 가슴에 울화가 치미는군요."
남궁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병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간다.
"흐음."
위지군은 그런 남궁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룡대 연무장 쪽을 맡긴 것이 실수였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의 검을 그렇게 깨끗하게 닦는 자네가 자기 마음 하나를 못 닦는구만. 그럼 검을 쓰면서 울화를 털어보게. 몸을 움직여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그 울화도 함께 흘러나갈지도 모를 일이지."
위지군의 말에 술병을 내리는 남궁휘.
물끄러미 위지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 있겠나? 일꾼이라고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겠는가? 우리 일과 시간도 끝이네. 이제 무얼 하든 자유지. 자네가 그렇게 술을 마시는 것처럼 말일세."
위지군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남궁휘는 흠칫하며 왼손에 든 술병을 바라보았다.
그래.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데, 몸을 움직이는 것쯤이야.
"뭐, 적당히 생도들 눈에 안 띄는 연무장 구석이면 괜찮을 걸세. 내 보니 잠룡대 일 년차 이십 조 연무장이 제일 사람이 없더구만."
한쪽 눈을 찡긋한 후 위지군은 자리를 떠났다.
남궁휘는 방으로 들어가 검을 챙겼다.
그리고 조용히 위지군이 알려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려 마주치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서 움직였다.
이 야심한 시각에 일꾼이 검을 들고 교룡관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도착한 연무장.
과연 위지군의 말대로였다.
그냥 봐도 안다.
이 연무장을 사용하는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지는.
적어도 이 연무장의 주인들은 이 야심한 밤에 이곳을 찾을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남궁휘는 안심하고 검을 뽑을 수 있었다.
스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혔다.
순백색의 검신.
잘 손질된 검이다.
남궁지후와 남궁지유의 가검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검.
남궁휘가 익힌 검법은 대연검법이 유일했다.
그 이상의 검법은 익히지 못했다.
아니, 익힐 수 있었으나 기회를 놓쳤다.
대연검법의 대성을 인정받아 상위의 검법을 익힐 기회를 얻었으나, 소가주의 꼬드김에 외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소가주는 외유에서 그 검법을 자신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본가로 복귀 후 더 상위의 검법, 창궁무애검을 익힐 수 있게 해주겠다며.
창궁무애검법.
남궁의 성을 가진 이들 중 직계 혹은 직계에 가장 가까운 방계만 익힐 수 있는 남궁세가의 성명 절기이다.
제왕검형은 가주만이 전부 익힐 수 있고, 그 형제들만이 전반부를 익히기에 사실상 논외다.
강호에 남궁세가의 명성을 드높이는 검법은 곧 창궁무애검이다.
남궁세가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검법.
방계 중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방계인 남궁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검법인 것이다.
소가주는 외유를 함께 해주면, 자신의 직권으로 그 검법을 익히게 해주겠다 했다.
과거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니었기에.
무공에 대한 욕심으로 따라나섰던 길.
'그 길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인 줄은 몰랐지.'
대연십삼검뢰(大行十三劍雷).
거기에서 만족을 했어야 했다.
그것도 어린 나이에 대연검법을 대성한 재능을 인정받아 얻은 기회였거늘.
검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과거의 잡념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래서는 검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머리를 세차게 털어 잡념을 흩었다.
그리고 다시 대연검법의 기수식을 취한 남궁휘.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검을 든 좌수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왼팔밖에 없으니.
그렇게 본디의 모습이 아닌, 좌수검의 모습으로 바뀐 대연검법이 천천히 남궁휘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천천히, 허나 빠르게, 아름답게.
밤의 허공을 남궁휘의 새하얀 검신이 수 놓았다.
무창에 들어온 후 처음 펼치는 검법이다.
그간 그럴 기회가 없었으니.
그 사이 심정의 변화가 컸기 때문일까.
검에도 변화가 생겼다.
마을을 떠날 때보다 한층 진일보한 검.
남궁휘 역시 그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더욱 검법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가슴의 울화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검이 남아있을 뿐.
남궁휘는 그렇게 무아지경에 들었다.
***
'내 걸로 만들어야 한다.'
늦은 밤.
남궁지후는 다시 검을 챙겨 들고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무백과의 대련에서 얻었던 것.
그것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깨달음으로만 끝날 수 있음이니.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려면, 계속해서 수련하는 방법뿐이다.
그랬기에 남궁지후는 검을 휘두르려 아무도 없는 잠룡대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반달만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검이 공간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룡대 일 조의 연무장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남궁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검을 휘두르고 있을 만한 잠룡대 생도가 그가 알기로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남궁지후의 걸음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정말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목적지와 많이 떨어지지도 않은 듯했다.
'잠룡대 일 년차 이십 조의 연무장 같은데?'
가까이 갈수록 의아함은 커져만 갔다.
그럴 수밖에.
남궁지후가 알기로 그 생도들은 그렇게 열심인 친구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도착한 연무장.
남궁지후는 깜짝 놀랐다.
낯이 익은 인물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외팔이에 얼굴의 흉터.
얼마 전 새로 온 일꾼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런 일꾼이 어찌 저리 아름다운 검을 펼친단 말인가.
그것도 한쪽 팔이 없는 채, 왼팔로.
남궁지후는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사내가 펼치는 검법이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든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럴 수밖에.
좌수검으로 펼치고 있었기에 조금 늦게 알아보았지만.
저건 분명.
'대연검법!'
남궁세가의 독문검법이다.
비록 남궁세가의 하급 무인들이 익히는 검법이긴 하지만, 외부인은 절대로 익힐 수 없는 검법이기도 했다.
그것을 지금 교룡관의 일꾼이 펼치고 있는 것이다.
맹세코 세가에서 저런 이를 본 적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기도 잠시.
남궁지후는 사내가 펼치는 대연검법에 빠져들었다.
이전이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하무백과의 대련으로 깨닫고 나서야 볼 수 있는 완벽함, 그것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음이니.
무아지경에 빠져서 검을 휘두르길 얼마일까.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은 모두 갈무리하고 검을 내렸다.
"후우."
깊은 호흡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기분은 산뜻했다.
울화는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잘려 사라진 오른팔에서 느껴지던 환상통도 이제는 없다.
얼굴의 흉터를 괴롭히던 그 통증도 이제는 없다.
그저 후련한 마음뿐.
이곳에서 한바탕 검을 휘두르며 모두 쏟아낼 수 있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았군.'
앞으로 종종 이렇게 검을 휘둘러야겠다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돌리는 찰나.
"!?!······."
남궁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무아지경에 빠져 누군가가 근처에 다가오는 것을 못 느꼈는데.
그 사이.
남궁지후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멍하니 충격을 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남궁지후의 두 눈에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남궁휘의 검이 준 충격에서 이제 벗어난 것이다.
"누, 누구십니까?"
남궁지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단언컨대, 이렇게 완벽한 대연검법은 세가에서도 보지 못했다.
가주인 아버지도, 남궁제일검이라는 전대의 어르신도.
그 누구도 이런 대연검법은 보여주지 못했으니.
자연히 그 정체가 궁금해진 터.
"그저 교룡관의 일꾼일 뿐이외다. 공자께 못난 모습을 보여 눈을 어지럽힌 것은 사과드리리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말만 남기고, 남궁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저, 저기······."
남궁지후는 손을 뻗으려 하였으나 상대의 뒷모습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쫓아갈까 하였으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폭발하고 있는 이 영감을 정리해야 했으니.
그리고 펼쳐봐야 했으니.
'일단, 급한 것 먼저. 저 사람을 찾는 것은 그 뒤에 해도 된다.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자신의 연무장까지 갈 여유도 없었다.
남궁지후는 조금 전까지 남궁휘가 검을 휘둘렀던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대연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흐음.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본 하무백.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이 남궁세가의 사람이었나 보네요."
한설빙이 곁에서 말했다.
"무명이 아니고, 남휘."
하무백이 한설빙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면 남궁휘겠네요. 한번 알아볼까요?"
한설빙이 물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짙은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귀찮은데······."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연이 안 궁금하세요?"
"글쎄······."
하무백이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 남휘라는 저 일꾼의 눈빛 못 보셨어요? 예사 눈빛이 아니었는데. 게다가 남궁세가의 대연검법을 저렇게······."
한설빙이 흥분해서 말했다.
하무백이 기막을 둘러친 상태라 두 사람의 대화가 새어나갈 일은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그 자리를 떠났다.
한설빙은 조금 더 남아 남궁지후의 수련을 지켜보다가 곧 자리를 떠났다.
멀리서 남궁휘를 지켜본 시선은 또 하나 있었다.
위지군.
일부러 이십 조의 연무장을 알려줬던 그였다.
"가슴 깊은 사연인 모양이로구나."
담담히 중얼거리는 그의 두 눈에는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
남궁화현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조카들 때문이다.
그간의 성취를 보기 위해 불러 모았는데, 하나같이 그 성취가 미미했다.
아니, 이 정도 기간에 제왕검형을 이만큼이나 익힌 것은 칭찬해 마땅했다.
허나, 비교 대상이 문제였다.
자신의 장남인 남궁지후.
그 녀석이라면, 자신이 단 한 번 보여준 걸로도 저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을 터다.
더군다나 필사한 비급까지 가지고 가지 않았던가.
남궁화현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들은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리해서는 누구도 소가주가 될 수 없겠구나. 남궁의 제일검법인 제왕검형이 고작 그런 모습이어서야. 쯧쯧."
혀를 찬 남궁화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연무장을 벗어났다.
연무장에 남은 이들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쥘 뿐이다.
가주의 집무실로 돌아온 남궁화현은 답답함을 풀 길이 없었다.
"가주님. 일영입니다."
그때. 천장 위에서 은밀히 들리는 목소리.
"어찌 되었느냐?"
"대공자는 제왕검형의 수련보다는 대연검법의 수련에 매진하는 듯합니다."
돌아온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궁화현.
"그게 무슨 말이냐?"
"교룡관의 경계가 삼엄하여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사람을 써서 알아보았는데. 전해오는 말을 분석해보면 그 검법이 제왕검형이 아니라, 대연검법인 듯합니다."
일영의 말에 남궁화현은 도통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뛰어난 아이가 뜬금없이 대연검법이라니.
"알았다. 좀 더 지켜보도록."
"네."
그 말을 끝으로 일영은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남궁화현.
"대연검법이라······."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이 세상에는 없는.
'역시 핏줄이라는것인가······.'
남궁화현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헛된 일에 집중하여 제왕검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남궁화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