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그 자가 남궁휘라네요
오후 수련이 끝난 저녁 시간.
전서구 한 마리가 한설빙의 오른손 끝에 내려앉았다.
새까만 흑비둘기.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까마귀라고 착각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냥 털빛이 까맣기만 한 비둘기가 아니다.
영물이었다.
천리흑구(千里黑鳩).
하루에 최대 삼천 리까지 날아갈 수 있으며, 한 번 간 장소와 한 번 만난 사람은 잊지 않는 기억력까지 가지고 있는 영물.
게다가 어지간한 매와 싸워서도 지지 않는 강인함까지.
전서구로 쓰기에는 최적이었지만 길들이기가 어려워 극히 귀한 영물이었다.
그런 영물이 한설빙의 손에 날아내린 것이다.
"백아. 빨리 다녀왔구나."
한설빙이 빙긋 웃으며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설빙은 백아의 다리에서 전서통을 풀러 내고는 손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푸드득.
백아는 곧장 숲을 향해 날아갔다.
한설빙이 부르면 다시 찾아오리라.
"그럼 어디 어떤 사람인지, 좀 볼까."
한설빙이 전서를 펴 보았다.
호천단의 또 다른 부단주 담무흔의 필체다.
전서를 펴자마자 한설빙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시작은 온통 불평불만에 투덜거림뿐이었으니.
요약하자면 혼자서 호천단 뛰쳐나가서 편한 시간 보내고 있으니 좋냐는 거였다.
"자기도 관두고 나오라니까. 괜히 칭얼거리기는."
한설빙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담무흔은 호천단을 나올 수가 없다. 아니 호천단에서 나올지라도 정천맹의 본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이유로 자신이 그에게 전서를 보낸 것이기도 하고.
전서를 찬찬히 살핀 한설빙은 삼매진화로 화르륵 태워버렸다.
"으음."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예사 사연은 아니었다.
한설빙은 걸음을 바삐 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하무백이 있는 곳.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이었다.
저녁 식사 후 지정석인 바위 위에 만사 귀찮다는 듯 널브러져 있는 하무백.
"무슨 일이야?"
연무장에 들어서는 한설빙을 힐끔 보며 물었다.
"남휘. 그 사람 때문에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하무백은 연무장 주변에 기막을 둘러쳤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기감으로 확인했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이 좋았으니.
"그제 궁금하다 하더니, 이틀만에······. 발리도 알아 왔다. 무흔이에게 물은 거냐?"
고개를 끄덕이는 한설빙.
"백아를 보낸 거고?"
다시 한번 한설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는 맹의 영물일 텐데. 사사로이 그리 쓰면 되냐? 애초에 호천단을 나오면서 데려온 것 자체가······. 쯧."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허나 한설빙은 당당했다.
"저는 백아 데려온 적 없거든요? 백아가 절 따라왔지."
그랬다.
호천단에 배정된 비상 전서구가 백아였다.
헌데 그 녀석이 유독 한설빙을 잘 따르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터 한설빙만 따랐다.
해서 지금은 무창에까지 따라와 있는 상태였고.
"그래. 그래서 무흔이가 뭐라는데?"
"혼자서 꿀 빨고 있으니 좋냐고 하던데요."
그녀의 말에 하무백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나보고?"
그 반응에 한설빙이 피식 웃었다.
"찔리긴 하신가 봐요? 저 보고요."
돌아온 대답에 표정을 푸는 하무백.
"그러면 제 놈도 꿀 빨러 오라고 해."
"다음에 만나면 그렇게 전할게요."
안다.
하무백도, 한설빙도.
그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남휘, 그러니까 남궁휘요."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한설빙.
"남궁세가에서 휘(徵)라는 이름을 쓴 이는 최근에 두 사람. 한 사람은 현재 세가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십여 년 전에 실종되었다네요."
그 말만 들어도 남궁휘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십여 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인물일 터.
그때라면 혈교와 마교도 세력만 넓히고 있을 때.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다.
"산월마림이 한창 세를 불릴 때로군."
지금보다 훨씬 강성하던 때.
하무백도 듣기만 했던 시절이다.
그때라면 거지로 천하를 유랑하던 때이니.
한설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실종된 이유가······."
"그게 왜?"
"전에 남궁세가주 사연 이야기했었죠?"
얼마 전의 일이다.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길을 잘못 들었다던 호위무사. 그 자가 남궁휘라네요."
하무백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실종된 호위무사가 살아 있다.
헌데 이름을 숨기고 살다가, 이제야 강호에 나왔다.
그런데 여전히 가명을 쓰고 있다.
자신들이야 그가 대연검법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기에, 그 성이 남궁임을 알아차렸지만.
외팔이에 얼굴 가득한 흉터를 보고 그 누가 남궁을 떠올릴까.
"왜 남궁세가에 돌아가지 않은 거지?"
"돌아가지 못할 사연이 있는 거겠죠."
하무백의 의문에 한설빙이 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남궁지후를 보던 그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 술법진이··· 남궁의 핏줄인지만 확인한다고 했었지?"
"네."
냄새가 났다.
추악하면서도 한없이 슬플지도 모르는 냄새가.
***
추동은 술법사다.
그것도 모산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다.
문파 내의 거의 모든 술법에 통달한 나이가 스물.
서른이 되었을 때는 무림의 술법 대부분이 완숙의 경지에 올랐었다.
그때 찾아온 것이 자만과 나태였다.
술법은 너무 쉬웠고, 세상은 재미가 없었다.
그런 그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도박이었다.
아슬아슬한 패에서 승부를 걸어 이겼을 때의 그 짜릿함.
그것은 희열이었고, 살아있음의 증명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문파의 공금에까지 손을 댔다가 발각되어, 단전을 파괴당한 채 모산파에서 내쳐졌다.
한쪽 눈을 잃은 것은 덤이었다.
사정없는 사파였던 모산파였기에 그 정도로 그친 것도 크나큰 자비였다.
당장 죽임을 당할 만한 일이었으니.
그의 재능을 어여삐 여겼던 그의 사부가 빌고 빌어서 이루어진 선처였다.
그럼에도 추동은 도박을 놓을 수 없었다.
점을 봐주고, 복채로 받은 돈을 도박에 탕진했다.
도박에서 잃기만 하는 점쟁이의 말을 누가 믿을까.
해서 그는 한 마을에서 오래 머물지를 못했다.
천하를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찾아온 한 사내.
남궁의 소가주라 했다.
그가 자신에게 원한 것은 한 가지 술법이었고, 다행히 그 술법에는 단전이 필요가 없었다.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술법.
회임의 감별과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는 것이었다.
두 번을 해줬고, 어마어마한 돈을 받았다.
물론 일 년도 되지 않아 그 돈을 모두 탕진했지만.
그때 깨달았다.
"클클. 부자들에게 회임한 아이가 아들인지 알아봐 주는 게 그리 돈이 될 줄이야. 크크."
그렇게 천하를 떠돌며 돈을 벌고 돈을 잃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추동은 오늘 저녁 무창에 접어들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부자를 만나 돈을 벌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
해정.
약속한 시각이다.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는 연무장을 찾았다.
그곳에는 남궁휘가 먼저 나와 있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남궁지후.
남궁휘 역시 담담하게 허리를 숙였다.
"직계 자제이신 듯한데 어이해 대연검법 따위에 목을 매는 것입니까?"
남궁휘는 남궁지후를 보자마자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물었다.
"제가 가야 할 길이 대연검법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돌아온 물음.
남궁지후는 잠시 입을 닫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제왕검형."
짧은 한마디.
그러나 무겁고도 무거운 한 마디였다.
남궁휘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제왕검형으로 나아가는데 대연검법을 수련한다니 .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다.
대연검법이 별 볼 일 없는 검법임은 천하에서 남궁휘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터.
허나 제왕검형에 이르는 길이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그릇은 대연검법까지인 것을.
"알겠습니다. 못난 실력이지만 할 수 있는 한 도와드리지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남궁휘.
남궁지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바로 가검을 뽑아 들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궁지후는 대연검법을 펼쳤다.
천천히 신중하게.
일 검, 일 검에 정성을 다했다.
남궁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니, 남궁지후가 움직이는 검에 빠져들었다.
저 얼마나 아름다운 검인가.
자신이 저 정도 경지의 대연검법을 펼쳤을 때가 언제였던가.
적어도 남궁지후의 나이에는 불가능했다.
아마도 육 년 전?
그때쯤 자신의 경지가 저 정도였으리라.
헌데 남궁지후는 고작 저 나이에 저런 경지라니.
대견하고도 기특했다.
그렇게 남궁지후의 검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느새 모든 검법을 펼친 남궁지후가 남궁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한 번 더 펼쳐보시지요."
남궁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남궁지후는 다시금 대연검법을 펼쳤다.
남궁지유는 한발 물러서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남궁지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다시금 남궁휘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냥 그렇게 시선이 움직였다.
남궁지후가 펼치는 검법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번째가 끝난 후 남궁지후는 호흡을 정리했다.
그리고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훌륭합니다.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합니다."
"선배님의 대연검법은 더 훌륭했습니다. 대연검법 너머의 그 어딘가에 닿아있는 듯했습니다."
남궁지후가 답했다.
그 말에 남궁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대연검법 너머의 그 어딘가.
그곳에 자신의 발이 닿았을 때,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었으니까.
"그러면······."
남궁휘는 자신이 남궁지후의 대연검법에서 느낀 것을 하나, 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남궁지후는 두 눈을 빛내며 그 말을 경청했다.
남궁휘가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설명해 준 부분을 천천히 시연해 보였다.
"이 부분에서는 힘을 삼 푼 정도 빼고 조금 더 부드럽게 넘기는 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남궁지후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던 차, 남궁지후의 눈에 남궁휘의 검이 들어왔다.
새하얀 검신.
마친 자신과 누이의 가검과 필적할 정도로 깨끗하게 관리된 검이었다.
'이 분이었구나.'
남궁지후는 다시 검법을 펼쳤다.
"그 부분은 좀 더 강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뒤덮는다는 느낌으로 펼쳐야 합니다. 대연이라는 이름 그대로, 크고 또 넓게."
다시 설명을 듣고, 다시 펼친다.
수차례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전날의 두근거림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검을 가르치고 익히는 데서 오는 희열이 자리했다.
남궁지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저 모습은 마치.
'사이 좋은 부자지간 같네······.'
그러다 흠칫 놀라는 남궁지유.
자신이 방금 떠올린 생각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
난생 처음 이곳에서 만난 남궁세가의 사람에게서 아버지를 떠올리다니.
남궁지유가 고개를 저었다.
하무백이 학당의 지붕에 올라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곁에는 위지군이 있었다.
"어떠냐?"
"제법이네요."
남궁휘의 실력에 대한 평이었다.
"내 눈에는 참 행복해 보이는 부자지간처럼 보인다만."
물음과 대답의 초점이 달랐다.
하무백은 물끄러미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리 보면 그리 보였다.
두 사람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아니, 어쩌면 한 사람은 인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부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남휘, 아니 남궁휘라 하였더냐? 더 친구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지. 천륜을 거스를 사람이 아니다."
"허면 다른 사람이 천륜을 거스른 모양이군요."
하무백이 담담히 답했다.
"거스른다고 거슬러지면 그것이 천륜이겠더냐. 저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남궁휘와 남궁지후의 모습을 바라보는 위지군의 눈빛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의 수련은 두 시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남궁지후가 땀에 흠뻑 젖은 채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음은 닷새 후에 하도록 하지요."
마주 허리를 숙인 남궁휘가 먼저 몸을 돌렸다.
그제야 대연검법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남궁휘.
심장이 무섭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저 아이와 대연검법을 논하며 가르침을 주고받게 될 줄이야.
꿈에서조차 감히 상상한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나 이미 돌아선 남궁휘였기에 그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무백도, 위지군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