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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240화 (240/312)

240화. 바다, 대해다

정천맹주 소휘웅.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다른 서류가 아니었다.

호천단주의 휴가 요청서.

그래.

호천단주 역시 사람이고, 보장된 휴가가 있었다.

그런데도 참 생소한 서류였다.

그가 기억하기로 전임 호천단주는 휴가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한 번이었던가?'

헌데 지금의 호천단주는 부임하고 일 년이 조금 넘었는데, 휴가를 요청했다.

그것도 제법 긴 장기휴가이다.

뭐,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허수아비 단주.

자신 역시 중요한 일은 전부 부단주인 담무흔을 통하지 않던가.

분명 목적이 있어서 세가의 힘까지 동원해 호천단주가 되었을 텐데.

그간 너무 조용했던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기휴가라.

소휘웅이 책상 한 곳을 톡톡 두드렸다.

"어쩌면 이게 호천단주가 된 목적인지도 모르겠군."

지금까지 조용하던 인간의 첫 움직임이었으니 그리 생각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야."

소휘웅은 요청서에 시원하게 수결을 해주었다.

어차피 있든 없든 상관없는 인간이었으니.

그리고는 담무흔을 은밀히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맹주의 집무실에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

그러나 담무흔의 모습은 없었다.

그의 목소리만 울릴 뿐.

"호천단주가 장기휴가를 요청했더군."

"네."

담무흔이 짧게 답했다.

"무슨 일인 것 같은가?"

"목적한 바를 찾은 것 같습니다."

담무흔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휘웅.

"그간 만박당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니까요. 얼마 전 만박당을 다녀온 후 휴가를 요청했으니. 그와 관련 있을 듯합니다."

당연한 추측.

"따라붙게나."

소휘웅이 짧게 명했다.

"알겠습니다."

담무흔은 짧게 답했고, 금세 그의 기척은 사라졌다.

"종남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군."

소휘웅이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본 호천단주 남궁화우의 얼굴은 고작 호천단주로 만족할 상이 아니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소휘웅이 창가로 다가갔다.

맹주전.

최상층의 집무실.

드넓은 정천맹에서 이보다 높은 곳은 없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정천맹의 풍경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일이 이렇게 흐를 줄이야."

소휘웅의 얼굴에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호천단주 하무백.

그가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좌천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양팔이 잘린 듯한 심정이었다.

하무백은 소휘웅에게 있어 오른팔 정도의 존재가 아니었다.

굳이 신체 부위에 비유해야 한다면 양쪽 팔 이상의 존재였으니.

헌데.

그가 교룡관으로 간 이후 상황이 묘하게 흘렀다.

팽가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연가의 소가주가 죽었다.

종남은 장문인이 바뀌었다.

그들 모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구성된 백도회.

맹주 소휘웅의 지지 세력인 신진팔문의 반대세력 아니던가.

소휘웅의 힘을 약하게 하려 백도회가 하무백을 맹에서 내쳤는데, 그 결과가 오히려 백도회의 약화를 불러왔다.

"이래서 세상일은 한 치 앞을 모르고, 재미난 거겠지. 후후."

소휘웅은 기분 좋게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하무백을 어떻게든 빨리 본맹으로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팽가와의 그 일 이후로는 당분간 지켜보자 놓아두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남궁세가와도 무슨 사달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이 맞았음은 곧 드러났다.

담무흔이 은밀히 전한 소식에 남궁화우가 무창으로 향했다고 하였으니.

***

늦은 밤.

그럼에도 제법 더웠다.

오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투제가 열리는 하지까지 이제 한 달 남짓한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은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남궁지후 역시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한 달 후.

교룡관의 전반기가 끝나면, 세가로 돌아가 소가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제왕검형을 완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 남궁지후가 펼치고 있는 검법은 대연검법이었다.

삼재검법으로 가볍게 몸을 데운 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대연검법.

남궁휘를 처음 만나 펼쳤던 대연검법과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남궁휘는 그런 남궁지후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재라는 말로는 부족한 천재였다.

'한 발만 더 나가면 벽을 넘을 것 같은데.'

그게 남궁휘의 눈에는 보였다.

그랬기에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저 다음은 자신이 더 가르칠 것이 없었다.

가르쳐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의 끝에 이미 도달했으니.

그러니 야밤의 수련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음부터는 오롯이 남궁지후 혼자의 문제였으니 .

그렇게 대연검법을 한 번 펼친 남궁지후가 가만히 호흡을 정리했다.

"훌륭하군요. 더 이상 제가 가르칠 것은 없을 듯합니다."

남궁휘가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남궁지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날 선배님이 보여주셨던 그 검이 아닙니다."

욕심도 많았다.

"그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벽을 넘어야 할 일이지요. 누군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궁휘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 남궁지후.

"그러면······."

"제가 수련을 도와드리는 일은 오늘이 마지막일 듯합니다."

남궁휘의 말에 남궁지후는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생각 이상의 충격이었다.

마치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이런 감정에 남궁지후 스스로도 놀랐다.

하무백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그런 느낌은 한쪽에서 수련을 지켜보던 남궁지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의 수련을 지켜본 것뿐인데.

이제 더 이상 이러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아려 왔으니까.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대체 왜.

비단 두 사람만 그런 아쉬움을 느끼는 건 아닌 듯했다.

그 말을 한 남궁휘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검을 맞댄 적은 없었다.

그저 펼치고, 보고 알려주고, 시연해주었을 뿐.

하무백과는 가르침의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남궁지후의 요청에 묵묵히 있던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니 그 또한 나쁘지 않겠군요. 외팔이의 좌수검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요."

이대로 마무리하기에는 남궁휘 역시 아쉬웠다.

저 아이와 한 번쯤 검을 맞대고 싶었다.

다만 그랬다가는 너무 벅차서 제대로 검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아 그러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인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두 아이와의 만남에 제법 익숙해졌으니까.

두 사람은 검을 뽑아 들고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먼저 움직인 것은 남궁지후였다.

대연검법의 기수식에서 첫 번째 초식으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검의 움직임.

부드럽고 막힘 없었으며, 크고 넓었다.

가히 완성된 대연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남궁휘가 거기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의 움직임은 남궁지후의 그것과 같았으며 또 달랐다.

단순히 좌수검이라 다른 것이 아니었다.

검이 담고 있는 그 오의가 달랐다.

직접 눈앞에서 상대하니 남궁지후는 그것을 절절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다. 대해(大海)다.'

언젠가 강소성의 동쪽 끝자락 어느 마을에서 바다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끝이 없이 펼쳐진 물의 향연.

동정호나 태호 같은 거대한 호수와는 다른 웅장함이 있었다.

하늘과 맞닿아 드넓게 펼쳐진 끝없는 바다.

대해라는 말의 의미를 그날 처음 눈으로 보았었다.

그런데 지금 남궁휘가 검으로 그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었다.

대연검법을 완벽하게 익혔기에 남궁지후는 비로소 남궁휘의 검에 담긴 대해를 볼 수 있었다.

지난번에는 검을 보았으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창궁무애검이 하늘이라면 대연검법은 바다였던 것이다.

남궁지후의 머릿속에서 격렬한 폭발이 몇 번이고 터졌다.

두 눈의 초점이 사라졌고, 무아지경에 들었다.

남궁휘는 그 기색을 바로 눈치챘다.

남궁지유 역시 마찬가지.

남궁휘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전력을 다해 대연검법을 펼쳤다.

자신의 검법이 이 아이에게 무언가 실마리를 주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벽을 넘으려는 아이를 최대한 도와야 했기에.

그간 숨기고 있던 내공도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리고 남궁지후의 내공 수준에 맞춰 검을 맞부딪혔다.

"응?"

숙소 침상에 누워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하무백의 표정이 바뀌었다.

몸을 일으키고는 숙소를 나섰다.

순식간에 그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학당의 지붕.

하무백이 도착한 직후 위지군도 모습을 드러냈다.

"사부님도 느끼셨습니까?"

"저렇게 기운을 줄줄이 흘리는데 모를 수가 없지. 허허."

하무백과 위지군은 가만히 남궁지후와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오늘 벽을 넘으면, 이제 저 아이를 상대할 수 있는 아이는 없겠구나."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평이나 주우명.

두 사람이 벽을 넘지 못한다면 다음 동투제의 우승자는 남궁지후가 될 것이 보였다.

지금 남궁지후는 그 정도로 무섭게 강해지고 있었다.

남궁지후의 검이 점점 남궁휘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대연검법에 바다를 담기 시작한 것이다.

남궁휘.

그가 지내던 마을은 바다가 가까웠다.

그럴 수밖에.

절강성 동남부에 위치한 산월마림 동쪽의 마을이었으니까.

절강성 해안가까지 그리 멀지 않았고.

벽에 막혔던 어느 날.

바다를 보고서 벽을 넘었다.

그때 보았던 바다의 모습 일부분이 지금 남궁지후의 검에 담겨 있었다.

'드디어 바다를 담기 시작했구나. 대해가 보인다.'

남궁휘는 남궁지후의 대연검법을 보고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와 끝없이 펼쳐져 한없이 잔잔한 대해의 모습.

그것이 남궁지후의 대연검법에서 보였음이니.

그렇게 대연검법이 끝나고.

남궁지후의 검법이 변했다.

다시 한번 대연검법을 펼치리라는 예상과 달리.

전혀 다른 검로였다.

'창궁무애검!'

남궁휘는 대번에 알아보았다.

전수 받지는 못했으나, 본 적은 많았으니까.

남궁지후는 대연검법에 이어 곧바로 창궁무애검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궁무애검에는.

'하늘··· 그야말로 창궁(蒼穹)이다.'

남궁휘는 전력을 다해 남궁지후의 검을 받아넘겼다.

창궁무애검과 대연검법의 부딪힘이라 하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든 남궁휘였다.

창궁무애검이 상위의 검법이라 해도 맞상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니, 남궁휘의 대연검법은 결코 창궁무애검보다 하위의 검법이 아니었음이니.

그렇게 창궁무애검을 모두 펼친 남궁지후의 검이 다시금 변화를 보였다.

그 검법이 무엇인지 남궁휘는 알아보지 못했다.

언젠가 본 적도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절대 이런 검을 본 적 없는 것도 같았으니까.

그런 애매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해와 창궁이 만나 합일(合一)했다.

그리고 세상을 뒤엎는 검 한 자루만 오롯이 고고하게 존재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제왕(帝王).

제왕이었다.

'아아. 제왕검형!'

그 모습만으로 남궁휘는 지금 남궁지후가 만들어가는 검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남궁세가의 사람이었기에.

저 검이 보여주는 모습을 직면한다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남궁세가의 최상의 검공.

제왕검형.

'남궁화현이 펼쳤던 제왕검형은 가짜였구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왕검형!'

남궁휘의 가슴이 세차게 떨렸다.

남궁세가의 가솔로, 세가의 진정한 최강의 검공을 본 감격이었다.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검공이었지만, 그것은 가짜였다.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 어디선가 본 듯했지만,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자신이 본 것이 가짜였기에.

감히 진짜 앞에 가져다 댈 가치도 없는.

만월 앞의 반딧불 같은.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오른 채 검을 맞대던 남궁휘.

천천히 그의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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