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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242화 (242/312)

242화. 저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남궁휘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자연히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씨가 없는 남성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남궁휘의 물음.

하무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이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몸이 멀쩡한 데 씨가 없는 겁니다. 자손을 볼 수 없다는 거지요."

"아······."

하무백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남궁화현. 그 자가 그러합니다. 이제 천하에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셋이지요."

"셋?"

하무백의 물음.

"남궁화현 본인, 저 그리고 추동이라는 술법사입니다. 당연히 남궁화현이 추동을 찾아서 저처럼 죽였으리라 여겼는데 아직 살아있더군요. 무창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술법사?"

그 말을 들으니 불현듯 떠오른 이가 있었다.

길거리에서 귀인이라며 자신을 붙잡았던 점쟁이.

"그가 남궁화현이 자손을 볼 수 없음을 알려 주었지요. 술법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다고요."

남궁휘가 피식 웃었다.

"남궁화현은 자식을 얻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습니다. 용하다는 의원도 찾아가 봤는데, 선유곡의 의원들도 실패했지요. 왜 자식이 들어서지 않는지 원인을 찾지 못했었죠."

"그걸 그 추동이라는 술법사가 찾아 주었다는 거군요."

"그놈도 인간 말종입니다. 모산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는데, 도박에 빠져들고는 파문당했다죠. 단전을 폐하고 한쪽 눈을 빼앗고요."

그 말에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산파는 정사지간의 성향을 띠지만 굳이 따지자면 사파로 분류되는 문파다.

그런 문파에서 행한 징벌치고는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다.

"추동이 남궁화현을 만난 곳도 도박판이었습니다. 무슨 감언이설로 남궁화현을 꼬았는지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씨가 없다는 것을 남궁화현이 받아들였지요. 그리고 음모를 꾸몄고 제가 거기에 희생당했죠."

"외유 말이로군요."

하무백의 말에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화현의 외유 이야기는 호사가들 사이에 소문이 많이 나 있으니까.

"저는 방계 중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방계 출신으로 세가의 외원 무사였습니다. 대연검법을 수련 중 우연히 남궁화현의 눈에 띄었지요. 재능이 있다며 남궁화현이 저를 가까이했습니다. 처음에는 소가주에게 인정받았다고 기뻐했었죠."

남궁휘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외유에 수행무사로 저 하나만 데리고 간다 했을 때도 뿌듯했습니다. 소가주의 오른팔이 된 것 같았거든요. 거기에 언감생심이던 대연십삼검뢰도 익히게 해주겠다 했으니······."

잠깐 말을 멈추는 남궁휘.

울컥 올라온 감정을 정리하는 듯했다.

하무백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외유였죠. 그날이 되기 전에는.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객잔 별채에서 먹었던 저녁 식사에 음약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지독한 녀석으로."

그 뒤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음약에 중독된 이는 아마도 남궁휘와 남궁화현의 처와 첩일 터.

"소혼극락산이라는 음약이라더군요······. 중독된 순간 제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부인 두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날··· 저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습막 가득한 목소리.

그의 표정은 괴롭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여전히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터.

"다음 날. 남궁화현에게 따졌습니다. 그때야 이야기하더군요. 자신은 아이를 만들 수 없는 몸이라고. 타인의 씨를 빌려야 한다면, 빛나는 재능을 가진 제 씨를 사용해야겠다 마음먹었다고."

하무백은 묵묵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사이 주인장이 오리구이를 가져왔다.

대화는 잠시 멈췄다.

주인장이 사라지고, 오리 다리를 뜯어 입으로 가져가는 하무백.

우적우적.

하무백이 오리고기를 먹는 소리만이 울렸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습니다."

잠시 후 간신히 입을 뗀 남궁휘.

"아이를 갖기 좋은 날이 있다며 추동, 그놈이 날을 정하면 저는 어김없이 음약을 먹었습니다.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 아름다운 분들을······."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다.

"그리고 백 부인께서 회임을 하셨지요."

백 부인은 남궁화현의 정실이라 하였다.

그 후 석 달은 그저 천하를 유람하며 다녔다 했다.

그리고 찾아온 추동.

그놈은 술법으로 뱃속의 아이의 성별마저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백 부인이 회임한 아이가 여아라는 판정이 내려졌고.

남궁휘는 다시 음약을 먹어야 했다.

남궁화현의 첩인 주 부인과 밤을 보내기 위해.

그리고 백 부인이 회임한 지 여섯 달 뒤.

주 부인이 회임을 했고.

석 달 뒤.

백 부인의 산달이 가까워졌을 때.

처음에 추동은 주 부인의 아이가 여아라고 했지만.

이후에 전서로 남아라는 판정을 했다.

"그때가 바다를 보러 가겠다며 절강성으로 향할 때였습니다."

"산월마림."

하무백의 중얼거림에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곳이 제 죽을 자리였습니다."

한 잔 술을 비우는 남궁휘.

"제왕검형은 무서웠습니다. 세가의 하급 무사가 익힌 대연검법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한쪽 팔을 잃고, 얼굴에 검상을 잔뜩 입고, 단전마저 다친 채로··· 겨우 도주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이야."

하무백은 묵묵히 남궁휘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바로 다시 입안으로 털어 넣는 남궁휘.

화끈한 화주가 마음속의 울화를 더욱 키우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울화를 식히고자 다시금 술을 넘기는 남궁휘.

"그렇게 태어난 두 아이가."

"남궁지유, 남궁지후. 두 아이입니다."

진한 감정이 담긴 대답이다.

태어난 것조차 보지 못한 아이들이었지만, 제 아이를 향한 아비의 사랑이 듬뿍 느껴지는 음성.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행동에서 짐작은 했지만, 본인의 입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천륜을 바로 잡으라······.'

하무백은 자신이 돌팔이라 했던 점쟁이의 말을 떠올렸다.

그놈이 그 추동이라는 놈일 터.

'완전 돌팔이는 아니로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남궁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지금.

하무백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

천륜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귀한 인연이다.

하무백이 왜 혈교와 마교를 증오하는가.

하설란은 너무도 어렸기에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무백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부모님이 무참히 참살당하는 그 모습을.

부모님이 숨겨준 그 작은 공간에서.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작디작은 하설란의 입을 막은 채.

아주 작은 틈으로 보이는 그 모습에 피눈물을 흘렸다.

입을 막은 그 손에 힘이 너무도 들어가 하마터면 하설란의 숨을 완전히 막을 뻔하지 않았던가.

고작 마교와 혈교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그놈들이 작은 마을을 박살을 냈다.

서로의 세력을 키우겠다 다투던 놈들이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는 힘을 합쳤다.

아니, 다투기는 했다.

서로 죽이겠다고.

서로 겁탈하겠다고.

어머니는 칼을 든 놈들에게 달려들어 욕을 보이기 전에 명을 달리하셨다.

아버지는 그 모습에 분노하여 달려 들다가 무참히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

지금은 그때 그분들이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았다.

그놈들이 집안을 뒤지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과 동생을 살리려고 그러신 거다.

그때의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헌데 남궁화현.

남궁세가주는 자신의 가주직을 위해서.

그런 천륜을 어그러뜨렸다.

음약을 이용해 강제로 관계를 시켰고, 아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비를 죽였다.

물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두 부인은······."

하무백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궁세가로 돌아온 이가 남궁화현과 남궁지유, 남궁지후 뿐이라는 것에서 어찌 되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지만.

"산월마림에 버렸더군요······."

그 말을 하는 남궁휘의 몸에서 분노가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그러면······."

"산월마림에서 만났습니다. 안식을 드리고 좋은 곳에 모셨습니다."

그 말에 그 사연을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지만, 어쨌든 자신의 두 부인이었던 이들을.

목적을 이루었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런 곳에 던져버리다니.

그야말로 인면수심.

저런 인간을 짐승만도 못하다 해야 할까, 짐승보다 더하다 해야 할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하무백의 물음에 남궁휘의 뜨겁게 타오르던 분노가 차갑게 정리가 되었다.

"가야지요. 가서 이 악연에 악업을 끊어야지요.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궁휘의 시선은 멀리 안휘성 합비를 향해 있었다.

"그놈은 절대 지후를 소가주로 삼지 않을 겁니다."

남궁화현을 지독하게 겪은 그의 말이었으니 틀림없을 터.

남궁지유와 남궁지후는 어떻게 보면 남궁화현의 거대한 치부다.

이미 가주가 되었고, 자식도 아니니 그 아이를 소가주로 삼아 가주의 직을 물려줄 이유도 없었다.

"가능하겠소?"

하무백이 다시 물었다.

남궁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모르겠다.

남궁화현.

그놈과 일대일로 마주한다면야 자신 있었다.

허나 놈은 남궁세가의 가주.

그런 일이 가능할까?

아니 그놈의 얼굴을 마주할 수나 있을까?

남궁휘가 왼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하무백이 술잔을 비웠다.

탁.

그리고 소리 나게 식탁에 술잔을 내려놓은 후.

"함께 갑시다."

"네?"

하무백의 말에 남궁휘가 깜짝 놀랐다.

상상도 못 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에.

"대체 왜······."

남궁휘로서는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자신과 하무백은 완전 남 아닌가.

그랬기에 남궁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털어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함께 가자니.

"추동. 그놈이 나보고 그럽디다. 어긋난 천륜을 바로 잡을 귀인이라고."

"만나셨소이까?"

"애꾸에 왜소한 체격의 점쟁이를 길에서 마주쳤소이다."

"그딴 놈이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 한들······."

남궁휘는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후. 그 녀석과의 인연도 있고. 또 빚진 것도 있으니. 함께 갑시다."

"빚이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묻는 남궁휘.

그 물음에 하무백은 그저 묘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하무백은 조금 전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제왕검형이 절정으로 치닫던 그 순간.

그저 지켜만 보려 했지만, 그들의 검형은 하무백에게도 작용했다.

하무백이 제왕검형 전반부의 비급을 보고 그 구결을 모두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게 하무백은 제왕검형을 보는 것만으로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헌데. 그것이.

신기했다.

단목세가의 허무호연심결.

그 비급을 보았을 때 느꼈던 숨어 있는 거대한 힘의 존재.

그것을 제왕검형에서도 느꼈다.

두 사람이 펼치는 제왕검형에서가 아니었다.

하무백의 심상 속에서 싹을 틔운 제왕검형.

그것에서 느꼈다.

남궁지후는 하늘과 바다.

남궁휘는 바다.

제왕검형을 그렇게 풀어낸 모양이었지만.

하무백의 심상 속 제왕검형은 달랐다.

'빛.'

한 줄기 빛이었으니.

위지군은 미처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것은 하무백은 비급을 보았고, 위지군은 보지 않았다는 것.

그 차이 때문이다.

하무백 역시 저 둘의 검법만 보았다면 몰랐을 것을.

비급을 보고 구결을 외웠기에.

두 사람의 검법과 구결이 복잡하게 얽혀들며 하무백의 심상에서 싹을 틔운 것이니.

검형은 말 그대로 검형이다.

남궁지후가 펼치는 것도 제왕검형이고, 남궁휘가 펼지는 것도 제왕검형.

그리고 하무백의 심상의 그것도 제왕검형이었다.

셋이 형태는 모두 달랐지만, 모두 같은 제왕검형.

'신기하군.'

그렇게 싹을 틔운 제왕검형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무극여의검법의 오묘한 묘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허무호연심결과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대체 무엇일까?'

하무백은 아직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음을 느꼈다.

이게 하무백이 말한 빚이었다.

남궁휘는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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