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항상 조심해라
남궁지유의 말에 남궁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주에게는 형제가 많아요. 남궁화우는 그중 실력이 뛰어날 뿐. 현 가주가 실각한다면, 그 형제들 모두 가주가 될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해요. 소가주가 없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비로소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남궁화현의 형제들 중 가주를 향한 야망을 가진 이가 어찌 남궁화우 하나뿐일까.
분명 그런 야망을 가슴 깊이 감추고 있는 이가 더 존재하리라.
"남궁화우는 본인이 앞장서 가주의 치부를 드러내서 가주 자격이 없다고 그를 끌어내리려 하겠지만. 우리가 그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궁휘는 남궁지유의 말을 경청했다.
"반면 우리는 그저 세가를 떠나면 그뿐이에요. 암영이 쫓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와 지후의 실력이라면 아무리 암영이라도 우리를 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복수 따위는 잊고 그냥 아이들과 훌쩍 떠나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결국 아쉬운 것은 남궁화우예요. 아버지가 그의 제안에 끌려다니실 이유가 없는 거죠."
남궁지유의 말에 남궁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에 대한 생각으로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들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냐?"
남궁휘의 물음에 남궁지유가 슬그머니 웃었다.
"시간을 끌어야 해요. 남궁화우가 스스로 밑천을 드러낼 때까지요."
"그래. 그러자꾸나."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게 앞일에 대한 의논은 끝이 났고.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점을 나서니 하무백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화우가 내일 자기를 찾아오라 하더군. 어찌할 건가?"
하무백의 물음.
"아쉬운 건 그이지, 저희가 아니라서요."
남궁지유의 대답에 하무백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무백이 생각하기에도 그랬으니까.
자신의 도움까지 이용해서 복잡하게 일을 꾸미는 것은.
하무백의 성미가 아니었다.
그냥 단번에 밀어버리는 것이 쉬웠지.
다만, 하무백은 이번 일의 당사자가 아닌 조력자였기에.
마음과는 달리 남궁휘의 의견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할지 결정을 내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그 말을 남기고 하무백은 떠났다.
덩그러니 남은 셋.
그들은 장소를 옮겨서 다시 앞으로의 일에 대한 의논을 계속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만난 혈육에 대한 회포를 풀었다.
***
이틀이 지났다.
남궁화우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당연히 찾을 것이라 여겼는데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남궁휘.
"흐음."
객잔에서 홀로 고민에 빠졌다.
남궁휘와 남궁지후, 남궁지유.
그들 가족에게 있어서 자신의 제안만큼 좋은 것도 없을 터인데.
남궁화우는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는지 다시 복기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상의 제안이었다.
다시 한번 복기하다가, 이번에는 남궁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남궁휘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지만.
자신이 남궁휘이고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변수가 있었군.'
그제야 발견한 변수.
바로 남궁지후와 남궁지유였다.
두 아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둘이, 아니 남궁지후가 가주의 직에 욕심이 없다면?
자신의 제안은 아무 가치가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떠나면 그뿐이니.
그들이 익힌 무공을 회수한다?
직접 남궁휘를 대면한 남궁화우는 단언할 수 있었다.
불가능하다.
암영이라 할지라도 남궁휘를 당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대 고수들이 나선다면?
역시 답이 없었다.
하무백.
그 괴물이 그들을 돕겠다고 한 상황.
"아쉬운 건 내 쪽이었군."
남궁화우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남궁지후에게 가주에 대한 야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그게 문제였다.
"형님들도 있고 말이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남궁화우.
결국 방을 나섰다.
아쉬운 쪽이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시간도 없었다.
'지유. 그 녀석의 생각이겠지.'
이렇게 사고를 넓힐 수 있는 건 셋 중 그녀일 테니.
남궁휘에게 친부임을 밝히게 유도한 것이 오히려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야망을 실현 시킬 가능성을 눈앞에 두고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것이 실수였다.
'나도 아직 멀었군.'
교룡관으로 들어섰다.
이미 수문위사들이 남궁화우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딱히 막지 않았다.
그렇게 남궁휘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잠룡대의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팽도율이 허락한 시간은 어제까지였지만, 오늘도 그를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맹룡대 연무장 쪽에서는 남궁휘를 만나지 못했다.
여전히 일꾼으로 일한다면, 남궁지후와 남궁지유가 있는 잠룡대 쪽일까 하여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멀리서 소란이 들려왔다.
"이봐. 외팔이. 네놈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황력이었다.
그는 지금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남궁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력은 상급자의 지시로 조금 전까지 빨래터에서 일을 하다가 오는 길이다.
본래 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일손이 부족하다며 끌려갔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도 예전 신입 때는 곧잘 빨래터 일을 했었으니까.
헌데.
오랜만의 일이라 해도, 주변의 타박이 그의 꼭지를 돌게 했다.
"아니 덩치도 산만 한 사내가, 어찌 그리 속도가 느리누. 세탁도 안 되어 있고. 남휘 그 사람은 빠르기도 빠르지만 새 것처럼 빨았는데."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한다는 소리가.
거기에 비교 대상이 외팔이 병신 남휘였다.
그딴 놈이 뭐라고.
그런 병신과 자신을 비교를 하며 타박을 하는지.
가슴에 울화가 쌓였다.
그렇게 빨래터 일을 끝내고 자신이 담당한 잠룡대 연무장으로 왔는데, 저 병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화가 터져 나왔다.
잠룡대 연무장 주변을 청소하고 있던 남궁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력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자신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이가 갑자기 저리 시비를 걸고 있으니.
"잠룡대 연무장 청소를 하고 있소이다만?"
"그러니까. 그걸 왜 네놈이 하고 있냐고 잠룡대 연무장은 내 담당인데!"
그 말에 남궁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청소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지만.
그의 담당 구역을 자신이 청소해 주었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 저리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으니.
애초에 잠룡대 연무장이 누구의 구역인지도 몰랐고, 위지군이 청소하라 해서 할 뿐이었다.
"위 어르신이 잠룡대 쪽도 청소하라 하셔서 할 뿐이오."
남궁휘는 당당히 답했다.
"하아."
그 말에 황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그 늙은이. 자기가 뭐, 관주라도 되는 거야, 뭐야."
위지군 앞에서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황력이, 그가 없다고 바로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
아니,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이라 그런 것일까?
맹룡대 연무장 근처에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남궁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쭈? 인상을 써? 씨발. 병신 새끼. 니가 그러면 뭐 어쩔 건데?"
황력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뒤집어 손잡이 끝으로 남궁휘의 가슴을 꾹꾹 찔렀다.
남궁화우는 떨어진 곳에서 살짝 몸을 숨기고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저 일꾼의 미친 짓에 남궁휘가 어찌 대응할지 궁금했다.
"왜? 위 영감. 그 노인네한테 쪼르르 가서 일러바치려고? 지금 네 놈 눈앞에 있는 건 난데?"
다시 쿡쿡.
남궁휘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난번에는 참았다.
그래야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도 참아야 할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남궁지유와 남궁지후도 찾았다.
그리고 곧 합비로 떠날 터.
사실 더 이상 이곳에서 일꾼을 하고 있을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단지, 편했고.
아이들과 가까이 있을 수 있기에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있었을 뿐.
"어이. 력이. 뭐 하는 건가?"
"아, 공자님. 별것 아닙니다. 정신 나간 일꾼 놈이 있어서 훈계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황력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잠룡대 삼 년차 생도.
황력은 잠룡대 연무장을 청소하면서 생도들과 돈독한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일꾼이 잠룡대 연무장 주변 청소하는 것을 막았던 것인데.
갑자기 남궁휘가 청소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분노한 것이다.
지금껏 남궁휘가 청소하던 시간은 황력이 다른 곳의 일을 하던 때라 마주치지 않았던 것.
오늘은 서로 시간이 조금 어긋나면서 이렇게 부딪힌 것이다.
"응? 그런 일꾼이 있어? 력이 자네 일인데, 내가 좀 도와줄까?"
삼 년차 생도는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에 얇은 입술의 인상이 그의 성격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헤헤. 어찌 귀하신 공자님이 이런 천것들 일에 나서려고 하십니까."
황력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말했다.
삼 년차 생도.
남궁진.
남궁세가의 방계로 교룡관에 보내진 생도였다.
남궁세가 출신이라는 걸로 나름 잠룡대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는데.
작년에 남궁지후와 남궁지유가 입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저 그렇고 그런 방계 무인인 것이다.
남궁세가의 후광이 사라지다시피 한 터.
그 이후 두 사람이 없는 곳에서 여전히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지만, 제대로 상대해주는 생도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관심이 돌아간 곳이 일꾼들이었고.
그와 비슷한 처지의 생도 몇몇과 패를 이루어 그리 지냈다.
그러면서 친해진 이가 황력.
나름 눈치도 있는 것이 재미난 녀석이라 적당히 부리며 지냈는데.
오늘은 웬 일꾼 하나를 잡아놓고 드잡이질하려 하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여 이렇게 끼어든 것이다.
남궁진이 남궁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외팔이에, 흉터라······. 이런 일꾼도 있었던가? 교룡관도 무슨 생각이지? 이런 일꾼을 뽑아 놓다니. 쯧쯧."
혀를 차는 남궁진.
남궁휘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깊고 깊은 눈빛.
보는 순간, 기도를 느끼는 순간 알았다.
남궁세가 출신, 방계의 무인.
자신과 같은 처지의 녀석이었지만, 태도는 자신과 전혀 달랐다.
저런 녀석들 때문에 방계 무인들이 무시당하는 걸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멀리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학당의 수업이 끝난 후 담룡각으로 움직이는 생도들이다.
잠룡대, 와룡대, 맹룡대.
각양각색의 생도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중에는 분명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도 있을 터.
지난번이 생각났다.
두 아이가 있는 곳에서 황력 저놈에게 당하기만 하는 못난 꼴을 보였었지.
그런데 지금은?
"그러게 말입니다. 공자님. 이런 병신 새끼를 왜 뽑아둔 건지. 거참. 미친 늙은이 하나 때문에."
그러면서 꾹꾹 다시 찌르는 황력.
남궁휘가 왼손의 빗자루를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빗자루 끝을 움켜쥐었다.
와그작.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버리는 손잡이.
남궁휘가 차가운 눈으로 황력을 노려보았다.
"뭐, 뭐,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력이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성큼.
한 발 앞으로 다가가 황력의 오른팔을 움켜쥐는 남궁휘.
파직.
"크아아아악!"
황력이 비명을 질렀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오른팔에서 몰려왔으니까.
한번 움켜쥐는 걸로 황력의 팔을 부러뜨린 것이다.
"이봐, 네놈 지금 무슨 짓이지?"
자신을 무시하고 움직이는 남궁휘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남궁진이 그를 노려보았다.
옷자락이 살짝 펄럭이는 것이, 내공까지 끌어올린 듯했다.
"이딴 짓을 할 시간이 있으면 수련에 매진하는 게 좋을 거다."
남궁휘가 남궁진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왼손은 여전히 황력의 팔을 잡은 채.
"뭐, 뭐라······! 감히 병신 일꾼 따위가!"
그리 외치며 막 바닥을 박차려 했으나.
남궁진은 바닥에 뿌리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으, 으으으······."
신음을 흘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궁휘가 기도를 드러내 살기로 남궁진을 압박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세상에는 자신을 숨긴 기인들이 많은 법이지. 해서 강호에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게 오래 사는 비결이지."
"끄아악."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몰아치는 살기의 폭풍에 남궁진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바지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황력은 그 모습을 보고 온몸을 덜덜 떨었다.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남궁휘가 황력의 팔을 놓았다.
털썩.
그 순간 황력은 납작 엎드렸다.
"고, 고인을 몰라뵈고 천것이 함부로 날뛰었습니다. 부,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 모습에 남궁휘는 피식 웃었다.
예상한 모습 그대로.
이런 소인배를 상대로 자신이 기도를 드러냈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지난번의 그 일을 생각하면 그냥 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발을 들어 납작 엎드려있는 황력의 오른손을 즈려밟았다.
"끄어어억."
"이 손을 보고 항상 조심해라."
발에 힘을 주자 황력의 오른손 뼈가 빠지직, 산산조각이 났다.
아마 평생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없을 터.
남궁휘에게 팔병신이라 불렀던 그가 손병신이 된 순간이다.
그때쯤 생도들이 그곳에 당도했다.
그중에는 남궁 남매 역시 있었다.
남궁휘와 쓰러진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남궁휘는 그저 바닥에 빗자루를 들고 걸음을 옮길 뿐이다.
"허."
남궁화우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순간이었지만, 드러낸 기도가 엄청났다.
아마 자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더 그런 것일 터.
대체 저들에게 어떻게 도와달라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