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제왕검형이 맞더냐?
서로를 바라보는 남궁지후와 남궁지린.
남궁지린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남궁지후에 대한 조소.
자신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만한자신이 있었기에 이 비무를 만들어 달라 아버지께 부탁한 것 아니던가.
스르릉.
남궁지린이 먼저 검을 뽑았다.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검.
새파란 예기가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스르릉.
남궁지후도 검을 뽑았다.
무창의 대장간에 주문했던 검.
평범한 청강장검이다.
서슬 퍼런 예기도 없었고, 특별한 기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남궁지후의 손에 착 감기는 맛이 있었다.
명장이라 할 수 없는 대장장이였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검을 만들었던 이.
남궁지후의 손에 딱 맞는 검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 남궁지후의 검을 바라보는 남궁지린의 입가에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남궁세가의 대공자라는 녀석이.
저런 싸구려 검이라니.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놈에게 소가주는커녕 대공자의 자격도 없음을 증명하리라.
그렇게 마음먹은 남궁지린이 먼저 움직였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제왕검형의 전반부 첫 번째 초식을 펼쳤다.
어설픈 모습이 아직 남아 있으나, 분명 제왕검형이었다.
"오오!"
그 모습에 몇몇 직계가 감탄을 흘렸다.
수련을 시작하고 이제 고작 서너 달.
그런데 벌써 저런 수준이라니 놀라웠다.
반면 남궁지후는 어떠한가.
제왕검형의 첫 번째 초식을 막아서는 그의 검의 움직임은.
"저건 대연검법 같은데?"
누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랬다.
제왕검형만을 사용하라 한 비무에서 뜬금없이 대연검법이라니.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화현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런 남궁지후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고 있는 입.
'그러면 그렇지. 제 놈이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한들, 끌어주는 사람이 없고서야······.'
남궁화현은 저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사람들이 남궁지후의 검을 보고 웅성거리는 것이 기꺼웠다.
남궁지린 녀석의 설익은 제왕검형이 이토록 마음에 들 줄이야.
캉!
첫 번째 부딪힘은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남궁지린의 명검에 부딪혔음에도, 남궁지후의 평범한 청강장검은 멀쩡했다.
"제왕검형을 펼치는 것이었을 텐데?"
남궁지린 역시 남궁지후의 초식이 대연검법임을 알아보았다.
그랬기에 이죽거리며 말한 것이다.
"제왕검형이야."
담담한 남궁지후의 말.
그러나 그 말에 남궁지린의 조소는 짙어진 정도를 넘어서 그의 온 얼굴을 덮었다.
"푸하하하! 남궁세가 제일의 기재라는 남궁지후가 그리 구차한 말을 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 서 뜨겠군. 대연검법을 가져다 놓고 제왕검형이라 우기다니 말이야. 크하하하."
남궁지린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귀빈과 세가의 어른들이 있는 자리라는 것은 상관없었다.
남궁지후.
저놈을 최대한 망신만 줄 수 있다면, 자신이 좀 예의 없어 보이는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럼 어디 계속 그런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놔 보든지!"
그 말과 함께 남궁지린은 두 번째 초식을 펼치며 남궁지후를 향해 짓쳐 들었다.
역시나 남궁지후는 대연검법을 펼쳤다.
피식 웃으며 예상되는 검로를 피해 계속해서 제왕검형을 펼치려는 순간.
남궁지후의 검이 변했다.
대연검법이다.
분명 대연검법인데.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전신을 휘몰아쳐 오는 어마어마한 해일.
바다가 남궁지린을 덮치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제왕검형을 펼쳤으나, 상대는 마치 자신의 검이 어디로 갈지 아는 듯이 반응했다.
이를 악물고 검을 움직였으나.
한낱 검으로는 눈앞의 바다를 뚫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니.
대연검법이 아니었다.
제왕검형.
제왕검형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가 없었다.
저놈은 제왕검형을 단 한 번 본 게 전부다.
가주께서 필사본 비급을 주었다지만.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런 제왕검형이라니.
자신의 제왕검형이 그저 배운 것을 흉내 내는 수준이라면.
남궁지후의 제왕검형은, 이미 남궁지후의 것이었다.
아무리 재능의 차이가 있다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으아아아아!!!!"
울분이 쌓인 기합을 터뜨리며 남궁지린은 억지로 세 번째 초식을 펼쳤다.
전신의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남궁지후 저 녀석을 죽여버리겠다는 살심까지 담아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남궁지후의 목을 노리고 날아가는 검.
남궁지후는 담담한 얼굴로 검로를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대연검법이 아닌 창궁무애검이다.
아니, 그래 보였으나 제왕검형이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하늘.
그리고 검에서 솟아나는 아득하게 푸른 검강.
검강.
아니, 잠깐!?!
검강이라고?!?
어떻게!
저놈의 싸구려 검에 검강이 나타날 수가······.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을 꼭 닮은 푸르른 검강이.
하늘을 꼭 닮은 변화무쌍한 검로가.
서걱.
남궁지린의 검을 그대로 잘라버리고는 남궁지린의 앞섶까지 가른 후에 그의 목 앞에서 멈췄다.
남궁지린은 멍한 눈으로 남궁지후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검강이다.
한 치만 더 길었다면, 목의 살갗을 베였으리라.
"······."
정적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연회장에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남궁지후가 보여준 모습은 모든 소리를 지울 만했으니까.
올해 십구 세의 남궁지후다.
아직 약관도 되지 못한 새파랗게 어린 녀석.
그 녀석의 검에 검강이 맺혀 있는 것이다.
약관도 안 된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
경악을 넘어선 충격이다.
상식이 파괴되는 일.
그랬기에 누구도 그 어떤 말도,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남궁화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입은 쩍 벌어져 그대로 굳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눈앞에서 목도했으니.
재능이 뛰어나다 하나,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그 빌어먹을 놈도, 저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아니, 그놈이 직계로 태어나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면 저런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허, 허허허. 검강이라, 절정의 경지라니. 오늘 그야말로 안계를 넓혔습니다. 고작 약관에 저런 경지를 이루다니. 역시 남궁세가로군요. 허허허."
그때 적막을 깨는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공손무외였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허어."
"대단하구만. 역시 지후야."
"암, 그렇고말고."
"제왕검형도 엄청났지? 처음에는 대연검법인 줄 착각했는데······. 아니었어. 바다가 보이고, 하늘이 보이다니. 내 그런 제왕검형은 처음일세, 그려. 허허허."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칭찬.
남궁지후는 납검 후 꾸벅 포권을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하던 남궁지린.
목 앞의 검이 사라졌음에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살갗에 느껴지던 검강의 그 서늘한 예기.
그것은 진짜였으니까.
싸구려 장검이라 무시했지만 거기에 맺힌 검강이 뿜어내는 그 무시무시한 기운은······.
겨우겨우 떨림을 진정시켰다.
아직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지린에게도 닿아 있는 상황.
못난 꼴을 보이고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허리를 숙인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첫발을 떼는데.
휘청.
두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닷속에서 걷는 듯 걸음이 엉성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서 겨우겨우 자리에 돌아왔다.
바지에 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까.
남궁지린의 얼굴이 치욕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허리를 숙인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남궁지린을 향한 차가운 눈빛.
아비 남궁화영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부탁하더니, 겨우 이딴 한심한 모습이라니.
상상을 초월한 남궁지후의 모습 덕일까.
연회장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갔다.
그 좋은 분위기 속에서.
남궁화현만은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였으니.
지금 모습을 보더라도, 자신이 정한 날 제왕검형을 가장 훌륭히 펼칠 이는 남궁지후일 것이 틀림없었으니.
결국은 남궁지후를 소가주에 앉혀야 하게 된 것이다.
방계의 핏줄 따위가 소가주가 될 수 없는 노릇인데.
그때 문득 남궁지후가 펼친 제왕검형에 생각이 미쳤다.
제왕검형.
자신이 가르친 것이 아니다.
"남궁지후."
남궁화현의 준엄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그의 부름에 다시 조용해진 연회장.
"네. 아버님."
"공적인 자리다."
"네. 가주님."
남궁화현의 지적에 남궁지후가 호칭을 바꿨다.
"조금 전 비무에서 네가 펼친 것이 제왕검형이 맞더냐?"
"네, 그렇습니다."
남궁화현이 단호하게 대답한 남궁지후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에 사람들은 가만히 그들 부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르친 것은 그렇지 않았을 텐데?"
남궁화현의 물음.
차가운 목소리에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당당히 가르친 것과 다르다 말하는 남궁화현.
고작 한 번 남궁지후 앞에서 제왕검형 전반부를 펼쳐 보여줬을 뿐이다.
그걸 가르쳤다 할 수 있을까?
"비급을 보고 스스로 궁구하여 익혔습니다."
남궁지후가 담담히 남궁화현을 마주 보며 답했다.
가르친 것과 다르다 물었는데, 스스로 익혔다는 대답.
남궁화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찌하여 가르친 것과 다르게 익힌 것이냐? 아니 그것이 제왕검형은 맞더냐? 사도로 빠진 것은 아니고?"
추궁이다.
아니, 사도라 몰아가고 있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 드는 행동.
이제 연회장에 긴장이 내려앉았다.
선유곡의 곡주가 귀빈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가주가 저런 모습이라니.
"제왕검형은 이름 그대로 법이 아닌 형입니다. 하나의 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에 게 더욱 잘 맞는 길을 찾은 것뿐입니다."
"고얀! 선대로부터 내려온 검형을 감히 네깟 놈이 부정하는 것이더냐!"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남궁화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노성.
"비무에서는 네가 이겼을지언정, 제대로 된 검형을 펼친 것은 지린이었다!"
남궁지후의 제왕검형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들은 분명히 목도하지 않았던가.
남궁지후의 제왕검형이 그려내는 바다와 하늘을.
그런 엄청난 광경을 보여준 제왕검형이 틀린 길이라니.
쉬이 수긍할 수가 없었다.
허나, 제왕검형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편 의심 섞인 눈초리로 남궁지후를 바라보았다.
가주가 사도를 언급한 탓이다.
남궁지후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하무백은 더 강한 제왕검형을 보여주면 해결될 일이라 하였지만.
가주라는 인간은 자신의 것과 다른 제왕검형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니.
"가주.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그때 나선 이,
남궁화우였다.
남궁화현의 날카로운 눈빛이 남궁화우에게로 향했다.
"네 녀석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아니. 나도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익힌 사람으로서 참견을 좀 해야겠소이다."
그러면서 뚜벅뚜벅 연회장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는 남궁화우.
스르릉.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검을 움직여 제왕검형을 펼쳤다.
"뭐 하는 짓이냐!"
남궁화현의 노성이 터졌다.
그러나 남궁화우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검을 움직일 뿐이다.
"저놈을 멈춰 세워라!"
남궁화현의 명령.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남궁화우의 검에는 서릿발같이 날카로운 검강이 맺혀 있었으니.
쉬이 다가갈 수 없었다.
남궁화현은 이를 악물고 남궁화우를 노려보았다.
그 사이.
전반부의 제왕검형을 모두 펼친 남궁화우.
그도 후반부는 몰랐다.
직계로서 익힐 수 있는 것은 전반부까지였으니.
"소제의 제왕검형은 어떠셨소? 가주. 아니, 형님. 형님의 제왕검형과 같았소? 달랐소?"
남궁화현을 향한 물음.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향한 물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남궁화현의 제왕검형은 모른다.
허나 남궁지린이 펼친 제왕검형은 보았다. 남궁화현이 그것이 옳다 하였으니, 그와 비교하면 되는 일.
달랐다.
남궁화우의 제왕검형은 오히려 남궁지후의 그것에 좀 더 닮아 있었다.
"형님. 아버님이 형님의 제왕검형도 제왕검형이요, 소제의 제왕검형도 제왕검형이라 하셨소이다. 헌데 어찌 지후의 제왕검형은 틀렸다 하시는 것이오? 아버님의 말씀을 형님이 부정하는 것이오?"
남궁화우의 물음.
뿌드득.
남궁화현이 이를 악물었다.
정천맹에서 맹주 주위에 처박혀 있을 놈이 갑자기 본가로 돌아온다 싶더니.
저딴 훼방이라니.
"아버님 역시 검형은 법이 아닌 형이니, 최강의 형을 찾아 나가는 것이 우리 남궁세가의 과업이라 하시었소."
계속되는 남궁화우의 말.
남궁화현은 그의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긍정하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그의 말을 부정하면, 선친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었으니.
"시끄럽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남궁화현은 버럭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남궁화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여기서 터뜨려야 한다.
자신이 가주가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