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다음 없나?
하무백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남궁세가의 고수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가에 떠오른 가소롭다는 웃음.
묵빛 검강은 어느새 사라졌고, 하무백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하루살이 같은 놈들이. 우습군."
그리고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놈들에게 검집 채 휘둘렀다.
퍽!
퍼퍽!
검강을 피워 올리면 무엇하나.
상대를 맞추지 못하는데.
원로들의 검강은 허공을 갈랐다.
반면, 하무백의 검집은 그들의 몸을 정확히 두들겼다.
가장 아픈 곳만을 골라.
"컥."
"으헉!"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하무백은 종횡무진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두들기며 움직였다.
넓은 연회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남궁세가 무사들의 비명으로 연회장이 가득 찼다.
남궁화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 하무백은 마치 장난을 치는 듯 가볍게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있다.
원로원의 전대 고수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무사들은 다시 몸을 일으켜 덤벼들었다.
하무백은 그런 이들을 다시 두드려 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손무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사정을 둬가며 사람을 패는 이가 아닌데 어쩐 일인가 하는 표정.
한창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두드려 패던 하무백의 시선이 공손무외와 마주쳤다.
씨익.
하무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가 있구나.'
그 웃음에서 공손무외는 하무백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제는 연회장에서 남궁화우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침입자가 연회장에 난입해서 남궁현철을 습격했다.
그 사실만이 남았기에, 연회에 참석한 남궁세가의 모든 인물들이 하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남궁세가에 속한 이 중 하무백에게 검을 뽑지 않은 사람은 남궁화우와 남궁지유, 남궁지후 이 셋이 전부였다.
남궁현철과 남궁화현은 멀찍이 피해 계속해서 공격할 것을 외치고 있었다.
"놈은 한 명뿐이다. 남궁세가의 힘을 보여줘라!"
"타핫."
가벼운 기합과 함께 검집을 크게 휘두르자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쓸려나가며 하무백 주변으로 작은 공간이 생겼다.
그때.
하무백은 한 손으로 남궁화우의 목덜미를 잡았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하무백의 행동에 깜짝 놀란 남궁화우.
하무백은 그의 그런 반응에는 아랑곳 않고 그를 냅다 집어 던졌다.
"으악."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을 흘리는 남궁화우.
어떻게든 몸을 바로 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무백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채 그대로 연회장의 벽을 향해 날아갔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연회장 건물의 벽에 사람보다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구멍을 뚫은 남궁화우는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우리도 자리를 잠시 피하는 게 좋겠구만."
공손무외의 말에 마진기와 남궁휘, 추동은 그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궁지후와 남궁지유 역시.
남궁화현은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설마?'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
공손무외가 오늘 저 아이들과 남궁세가를 방문한 것이.
막내 남궁화우가 갑자기 미쳐 날뛰는 것이.
모두 우연이 아닐지도.
그러자 갑자기 공손무외를 따라 몸을 피한 죽립인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누구지?'
공손무외의 수행원이라 생각해 딱히 관여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저들의 얼굴도 몰랐다.
"저, 저놈들을 잡아라!"
얼굴이 일그러진 남궁화현이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러나 하무백을 상대하는 이들은 도무지 몸을 뺄 여유가 없었다.
고작 한 명이다.
수십 명이 한 명을 상대로 밀리는 것이다.
"저, 저 빌어먹을 놈은 대체······."
남궁화현이 이를 악물었다.
남궁 남매까지 모두 연회장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하무백.
여기까지가 의도였는지, 훌쩍 거리를 벌렸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제야 하무백의 얼굴을 제대로 본 남궁세가의 무인들.
그들 중 한 사람이 하무백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하, 하, 하무백······."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흘리는 이는 남궁화결.
남궁화현의 동생 중 한 명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전장에서 하무백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이제야 알아본 것이다.
그 이름이 미치는 여파는 컸다.
그게 누구냐는 듯 멀뚱거리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원로원의 전대 고수들.
그리고 남궁현철과 남궁화현이 두 눈을 부릅떴으니까.
"괴물이라고 하더니··· 과연······."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대 남궁세가의 중심에서 이런 난동이라니.
"화우 놈과는 무슨 관계냐?"
남궁화현이 살기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무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지나가다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기에. 뒷이야기가 궁금했을 뿐이야."
하무백의 시치미에 남궁화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랑 함께 들을 때 그 맛이 더욱 사는 법이지."
그리 말하며 이제야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든 하무백.
검에는 순식간에 묵빛 검강이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이익. 당장 저놈을 죽여라!"
습격자인 이상 결과는 정해져 있다.
저놈이 하무백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호천단주였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일개 교관이라 했다.
교관 한 놈 죽이는 것쯤이야 남궁세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궁화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잡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팽가의 소식은 들었지만, 대 남궁세가는 팽가 따위와는 다르기에.
하무백은 자신을 향해 다시 몸을 날리려는 무사들을 보며 또 한 번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검을 역수로 들었다.
"그럼, 다 함께 들으러 가보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묵빛 검강이 맺힌 검을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푹.
그냥 꽂았다.
그런 것 같았다.
허나.
검강이 땅속을 파고들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는가 싶더니.
"터져라."
하무백의 나직한 중얼거림과 동시에.
쾅! 콰콰콰쾅! 쾅! 쾅!
우르릉. 쾅! 쾅!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땅이 터져 나갔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며 터져 나갔다.
"으, 으악!"
"피, 피해!!"
"사, 살려줘!!"
아비규환.
연회장은 순식간에 그리 변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쿠르르릉.
땅속의 폭발은 연회장의 기둥을 모두 부러뜨렸다.
그 결과는 명약관화.
연회장 건물이 서서히 기우는가 싶더니.
콰콰쾅!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무백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펴져 나간 어마어마한 강기의 폭풍은 그렇게 연회장을 지워버렸다.
폭발의 중심에 검을 꽂은 채 있는 하무백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의 얼굴에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았으니.
"큭."
"으윽······."
거대한 폭발과 붕괴였음에도.
곳곳에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건물 잔해를 헤치고 비틀거리는 사람들.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이들은 많았으나, 죽은 이는 없었다.
신기한 노릇이다.
허나 하무백은 당연하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하무백이 강기로 터뜨린 것은 땅만이 아니었으니.
연회장 건물의 벽과 지붕 전체에 강기를 침투시켜 터뜨렸다.
그렇게 잘게 산산이 부서진 건물을 붕괴하였으니 , 깔린 사람들에게 전해진 충격은 적었고.
무림인들이었기에 죽지 않고, 부상을 입은 정도로 무사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음과 거대한 붕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에 남궁세가 내원과 외원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그리고 곧 수많은 무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남궁세가 최강의 무력부대인 창천검대 역시 전원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무인들이 모였다.
아니, 남궁세가 전체가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큭큭. 크크큭. 뭐? 많은 사람들이 듣는 게 좋다고? 네 놈이 네 무덤을 팠구나. 하무백! 아무리 네 놈이라도 남궁세가에서 이 난장을 부렸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터. 곱게 목을 내놓아라!"
남궁화현이 순식간에 모여든 무력부대들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하무백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라는 몇몇 이들.
하무백의 얼굴을 확인하고 긴장 어린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지난 전쟁에서 하무백을 겪은 이들이었다.
"그건 이야기를 좀 듣고 나서 하는 건 어떨까?"
하무백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문답무용! 남궁세가는 침입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남궁화현이 어림없다는 듯 외쳤다.
그의 본능이 강렬히 경고하고 있기도 했다.
여기서 남궁화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가는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
마침 하무백이 그를 지키면서 남궁세가의 원로를 습격한 셈이 되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이제 죽이면 된다.
저놈을 죽이고 여세를 몰아 화우 녀석의 입을 막으면 된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침입자를 당장 처단하지 않고!"
남궁화현의 외침.
창천검대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무력부대들이 검을 뽑아 들고는 천천히 하무백을 포위했다.
서서히 붕괴의 먼지가 가라앉았고.
하무백이 땅에 꽂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두운 밤.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을 흩뿌리는 묵빛 검강.
하무백은 뽑아 낸 검 대신 검집을 땅에 꽂았다.
"지금부터는 죽인다?"
하무백이 낮게 말했다.
그 음성에는 살기가 진하게 담겨 있었다.
그 한마디에 주춤주춤 물러서는 몇몇 사람.
하무백의 검을 구경이라도 해본 이들이었다.
"멍청한 놈들! 당장 달려들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그 모습이 답답했던 것일까?
원로 남궁호철이 당장에 몸을 날렸다.
그의 검에도 검강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허공을 수놓는 제왕검형.
하무백을 향해 전력을 다해 제왕검형을 펼쳤다.
검강이 밤하늘에 빛났다.
하무백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
웅장하면서도 현란한 변화는 나름 제왕검형의 성취를 이루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 움직임을 보는 하무백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제왕검형인 것 같았으나.
자신이 비급에서 본 제왕검형은 아니었다.
'후반부인가?'
하무백이 모르는 제왕검형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얼핏 본 적은 있으나.
그것과 유사했으나 달랐으니.
'가주만 익히는 것 아니었나?'
그런 의문이 잠시 떠올랐으나.
하무백에게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히 경고했고.
저놈은 달려들었다.
지금 제대로 보여 준 것이, 오히려 수많은 생목숨을 살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하무백의 검이 움직였다.
서걱.
그리고 울리는 섬뜩한 소리.
묵검강이 남궁호철의 새하얀 검강을 그대로 베었다.
검강을 베는 검강이라니.
그 모습에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려는 찰나.
하무백의 검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고.
서걱.
한번 더 섬뜩한소리가울리고.
툭.
그대로 남궁호철은 절명했다.
단 일 검에.
너무도 간단하게.
장난하듯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 검에.
검강이 잘리고, 남궁호철이 잘렸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는 듯한 적막이 순식간에 남궁세가를 지배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가는 이 말도 안 되는 환상이 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남궁세가의 원로가.
초절정의 경지에 든 원로가.
일 검에 목숨을 잃는다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아닌가 말이다.
그랬기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눈에 보인 것이 환상인 양, 헛것인 양.
남궁호철이 검을 휘두르고 저 하무백이라는 놈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이 곧 펼쳐질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
허나.
하무백이 내뱉은 한 마디에 그런 기대는 산산이 박살 났다.
"다음 없나?"
차가운 눈으로 좌중을 훑어보는 하무백.
그의 검은 여전히 묵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