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증거라 하시었소?
"호, 호, 호철이가··· 호철이가······."
남궁현철의 말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 하는 얼굴.
곧 충격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호, 호법께서······."
"이, 일, 일, 일 검에······."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도 아니었으니까.
시꺼먼 검이 검강을 자르고 남궁호철도 잘랐다.
남궁세가의 원로로서, 호법의 자리에 있는 그가 그리 무력하게 사라졌다.
그 모든 광경을 생생히 보았으니.
적막은 깨졌다.
작은 소란이 여기저기서 생기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 아니 공포였다.
그 강함을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모습을 보여준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
검강이 잘렸다.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애초에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조차 대부분의 무림인에게는 요원한 일.
그 검강이.
잘렸다.
너무도 가볍게 휘두른 검에.
그렇다면 저 적의 경지는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서서히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잠식해 갔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정신을 차리고 노성을 지르며 몸을 날리는 인물.
흰 수염을 흩날리는 그의 두 눈은 분노로 붙타고 있었다.
"넌 뭐지?"
하무백이 물었다.
"대 남궁세가의 장로 남궁염이다!"
외자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방계였다.
가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직계는 복성에 맞추어 두 자의 이름을, 방계는 단순히 외자의 이름을 주로 사용하고 했으니.
방계임에도 장로의 직위에까지 오른 인물.
그가 검을 뽑아 하무백을 겨눴다.
"다음은 넌가? 말했지만, 죽는다."
하무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악적 따위에게 굴복할 만큼 남궁세가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어디 내 검도 받아 보아라!"
그는 창궁무애검을 펼쳤다.
검강이 찬연히 빛나는 검.
방계에게 배정된 몇 안 되는 세가의 고위직.
그랬기에 익힐 수 있었던 창궁무애검은 완숙한 경지로 펼쳐졌다.
허나 하무백에는 상관없는 일.
하무백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일 검.
이번에도 일 검이었다.
남궁염은 그대로 절명해 쓰러졌다.
그가 보여준 검강은 절대 남궁호철보다 아래 경지가 아님을 보여주었는데.
그 또한 일 검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도 검강이 잘리고, 남궁염이 잘렸다.
다른 사람에게 펼쳐진 똑같은 광경.
공포는 더욱 진해졌다.
이제는 움직이는 이들이 없었다.
저 압도적인 무위에 누가 섣불리 나서겠는가.
성정이 불같은 남궁염이었기에 눈이 뒤집혀 불나방같이 겁화 속으로 달려든 것.
그 결과는 겁화에 불살라져 한 줌 재가 된 것이다.
남궁화현도, 남궁현철도.
분노 가득한 눈으로 하무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나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한 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무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괴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상상의 범주를 초월한 괴물일 줄이야.
이윽고 결정을 내린 남궁화현이 입을 뗐다.
"제왕창궁검진을 준비하라!"
그 명령에 남궁세가의 무력부대 셋이 움직였다.
창천검대를 비롯한 창궁검대, 창운검대까지.
세 개의 무력부대를 동원하여 만드는 남궁세가 최대규모의 최강의 검진이었다.
이는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검진이지, 개인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하무백 개인을 상대로 펼치기로 한 것이다.
세 검대의 인원은 모두 백구십.
이백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 하나의 검진을 펼치며 하무백을 둘러쌌다.
공손무외와 남궁화우 일행은 검진의 범위 밖에 있었다.
하무백은 자신을 둘러싼 검진을 쓰윽 훑어보며 말했다.
"죽는다니까?"
일견 나른해 보이기까지 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검진을 구성한 검대의 구성원들의 얼굴에 분노가 살짝 어렸다.
공포스러운 실력을 가진 것은 알고 있으나.
자신들을 상대로 저렇게 나른하다는 듯한 반응이라니.
무시를 해도 이런 무시가 없었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이야기 정도는 들어보라고."
하무백이 그리 말하며 검을 검집에 다시 넣었다.
검집은 여전히 땅에 박힌 채였다.
그리고는 한 손을 슥 뻗었다.
"어? 어어!"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경악성.
남궁화우였다.
그는 순식간에 하무백 곁으로 날아왔다.
놀라운 능공섭물.
저 정도 거리의 사람을 순식간에 저리 빠르고 부드럽게 끌어오다니.
그로 인해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쉽사리 공격할 수 없다.
검진의 공격에 남궁화우가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세 검대는 연회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가주의 막내동생인 남궁화우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의 동생이면, 세가의 장로에 버금가는 위치였으니까.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하무백이 남궁화우를 인질로 잡은 상황.
"비, 비겁하게······."
누군가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무백의 시선이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비겁?"
피식 웃는 하무백.
"난, 그저 너희들도 재미있는 이야기 한번 들어보라고 기회를 주는 거야."
하무백의 시선은 남궁화우에게로 향했다.
"자, 판은 깔아줬는데. 이제 할 말 다 해야지?"
남궁화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말대로다.
남궁세가의 인원들이 모두 모인 듯한 풍경이다.
내원의 변고에 외원의 무인들까지 몽땅 몰려왔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들과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원이 모여든 상황이다.
당연했다.
내원의 연회장 건물이 폭삭 무너져 내렸으니.
비상 상태가 아닌가.
"큼큼."
남궁화우가 그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말문을 열었다.
또랑또랑한 그의 목소리는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귀에 쏙쏙 박혔다.
"연회장에서 나는 가주이신 형님께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었소."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화우에게 모여들었다.
그것은 검진을 구성한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
남궁화현이 이를 악물고는 막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하무백이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전신을 옥죄는 무시무시한 살기.
'큭.'
순간 온몸이 굳었고.
때를 놓쳤다.
남궁화우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남궁지후. 그 아이를 소가주로 삼지 않는 이유. 적법한 장자를 계속 대공자인 상태로 두는 이유. 그것을 왜 숨기려 하냐고 묻자 대호법이 날 공격했단 말이오!"
일부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현철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의 흥미가 조금 올라갔다.
연회장을 무너뜨린 대적이 눈앞에 있음에도.
남궁화우가 건드린 주제가 그만큼 파격적이었다.
이미 세가의 가솔들 사이에 종종 화제에 오르는.
"이십여 년 전 형님은 형수님 두 분과 수행무사를 데리고 외유를 나가셨소. 답답한 세가를 벗어나면 혹시 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고. 그리고 십구 년 전. 두 아이만 데리고 귀환하셨지. 물론 그 아이들은 남궁의 핏줄이 맞았소. 증명을 받았으니까."
여기까지는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다.
십구 년 전의 일이었기에 연배가 어린 이들은 잘 모르는 일이고.
"그런데도 형님은 지후를 소가주에 올리지 않으셨소. 아니, 어떻게든 못 오르게 하려 하는 것 같았지. 그 이유가 무엇이오? 지후가 남궁의 핏줄이기는 하나, 형님의 핏줄이 아닌 것은 아니오이까!"
커다란 외침.
쿵!
그것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의 머리를 쇳덩이로 때리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그 누구도 가주에게 꺼낼 수 없는 말을, 그의 막냇동생이 가솔들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내뱉은 것이다.
"무슨 개소리냐! 지후는 분명한 나의 아들이다! 검대는 무엇 하느냐! 저기 말도 안 되는 개소리로 세가를 어지럽히려 하는 역도를 당장 처단하지 않고!"
남궁화현이 발작하듯 외쳤다.
당장에 동생 남궁화우를 역도라 규정하면서.
그 순간 하무백의 손이 다시 움직였고, 공손무외 곁의 죽립인 두 사람과 남궁 남매가 진 가운데로 부드럽게 날아왔다.
추동은 하무백의 능공섭물에 의해 날아가면서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백 명에 달하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만들어 낸 검진.
그 한 가운데로 가고 있는 것이었음이니.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이던가.
잔뜩긴장한 추동.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뚝.
뚝.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려 손등에 뚝뚝 떨어지는 땀.
'무슨 땀이······.'
추동은 한 손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흥건하게 닦여 나온다.
'가만······.'
땀이다. 흥건하게 고인 땀.
그런데 이렇게 보니 이건.
'물··· 이기도······.'
추동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떠오르는 생각.
혀에서 떨어져 나간 삼수변(氵).
그것이 어쩌면 이것 아닐까?
추동의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그리 생각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추동은 그 생각에 자신의 목숨이라는 판돈을 걸었다.
혀(舌)를 활(活)로 바꾸기 위해.
도박판에서 번번이 잃기만 하던 그가, 목숨을 건 도박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남궁화우가 추동의 죽립을 벗겼다.
그 순간 추동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깨달은 것이다.
물(氵)이 떨어진 활(活)이었던.
혀 설의 점괘가 지금을 가리킨 것임을.
이제 자신의 살고 죽음은 자신의 혓바닥이 결정할 것이다.
추동이 시간을 끌자 남궁화우가 먼저 말했다.
"형님은 이 자를 모르시오? 아니, 암영! 암영은 이 자를 모르는가? 그간 이 자를 죽이기 위해 지독하게 쫓았을 터인데?"
가솔의 무리에 숨어 있던 남궁화진은 흠칫했다.
그 말대로다.
가주의 명령에 따라 십수 년간 쫓던 점쟁이 놈이다.
그런데 저놈이 왜?
"무슨 망발이냐!"
"모산파 출신의 술법사, 추동. 이 자가 당시 형님을 수없이 만나, 형님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임을 알려주었다고 했소이다."
남궁화우의 반박.
그 말에 순간 남궁세가가 조용해졌다.
남궁화우가 한 말 때문이다.
모산파의 술법사가 남궁화현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판단했다.
그 말이 주는 충격.
남궁세가는 술법을 사이한 수법이라 치부하지 않는다.
당장 술법을 이용해 핏줄을 증명하고 있지 않던가.
그러하니 술법사의 판정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개, 개소리!!! 나는 처음 보는 놈이다!!"
"남궁 가주. 어찌 그러십니까. 소인은 이십삼 년 전부터 가주를 뵈었습니다. 당시는 소가주셨죠."
각오를 다진 추동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살아야 하니까.
"닥쳐라. 어디 떠돌이 점쟁이 따위가 그딴 헛소리를 하느냐!!"
남궁화현이 노성을 토했다.
"형님은 어찌 이 자가 떠돌이 점쟁이라는 것을 아시오? 나는 분명 모산파 출신의 술법사라 했거늘!"
바로 이어진 남궁화우의 반격.
그 말에 순간적으로 남궁화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로 향하는 세가 사람들의 눈빛 역시 변했다.
"헛소리! 그냥 보아도 보이는 것뿐이다."
구차한 변명이었다.
공손무외의 수행원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나름 깨끗한 의복으로 갖춰 입고 있는 상태.
어디로 봐도 떠돌이 점쟁이로는 보이지 않았음이니.
"이 자가 그날의 전모를 모두 알고 있다 하였소이다!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남궁화우가 선언하듯 말했다.
"뭣들 하느냐! 저 역도 놈들을 당장 처단하지 않고!"
남궁화현이 악을 쓰며 외쳤다.
그의 서슬이 워낙 시퍼랬기에 움찔하며 몇몇 검대가 움직이려 할 때.
"이야기 아직 안 끝났다. 움직이면 죽는다."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
그 말과 함께 검집에 꽂힌 검이 홀로 스르릉 뽑혀 나왔다.
"이, 이기어검······."
말도 안 되는 경지.
그 간단한 한 수에 검대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죽기 싫은 것도 있었고, 이 이야기의 뒤가 궁금한 것도 있었다.
남궁화현의, 가주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추동은 목이 터져라 그날의 이야기를 말했다.
필사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는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떻게 백 부인이 임신했는지, 그 아이가 딸이라 판정되어 주 부인을 어찌 임신시켰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찌 도망을 쳤는지.
그 후 두 부인과 수행무사는 어찌 되었을지 자신의 생각까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세가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남궁화현 주변의 사람들이 주춤주춤 떨어졌다.
자신들이 존경하고 모시던 가주가 그런 인면수심의 짓을 저질렀다니 믿고 싶지 않았으나.
몸은 제멋대로 반응했다.
남궁화현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원로원의 호법들뿐이었다.
"마, 말도 안 되는 날조다! 모함이야! 날 가주에서 끌어내고 제 놈이 가주가 될 욕심으로 남궁화우 저놈이 꾸며낸 거짓이야!"
남궁화현이 분노에 찬 눈으로 남궁화우를 쏘아보며 외쳤다.
"저놈이 하는 헛소리의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이냐! 저딴 놈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야!!"
"그렇다면 왜 지후를 소가주로 삼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 여기기에는 다른 아이들은 더욱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지린의 제왕검형을 직접 보시지 않았소이까!"
남궁화우의 반박.
연회장에서 남궁지후와 남궁지린의 비무를 보았던 이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모로 보아도, 현재 남궁세가의 후기지수 중 소가주에 가장 어울리는 이는 남궁지후였으니까.
"닥쳐라! 그것은 가주인 내가 판단할 문제다! 증거도 증인도 없이 고작 저런 애꾸 놈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남궁화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성을 반쯤 잃었다.
그랬기에 죽립인이 더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추동이 까발린 그날의 일이 주는 충격 때문이다.
"증거라 하시었소?"
남궁화우가 남궁화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는 곧장 추동의 곁에 있는 외팔이 죽립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천천히 자신이 쓴 죽립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