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왜 그랬던가?
오른팔이 사라진 가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가주.
그리고 단전이 뚫려버린 가주.
이 모든 게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화현.
이것이 지금 그의 꼴이었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분명 가주와 생사결을 펼친 이는 방계 중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방계.
즉, 남궁의 성을 가진 이들 중 가장 낮은 신분.
익힌 것도 대연검법이 전부라 하였다.
그런 방계의 무인에게 남궁세가의 가주가 꺾였다.
어디 그뿐이랴.
그가 보여준 그 검의 형상은 무어란 말인가.
오직 가주만이 보일 수 있는 검의 형상 아니던가.
제왕검의 후반기 절초.
딱 하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오직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형을.
대연검법만 익힌 방계의 무인이 펼쳤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혼란과 혼돈.
그것이 침묵으로 찾아온 것이다.
"크으윽······."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흘리는 남궁화현.
어느새 그의 단전에서 뽑은 검을 늘어뜨린 남궁휘가 그 모습을 복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과 같은 꼴을 만들어 버리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다.
목을 베어 버리면 그날의 울분과 원한이 사라질 줄 알았다.
허나.
'답답하구나.'
여전히 가슴은 꽉 막힌 채 답답했다.
그럴 수밖에.
저놈을 이 꼴로 만들었다 한들.
두 부인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저놈을 이 꼴로 만들었다 한들.
자신과 아이들이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대로.
변함없다.
그의 추악한 죄악을 단죄했다는 사실.
그것 하나면 빼면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남궁화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남궁휘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십 년 전.
그날과는 완전히 뒤바뀐 눈높이.
"왜 그랬던가? 대체 왜?"
남궁휘가 읊조리듯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과거라는 시간에 대한 슬픔.
"크흐흐흐흑. 왜냐고? 나는 가주가 되어야만 했으니까. 크흐흐. 빌어먹을 새끼. 그때 완벽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서로 다른 후회가 담긴 목소리.
남궁화현의 대답은.
남궁휘의 복잡한 마음을 조금은 정리해 주었다.
그래.
되돌려지는 것은 없더라도.
모진 꼴을 당한 두 부인의 넋이라도 위로하자.
나와 두 아이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대가라도 치르게 하자.
그리 마음먹은 순간.
검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손무외가 죽이면 안 된다고 하여 단전을 꿰뚫었던 것을 잠시 잊은 채.
"네 이놈!!!"
그 순간.
남궁현철이 움직였다.
남궁휘의 검이 다시금 움직여 남궁화현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그야말로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연회장에서 하무백에게 달려들었던 것이 제 모든 것을 보여준 게 아니었다는 듯.
그 역시.
제왕검을 그려내며 남궁휘를 향해 쏘아졌다.
짙은 남색빛의 제왕검.
그 모습에 세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남궁휘에 이어 남궁현철이라니.
남궁현철 역시 유일한 예외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어찌 그가 제왕검의 형상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남궁현철은 세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단 남궁화현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저 역도들을 모조리 쓸어야 했다.
그래야 제 손자에게도 기회가 온다.
가주가 될 수 있는 기회.
그렇기에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검을 펼친 것이다.
제왕검의 형상까지 피워올리며.
그의 제왕검은 조금 전 남궁화현의 그것보다 훨씬 더 흉험한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든 고수 중의 고수였으니.
남궁현철의 검이 남궁휘와 남궁화현 사이에 떨어졌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상황인지라 남궁휘는 황급히 뒤로 몸을 빼냈다.
이어서 남궁현철의 검이 남궁휘의 목을 노렸다.
챙!
허나 그것은 어느새 나타난 하무백의 검에 막혔다.
"칫."
아쉽다는 듯 혀를 찬 남궁현철은 남궁화현을 안아 들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런 남궁화현의 왼손에는 잘린 자신의 오른팔과 검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하무백 일행에게서 남궁화현을 빼낸 남궁현철.
"뭣들 하느냐! 감히 가주를 시해한 저 역도들을 당장 처단하지 않고! 남궁세가는 당장 저 역도들을 쳐라!!!"
남궁현철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허나 당장 몸을 날리는 무사들은 없었다.
조금 전 모든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생사결의 결과를 보지 않았던가.
그 결과를 무시하고 집단이 개인을 핍박한다는 것은.
자부심 강한 정파의 무인들인 남궁세가의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궁화현이 그 모습에 비칠비칠 일어났다.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는 오른팔.
이제야 겨우 지혈을 한 남궁화현.
낯빛이 하얗게 질렸건만, 상처 때문에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기에 그것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남궁화현이 왼손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급박한 와중에 굳이 오른팔과 검을 챙긴 이유.
그중 하나.
남궁화현이 검을 치켜들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남궁화우 역시 마찬가지.
남궁지후와 남궁지유는 당당히 서 있었다. 남궁휘와 함께.
남궁휘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오른팔을 자르고서는 저 검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자책도 하였다.
남궁휘는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입니다."
하무백의 곁에 다가온 그가 말했다.
남궁화현이 보여주는 저 의식의 의미를 알았기에.
자신은 이십 년 전 그날.
남궁세가를 스스로 버렸기에.
이리 당당히 서 있지만.
남궁세가의 가솔이라면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이 당연했다.
남궁현철 역시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지 않은가.
"남궁세가의 가주 신물. 제왕청천검의 권위로 명한다! 저 역도들을 쓸어버리고, 역도들의 흉계를 도운 공손무외를 내 앞으로 잡아 와라!"
내공을 잃었기에 온 힘을 다해 외쳐도 주변에서만 울린 명령.
허나 그 명령을 그대로 따라 외친 남궁현철의 목소리가 남궁세가 깊숙한 곳까지 모두 퍼져나갔다.
가주 신물, 제왕청천검.
그 권위로 명한 명령은 세가의 모든 것에 우선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명령은 오직 가주만이 발동할 수 있는바.
생사결의 결과 따위는 상관없었다.
남궁화우가 주장한 명분 따위도 상관없었다.
남궁화현은 날카로운 눈으로 공손무외 또한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늙은이까지 한 패였어.'
또한 저 빌어먹을 늙은이라면 자신의 잘린 팔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랬기에 공손무외를 잡아 오라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몸을 일으킨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눈에는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오직 제왕청천검의 명령만을 떠올리는 눈빛.
그것이 아니라면 명분이 있는 이들을 도저히 공격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우. 끝까지 지저분하군."
하무백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몸을 일으킨 남궁화우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제왕청천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오!"
"네 이놈 역도 따위가 감히 제왕청천검을 입에 올리느냐!!"
남궁현철이 노성을 터뜨렸다.
"지금 밝혀졌듯 남궁화현은 가주의 자격이 없는 인물이오. 그런 자가 가주에 올랐는데, 어찌 신물의 권리가 있겠소이까!! 제 부인을 직접 죽인 이가 가주라니! 대 남궁세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이까!!"
남궁화우의 필사적인 외침.
허나 그럼에도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조금씩 움직였다.
그의 외침에 동요하는 듯도 하였으나.
"내가 지금 남궁세가의 가주다!"
남궁화현의 필사적인 외침.
이 외침 때문이었다.
남궁화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하여도.
지금 남궁세가의 가주는 남궁화현이었기에.
세가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신물, 제왕청천검의 명을 따라야 했다.
그 모습에 하무백은 조소를 머금었다.
"남궁세가의 가주라······. 그렇다면야, 뭐. 내가 하무백이다. 이리 말해주면 되려나?"
그러면서 검을 뽑아 든 하무백.
"쳐라!"
남궁화현의 외침과 동시에 수없이 많은 무사들이 하무백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일부는 공손무외와 마진기를 향해 달려갔다.
쿠르르릉! 쾅!
거대한 검강이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하무백의 검격.
공손무외를 향해 달려가던 무사들이 멈출 수밖에 없는 엄청난 검격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그 순간.
공손무외와 마진기는 재빨리 하무백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하무백이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그리고 일행의 안전이 모두 확보된 순간.
하무백은 수없이 많은 남궁세가의 무사들 속으로 몸을 날렸다.
"죽어라!"
"죽여!"
살기를 가득 머금은 검이 하무백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하무백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대신.
"크억!"
"악!"
"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무백의 검이 그들의 요혈을 찌른 것이다.
정확히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요혈과 마혈.
그렇게 하무백의 공격을 받은 이들은 전신을 꿰뚫은 지독한 고통에 온몸을 부들거리며 쓰러졌다.
마혈 역시 당했기에, 당분간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고통에 부들부들 떠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무백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혹여라도 남궁 남매 등 하무백의 일행이 있는 곳에 접근하려는 놈들이 있으면.
쿠콰콰콰콰과!!!
요란한 파공성과 함께 하무백의 검이 날아갔다.
"이, 이기어검!!"
다시 한번 보여주는 신기.
"이때다! 쳐라!"
검이 없는 하무백을 향해 몸을 날리는 부나방들.
그들은 무참히 두드려맞고 쓰러졌다.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뜩 부어서는.
이기어검은 무서웠다.
요혈을 정확히 찌르던 하무백의 공격과 달리, 허공을 쓸고 지나가는 검.
그 검의 여파에 휘말린 이들의 몸 여기저기서 피가 터져 나왔다.
"크아악!"
"으악!"
극심한 고통.
하무백의 손에 돌아온 검.
방금 그 광경을 본 이들은 감히 남궁 남매가 있는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미친 듯이 하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동료들의 상태를 분명히 보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지는 동료들.
그런데.
'죽은자는 없다.'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에.
그들의 선택은 하무백이었다.
하무백은.
수없이 많은 토끼 떼 속에 나타난 호랑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발길질 한 번에 토끼 서너 마리가 나동그라지듯.
하무백의 검 한 번에 서너 명의 무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남궁화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남궁휘나 남궁지후, 남궁지유도 다르지 않았다.
추동은 아예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자신이 저렇게 무서운 사람에게 수작을 걸었다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몰려들었다.
오직 공손무외만이 여유로웠다.
이미 하무백의 괴물 같은 모습을 겪은 탓이다.
"저런 것이 가능한 일이었군······."
남궁휘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하늘 밖의 하늘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저렇게 많은 무사들이 떼로 덤비는 데도.
정확히 두 곳의 혈만 제압하고 있다.
그 외의 상처 따위는 없었다.
부나방처럼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다가 이기어검에 당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죽이거나 베는 것이 훨씬 쉬울 터인데······."
남궁화우가 읊조렸다.
그 말대로다.
하무백에게는 죽이는 것이 훨씬 쉬웠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땅을 터뜨리는 그 강기 공격만 제대로 사용해도.
순식간에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굳이 귀찮게 일일이 제압하고 있었다.
"대체 왜?"
남궁화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 떠밀려 달려들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때 끼어든 공손무외.
지금 하무백을 공격하는 무사들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신물, 제왕청천검의 명령에 의해 몸을 날리는 이들.
그랬기에 하무백이 검에 사정을 두는 것이라.
공손무외는 그리 말했다.
그때.
"크아아악!"
커다란 비명과 함께.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인물이 있었다.
원로원의 호법 중 한 사람.
그에게는 하무백의 자비가 없었다.
곧이어 날아간 두 번째 검에 생을 다했으니.
"네 이놈!!"
결국 남궁화현의 곁을 지키던 원로원의 호법들이 몸을 날렸다.
이제 남궁현철.
그만이 남궁화현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호법들을 보는 순간.
하무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저들 모두 제왕검형 후반부의 검식을 펼치고 있었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