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모두 뒈져라!
하무백의 검에 변화가 생겼다.
새하얀 검신에 묵빛 검상이 맺혔다.
자신을 향해 살기를 줄기줄기 뿌리며 달려드는 호법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검에는 각자의 검강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하게 보이는 제왕검형의 후반부 검식.
하무백이 그들의 한가운데로 먼저 몸을 날렸다.
사방으로 휘둘러지는 하무백의 검.
허공에 묵빛 선이 지나갔다.
그 선을 따라 갈라지는 검과 호법을.
"크아아악!"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했다.
너무도 허무했다.
제왕검형의 후반부를 펼쳤음에도 하무백의 일검을 제대로 막아내는 이가 없었다.
그들의 수준은 아직 제왕검의 형상을 구현하기에는 모자란 듯.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으나,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무백의 검에 피를 뿌리며 그대로 쓰러졌으니.
순식간에 열 명의 호법이 명을 달리했다.
그 엄청난 무위에.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계속해서 현실이 아닌 듯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하무백.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오늘 대체 몇 번이나 넋이 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괴물이라고는 하지만.
원로원의 호법 열을 한 호흡에 모조리 쓰러뜨리다니.
남궁세가의 그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당금 강호에서 그 일이 가능한 이가 누가 있을까?
천하제일인이라는 정천맹주 소휘웅은 가능할까?
그런 의문이 순간 들 정도였음이니.
남궁화현이 이를 악물었다.
저 괴물을 대체 어찌 막아야 한단 말인가.
"과연 하무백이로군."
그때 나타난 여섯 사람.
그들 역시 원로원의 원로들이었다.
그러나 남궁현철과는 그 노선이 다른 이들.
방계 출신으로 원로원에 들었던 이들.
그랬기에 호법이라는 직위 없이 그저 원로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중 가장 앞서 나타난 이.
하무백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남궁종."
하무백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로군. 칠팔 년 정도 되었던가?"
그리 말하며 그는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검을 뽑는 나머지 다섯 사람.
그들은 하무백을 둘러쌌다.
그 모습에 남궁현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과 노선이 다른 이들.
그래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들이었지만.
이렇게 대적을 맞았을 때는 든든한 이들이었다.
방계 출신으로 원로원에 들기란 쉽지 않았다.
정말로 뛰어난 이들이라는 의미.
남궁현철을 따르는 직계의 원로는 방금 하무백의 손에 모두 명을 달리했다.
참담한 일이다.
남궁현철이 입술을 깨물며 남궁종을 비롯한 방계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제발 저들이 저 괴물을 막아 세워주길 바라면서.
남궁종은 검을 든 채 하무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를 이렇게 적으로 맞이하게 되니, 마교나 혈교 놈들의 기분을 알 것 같군."
씁쓸한 웃음이 걸린 얼굴.
"검을 거둘 수는 없소이까?"
하무백의 물음.
"남궁세가의 일원으로 제왕청천검의 명은 절대적이라네."
"사정을 모두 들었음에도?"
"그렇다네. 현 가주는 가주니까."
앞뒤가 꽉 막힌 노인네 같으니.
하무백은 검을 들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전장의 동료 중 한 사람이었던 노인.
이제 그와 검을 맞대야 했으니까.
"타핫!"
남궁종이 커다란 기합성과 함께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몸을 날리는 다섯 사람.
그렇게 여섯의 검이 검진을 이루며 하무백을 향해 날아갔다.
창궁무애 검으로 펼치는 창궁무애검진.
소수로 단 한 사람의 강적을 상대하기 위한 진법이다.
정밀하게 맞물려 하무백을 향해 날아오는 검.
챙! 채챙!
캉!
검강과 검강이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호법들 중 그 누구도 받아내지 못했던 하무백의 일 검.
그것을 방계의 원로들이 받아내고 있었다.
하무백의 살기가 잦아든 탓이다.
이들이 펼치는 것이 제왕검형이 아닌 창궁무애검었기에.
이들에게서는 제왕검형의 흔적이 없었기에.
'남궁은 남궁이라는 것인가.'
썩어 문드러진 곳인 줄 알았으나.
이렇게 올곧은 이들도 남아 있었다.
새로운 남궁세가에 필요한 이들이란 생각이었다.
남궁지유가.
원로원을 폐쇄해 달라 남궁화우에게 요구했기에.
원로들을 상대로 더욱 매서운 손속을 보였다.
아니, 제왕검형의 후반부를 익힌 것으로 보아 남궁화현과 모종의 거래를 한 이들이란 판단도 들었다.
그런데 이들은 아니었다.
정말 자긍심이 넘치는 검을 뿌려대고 있었다.
조금 전 호법들이 보였던 혼탁한 검식과는 전혀 다른 맑은 검.
그에 맞춰 대우해주어야 했다.
하무백의 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진심을 다해 펼치는 검법.
묵빛 검강은 어느새 새하얀 검강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강의 빛깔이 바뀌는 모습에 깜짝 놀란 남궁종.
그로서는 처음 보는 기사였으니 .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하무백의 검은 웅혼한 기세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무극여의팔절검해.
일절 개천.
하늘을 연다는 검식이 창궁무애검진을 향해 펼쳐졌다.
"크윽······."
어마어마한 기세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검진을 구성한 이들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아직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던 무사들 역시 그 기세에 온몸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궁현철은 이를 악물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남궁화현의 앞을 막아섰다.
이건 단전을 잃은 남궁화현이 버틸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으니.
엄청난 기세를 막아내기 위해 검진이 변화를 일으켰다.
일점을 향해 모이는 여섯 자루의 검.
검첨이 한 점을 향해 모이고 거기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힘은.
하무백이 떨쳐낸 개천의 기세를 순간 멈춰 세웠다.
누군가의 입가에 기쁨의 미소가 어리는 순간.
힘의 균형이 깨졌다.
막아 세웠다 생각한 하무백의 기세가 순식간에 폭풍같이 몰아치더니 여섯 자루의 검을 단번에 쪼갰다.
창궁무애검진이 펼쳐낸 하늘은.
하무백이 열어낸 하늘에 덮여.
그대로 지워졌다.
"크윽."
"으윽."
신음이 터져 나오며.
오롯이 존재하는 하무백의 하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검은 모두 부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검을 들고 서 있는 인물.
남궁종.
"허허. 과연 하무백이로고."
그의 검에 어려 있던 검강이 서서히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파사삭.
검신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커헉."
그리고 한 주먹의 피를 토하는 남궁종.
가장 중심에서 하무백의 검을 막아낸 남궁종.
그 덕에 다른 다섯의 피해가 그 정도로 그친 것이다.
"족히 석 달은 요양해야 할 거요."
퍽.
그 말과 함께 검병으로 남궁종의 뒷목을 후려쳤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남궁종.
다른 다섯 원로도 그대로 쓰러졌다.
"다음 덤벼."
하무백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어떻게 감히 덤빌 수 있을까.
방금 전 그 일 검을 보고서.
그것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검이었다.
남궁세가의 창천을 쪼개고 새로 열어버린 하늘이었으니.
"그럼 내가 가지."
하무백은 슬슬 끝을 내야겠다 마음먹었다.
다시 한번 떨치는 검.
어두운 밤.
하무백은 다시 한번 하늘을 열었고.
사방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크윽."
"아악!"
그리고 터져 나오는 비명.
그렇게 다시 한번 하늘이 열렸다가 닫히니.
서 있는 무인들이 없었다.
모두 제압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고통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먼저 하무백에게 덤볐다가 쓰러졌던 이들은 이제 조금 고통이 가시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넓디넓은 남궁세가에서 서 있는 이는.
남궁화현과 남궁현철.
단둘이었다.
하무백의 뒤에 서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하무백의 시선이 남궁현철에게로 향했다.
"너는?"
"이익."
하무백의 물음에 이를 악무는 남궁현철.
당장에라도 저놈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능력이 없음에 그저 이를 악물 뿐이다.
"안 덤벼?"
이어지는 물음에 남궁현철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사실이었으니까.
겁먹었다.
무서웠다.
저 괴물이.
저놈을 상대하겠다고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가는.
자신의 목이 떨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남궁화현의 손에는 여전히 제왕청천검이 들려 있었다.
허나 기세등등하게 치켜들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지금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제왕청천검의 명을 들을 무사가 없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이는 단둘뿐.
그중 자신은 이미 만신창이지 않은가.
축 늘어진 제왕청천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남궁세가의 모든 세가원들에게 무소불위의 명을 내릴 수 있는 가주 신물이었건만.
지금 그 명을 받들 가솔이 없었다.
가솔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젠 위엄도, 명예도, 힘도, 단전도 다 잃었다.
그가 가진 힘은 단 한 명의 손에 의해 모두 쓰러져 있었다.
"비겁한 새끼."
하무백이 남궁현철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남궁화현의 앞을 막아선 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다.
"제왕청천검의 명은 절대적이라며? 너도 명을 받은 거 아냐?"
"으으."
하무백의 말에 작은 신음을 흘릴 뿐인 남궁현철.
"수, 숙부?"
남궁현철을 나직이 부르는 남궁화현.
"크아아악!"
남궁현철은 갑자기 거친 외침을 토해내며 검을 떨쳤다.
그에게서 다시금 제왕검의 형상이 나타났다.
헌데.
그가 향하는 방향이.
하무백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 반대 방향.
그는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하무백과 최대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하무백.
얼빠진 얼굴의 남궁화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남궁현철의 행동이었다.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
구차하게나마 자신의 목숨이라도 지키려고.
삶에 대한 욕망.
남궁현철 스스로도 몰랐다.
자신의 그 욕망이 이토록 강할 줄은.
피식 웃은 하무백이 땅을 박찼다.
능광만리행.
신속의 신법이 펼쳐졌고.
순식간에 남궁현철의 뒤를 잡은 하무백은 그대로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쾅!
거대한 굉음을 울리며 바닥에 처박힌 남궁현철.
"쿨럭."
피를 토하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그의 눈앞에 남매가 보였다.
남궁지유와 남궁지후.
이 사달의 근본적인 원인.
순간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저 년놈들 때문에······."
저것들이 제 아비를 찾겠다고 설친 것.
그걸 남궁화우 이 썩을 놈이 이용한 것.
설마 남궁휘가 살아있고, 추동이라는 저 잡것마저 나타날 줄이야.
모든 것을 던지고 도주를 택했건만.
그것도 실패했다.
저 괴물 새끼는 경공도 괴물 같이 빨라 순식간에 자신을 이 꼴로 만들지 않았나.
이제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도무지 살아날 방도가 안 보인다.
그런 자신의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난 이 사달의 원흉들.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저것들은 데리고 간다.
일수유의 순간, 이 복잡한 생각이 남궁현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남궁현철은 남궁지유를 향해 검을 뿌렸다.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본 남궁지유는 깜짝 놀랐다.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남궁현철이 제왕검형을 펼치며 도주를 시도하고 이곳에 처박히기까지 불과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리 갑자기 검이 날아올 것이라 어찌 예상했겠는가.
깜짝 놀라 몸이 굳은 남궁지유.
그런 그녀의 곁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챙!
남궁지유를 향한 남궁현철의 검을 막은 이.
남궁지후였다.
"건방진 새끼가."
남궁현철의 검에 어리는 짙은 남빛의 검강.
그의 성정만큼이나 혼탁한 빛깔이었다.
제왕검의 형상과 같은 빛깔의 검강.
그에 맞서 남궁지후는 백색의 검강을 피어 올렸다.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순백의 검강.
남궁현철이 제왕검형을 펼치며 남궁지후를 몰아붙였으나, 남궁지후는 침착하게 그 검을 막아냈다.
제왕검형이 아닌 창궁무애검으로.
아니, 창궁무애검의 묘리가 들어간 제왕검형의 전반부였다.
대연검법, 창궁무애검.
그 두 검에 대한 남궁지후의 깨달음을 담은 제왕검형.
'어, 어떻게······.'
남궁현철은 대경했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검에서 하늘을 보았기에. 바다를 보았기에.
조금 전 하무백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하늘이었고.
푸르디 푸르고, 높디 높은.
남궁세가의 하늘이었다.
그 하늘을 찢어발겨야 죽일 수 있다.
그랬기에 제왕검을 피워 올리려 하였건만.
울컥.
입안 가득 피만 올라올 뿐이다.
조금 전 하무백이 집어 던졌을 때.
심각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단전이 찌르르 울렸다.
어느새 돌아온 하무백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남궁휘의 왼팔을 잡았다.
하무백의 모습에 남궁휘는 겨우 마음을 다잡고 남궁지후의 검을 지켜볼 수 있었다.
"크아악!"
남궁현철이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입 안에 고였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일격에 남궁지후가 비틀비틀 두 걸음 물러섰다.
허나.
남궁현철은 무려 다섯 걸음을 물러섰다.
명백한 남궁지후의 우위.
남궁현철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남궁지후를 바라보았다.
겨우 저런 애송이에게.
아무리 자신이 내상을 입었다지만.
고작 저런 애새끼의 목숨 하나 거두지 못한다니······.
"수고했다."
그리고 하무백이 그런 남궁지후의 곁에서 걸어왔다.
"으, 으으."
남궁현철의 두 눈에 절망이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광기로 변했다.
"빌어먹을! 모두 뒈져라!"
그 말과 함께.
남궁현철은 자신의 단전을 폭주시켰다.
자폭과 함께 상대와 함께 죽음에 이르는.
동귀어진의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