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268화 (268/312)

268화. 사흘 굶었다

하투제 사흘 전.

한설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 좋겠네."

그 중얼거림에 하무백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여기 산주(山主)가 흑표였던 거 알고 있어요?"

"아아."

무얼 말하는지 대번에 알았다.

작년에.

맹룡대 칠 조가 우연히 만나서 잡았던 녀석.

"일 년이 지났으니. 산주가 새로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놈은 왜?"

하무백의 물음에 한설빙이 싱긋 웃었다.

"정면에서 마주해 봐야죠. 생사결의 살기를."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맹룡대 칠 조도.

흑표와의 싸움에서 겪었던, 흑표의 살기에 노출된 경험이 하투제에서 도움이 되었으니까.

한설빙은 맹룡대 칠 조에게서 작년에 있었던 일을 들을 때.

이미 마음을 정했었다.

흑표 정도의 상대를 와룡대에 붙여주기로.

"산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놨죠."

"그럼 그곳이?"

하무백의 물음에 한설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란산에 진법이 펼쳐진 곳이 있었다.

한설빙이 전력을 다해 펼친 진법인지, 하무백조차도 진법의 존재만 알아차렸을 뿐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아내고자 한다면야, 진법 근처까지 접근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한설빙이 생각이 있어 펼쳐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산주를 잡아다가 가둬둔 용도였을 줄이야.

"상당히 굶었겠는데?"

"적당히 먹이를 넣어주긴 했는데······."

"했는데?"

"사흘 전부터 끊었어요."

하무백이 물끄러미 한설빙을 바라보았다.

"왜, 왜요?"

"참 독하다. 너도."

그 말에 발끈하는 한설빙.

"이걸 누구한테 배운 건데요?"

그녀의 반박에 하무백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교관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줄도 모르고.

와룡대 생도들은 잠룡대 생도들과의 대련에 정신이 없었다.

하무백에게 추궁과혈을 받은 후.

몰라보게 실력이 좋아졌다.

그럴 수밖에.

내공의 흐름이 좋아지고, 검에 싣는 내공이 늘어났으니.

움직임도 그만큼 빨라졌다.

"효과 좋네요."

그 모습에 한설빙이 말했다.

"당연하지. 그게 어떤 대법인데."

여의개정대법.

사문에 전해 내려오는 추궁과혈의 형태로 펼치는 개정대법이었다.

"그렇긴 하죠."

한설빙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언제 갈 거야?"

"점심 먹고?"

와룡대 생도들은 자신들에게 앞으로 닥칠 고난은 전혀 모른 채, 맛있게 점심 식사를 했다.

이제는 사냥에 꽤 익숙해져 제법 많은 사냥감들을 잡은 덕이다.

그렇게 식사 후 운공까지 마쳤다.

"이제 마지막 수련이야."

한설빙의 말에 와룡대 생도들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나타났다.

드디어 이 지독한 수련을 끝낸다는 기쁨.

곧 하투제라는 긴장감.

과연 자신들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 걱정.

한설빙은 그들의 그런 복잡한 심사를 안다는 듯 말했다.

"이 수련을 무사히 마치면. 하투제에 좀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거다. 그럼 따라와라."

한설빙이 몸을 돌리는 찰나.

"잠깐."

하무백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지그시 와룡대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갑작스레 온몸을 덮치는 오싹하고도 무시무시한 기운.

당장에라도 목이 떨어질 것만 같고,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온몸을 옥죄는 느낌.

"이, 이게······."

은화량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살기라는 거다. 한번 경험은 해둬야지."

하무백은 담담히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면 다녀와라."

하무백은 그 말을 끝으로 나무에 걸어놓은 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적당한 그늘에 시원한 바람까지.

식후 낮잠에 딱 좋았다.

한설빙은 그런 하무백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영문도 모른 채 생도들은 한설빙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걸어 들어간 목란산 깊숙한 곳.

"어······. 여긴?"

익숙한 지형이다.

그걸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연하민.

"응?"

그녀의 중얼거림에 백리평도 단목운뢰도 알아보았다.

낙우진과 당진산까지도.

그곳이었다.

남궁지후와 결전을 벌였던 그 평지.

일 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당시의 감정에 막 빠져들려는 찰나, 생도들의 눈에 띈 진법.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설빙에게로 향했다.

왜 이곳에 진법을 펼쳐둔 것일까.

몹시 수상하고도 불길해 보였다.

"들어가자."

그녀가 진법을 간단히 손보며 말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둔 진법의 문을 연 것이다.

그녀가 앞장서서 들어갔고, 그 뒤를 맹룡대 생도들이, 마지막으로 와룡대 생도들이 들어갔다.

막 진법 내부로 들어선 이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사나운 안광에 침을 줄줄 흘리는 거대한 핏빛 털의 늑대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겁혈랑(大动血狼). 이 산의 산주야. 설마 이런 놈이 산주가 되었을 줄은 몰랐어. 이 정도 녀석이면 더 큰 산에 있는 놈이라."

"그, 그런데요?"

나중천의 목소리가 떨렸다.

혈랑은 침을 줄줄 흘릴 뿐.

달려들지 않았다.

일행이 있는 곳에 자신이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운이 좋았지. 저 정도 강한 놈이랑 싸울 수 있으니까."

"누, 누가요?"

은화량이 물었다.

그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다섯 사람에게로 향했다.

한설빙과 맹룡대 칠 조의 시선을 받은 와룡대 생도들.

그들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혈랑을 바라보았다.

달려들지 않는데도 온몸이 따끔거리는 듯한 살기.

'아, 이것 때문에······.'

이제야 조금 전의 하무백의 행동을 이해한 이들이다.

"여기는 진법으로 보호되는 안전지대라 괜찮긴 한데."

역시.

그래서 혈랑이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너희는 이제 나가야지."

그 말과 함께 한 발 뒤로 물러서는 한설빙. 그녀의 행동에 맹룡대 생도들은 눈치껏 움직였고.

와룡대 생도들과 그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찰나.

진법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 그곳은 반의 반 각(약 4분 내외) 후면 혈랑 쪽으로 열릴 거야. 그동안 준비 잘해."

한설빙의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와룡대 생도들.

당진산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흑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네······."

자신들은 그야말로 사고였다.

헌데, 이 친구들은 의도를 가진 교관에 의해 이 상황에 직면했으니.

그 단초를 자신들이 만든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해졌다.

시간은 금세 흘렀다.

다섯 사람이 덜덜 떠는 가운데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고 검진을 이뤘다.

의외로 하무백의 배려 덕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하무백이 쏘아 보냈던 살기.

그것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리라.

찰나였지만.

그것을 한번 겪어 봤다고 조금 더 의연히 대처할 수 있었다.

이윽고.

한설빙이 말한 시간이 모두 흘렀다.

혈랑은 진법의 변화를 느꼈음인가?

"크르르릉."

울음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번들거리는 두 눈.

그는 지금 먹이를 눈앞에 둔 포식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그 녀석 사흘 굶었다."

한설빙이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섯 사람은 온 신경을 혈랑에게 집중했다.

한설빙은 그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님. 정말 잔인하시네요."

당진산이 그 모습이 너스레를 떨었다.

"왜? 너도 할래? 넌 호랑이로 잡아다 줘?"

"아, 아닙니다."

당진산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한설빙이 잡아다 주겠다는 호랑이가 보통 호랑이는 아닐 테니.

혈랑과 와룡대는 서로를 경계했다.

배가 잔뜩 고플 혈랑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사냥감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는 듯.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허점이 보이면 단번에 달려들어서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모습.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치는 짧지 않았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혈랑이 너무 배가 고팠으니까.

"크허어엉!"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와룡대 생도를 향해 달려드는 혈랑.

영후인과 임대치가 앞으로 나서며 서로의 검을 교차해 막았다.

가장 침착하고 담력이 센 두 사람이었기에 전방에서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랬기에 혈랑의 돌격에도 뒤로 밀리지 않고 당당히 막아낼 수 있었다.

"컹."

검날이 혈랑의 가죽을 파고들었다.

허나 깊은 상처는 내지 못했다.

가죽이 그만큼 단단했으니.

고통은 느낀 듯 훌쩍 뒤로 물러나는 혈랑.

그 뒤를 심철산이 쫓아 검을 내질렀다.

천검파에서 어깨너머로 본 것이 있었던 덕인지, 다섯 사람 중 검의 위력이 가장 강한 심철산.

그가 주공을 맡았다.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은화량과 나중천의 공격.

보법을 능숙하게 펼치며 민첩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이었기에, 상황에 맞춰 부공을 펼치는 역할이다.

게다가 둘은 임기응변도 좋았다.

과연 두 사람은 동분서주하면서 혈랑의 빈틈을 노렸다.

유룡검진이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막상 전투에 돌입하자, 이들은 언제 두려움에 떨었냐는 듯 매섭게 움직였다.

혈랑은 살기를 줄줄이 흘리며 와룡대 생도들에게 달려들었다.

단단한 가죽을 방패 삼아 몰아치는 혈랑의 공격.

바닥을 구르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다시 모여서 반격을 가하고.

그렇게 접전을 벌였다.

맹룡대 생도들은 그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흑표를 상대했던 자신들보다 나았다.

이 정도라면.

와룡대 일 조 놈들을 이길 거다.

자신들도 잠룡대 일 조를 이기지 않았던가.

"잔인한 게 아니라, 배려하신 거네요."

연하민이 전투를 지켜보며 담담히 말했다.

한설빙의 물음.

"당연하잖아요. 사흘이나 굶었으면. 몸 상태가 정상일 리가 없잖아요."

그 말에 피식 웃는 연하민.

그랬다.

사흘을 굶긴 의도.

혈랑을 더욱 사납게 만들려 한 것도 있었지만.

와룡대 생도들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늑대는 본디 무리 생활을 한다.

대겁혈랑은 그런 본능과는 달리 홀로 사는 별종.

그만큼 강했다.

와룡대 생도들의 실력을 믿고는 있었지만.

하투제까지 사흘.

경험을 위한 전투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런 상황까지 모두 안배해 둔 것이다.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상처가 많아질수록 혈랑이 더 사나워졌으니까.

"으윽."

사나운 살기에 살짝 멈칫거린 영후인이 혈랑의 발톱에 상처를 입었다.

"집중해!"

그 모습에 한설빙이 커다랗게 외쳤다.

그녀의 오른손은 검병을 잡고 있었다.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비틀거리는 영후인을 돕기 위해 나중천이 한 발 앞으로 나섰고, 심철산이 혈랑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혈랑은 전략을 바꿨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판단한 것인지.

옆구리를 향한 공격을 무시하고 곧장 앞으로 돌진한 것이다.

그대로 혈랑의 이빨이 나중천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뜨거운 입김과 노릿한 짐승의 냄새.

그리고 살기.

그 모든 것이 훅하고 몰려드는 순간.

푸학!

어느새 혈랑의 아래를 파고든 은화량의 주먹이 그대로 혈랑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그대로 입을 다문 혈랑.

그때.

"눈을 노려!"

임대치가 그리 외치며 혈랑의 왼쪽 눈을 찔렀다.

바로 앞까지 근접했기에 그대로 파고든 임대치의 검.

"크아아앙!"

커다란 고통에 혈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토해냈다.

앞발이 모든 것을 할퀴어낼 듯 움직였다.

그 순간.

갑작스러운 살기로 잠시 굳었던 나중천의 눈에 쩍 벌어진 혈랑의 입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좀 전과 달랐다.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드는 입이 아니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입.

목구멍이 그대로 보였다.

"죽어라!"

나중천이 목구멍을 향해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목구멍까지 단단한 가죽은 아니었기에.

혈랑의 목은 그대로 꿰뚫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혈랑.

목구멍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나중천의 오른손이 혈랑의 피로 젖었다.

그럼에도 나중천은 검을 더욱 깊게 박아 넣었다.

잠시 후.

혈랑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후우."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나중천이 주저앉았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잘했어."

한설빙이 흐뭇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죽는 줄 알았어요. 교관님."

임대치가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설마. 그럴 일은 없었어."

검병을 쥐고 있던 한설빙의 오른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녀는 생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옷자락에 땀을 닦아냈다.

"실전은 이것보다 더할 거야. 물론 하투제는 비무 대회이긴 하지만. 이 경험이 너희보다 강한 상대의 기세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줄 거야."

한설빙의 말에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직접 경험을 해보았기에.

"좋아. 오늘이랑 내일은 휴식."

그리 말하며 한설빙은 영후인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깊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금창약을 바르고 잘 치료하면, 하투제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

"씨발. 빌어먹을 훈련이 이제야 끝나다니."

벽이겸이 기녀의 몸을 주무르며 욕설을 흘렸다.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훈련이었다.

"이게 다 그 찢어 죽일 새끼들 때문이지."

탁무전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지난 시간 동안 자신들이 당한 모욕과 고생을 생각하면 그놈들을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았다.

그런 그의 손은 기녀의 앞섶 속에 들어가 있었다.

미칠 듯한 훈련이었다.

그 덕에 그들은 그만큼 강해져 있었다.

와룡대 이십 조따위는 단번에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다.

헌데 그것만 가지고는 분이 안 풀린다.

"맹룡대 새끼들도 족쳐야 해."

철령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당연한 소리를."

"그 새끼들 다 죽여 버린다."

공구패와 화보명 역시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하투제 이틀 전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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