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아직 일러
초무하와 진연심은 산속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다른 조원 둘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는 추휘연 때문이었다.
그녀의 기민한 움직임.
훈련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같은 사람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느새 추휘연이 맹룡대 구 조를 이끌고 있었다.
특별히 따로 의논한 것은 아니다.
그저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갑자기 손을 들며 멈추는 추휘연.
그리고는 검지를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의 행동에 입을 꾹 다무는 생도들.
천천히 소리 죽여 그녀의 곁으로 모였다.
"저기를 봐."
속삭이듯 말하는 추휘연.
그곳에는 다섯 명의 인원이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판정관 한 명이 옆에서 소리죽여 걷고 있었고.
"잠룡대네."
무복을 보고 알았다.
"내가 저쪽에서 화살로 유인할 테니까. 틈이 보이면 뒤를 쳐."
추휘연의 말에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는 생도들.
"가, 가능할까? 잠룡대인데?"
초무하가 살짝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내면 이기는 거고. 지면 탈락하는 거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비무 대회인데.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
맞는 말이다.
애초에 잘할 거라는 기대도 없이 참가한 대회지만.
그래도 최대한 오래 생존하고 싶다는 욕심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했다.
작년의 맹룡대 칠 조 선배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무력하게 탈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어제다.
초무하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휘연아. 너는 괜찮겠어?"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는 동료의 말에 진연심이 걱정스레 물었다.
싱긋 웃어준 추휘연이 빠른 움직임으로 사라졌다.
추휘연은 방향을 잡았다.
자신이 유인한 후 동료들이 저들의 뒤를 치기 가장 좋은 곳으로.
그리고 촉이 없는 화살을 활에 재었다.
촉이 없기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제법 아플 거다. 타박상도 입을 것이고.
그리고 화살이 맞은 부위에 따라, 판정관이 판정을 내린다.
급소를 제대로 꽂으면 한 발에 사망 판정이 날 수도 있는 것.
"후우."
깊은 호흡을 내뱉은 후.
추휘연, 아니 공야휘연은 활시위를 당겼다.
패력천살궁(覇力天殺弓).
가녀린 그녀의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명칭의 궁술.
이것이 그녀의 절기였다.
물론 이곳에서 패력천살궁을 펼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집중해서 내공을 조금만 사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
천리사안(千里邪眼).
그녀의 두 눈이 살짝 빛났다.
목표를 정확히 보기 위한 안법을 발동한 것이다.
명확히 눈에 들어오는 생도들.
그중 가장 강해 보이는 녀석을 노렸다.
공야휘연이 시야를 한 곳에 집중했다.
상대의 심장.
목표가 사정거리에 들어온 순간.
공야휘연은 활시위를 놓았다.
쒜액!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
갑작스러운 소리에 잠룡대 십일 조 네 명은 깜짝 놀라 경계 태세를 취했다.
"큭."
화살은 순식간에 한 사람의 심장어름에 명중했다.
무복이 살짝 찢어질 정도의 위력.
판정관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무심히 말했다.
"사망."
화살을 맞은 생도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이렇게 허망하게 탈락이라니.
판정관은 하늘을 향해 탈락자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젠장. 쫓아!"
분노한 네 사람이 몸을 날렸다.
'멍청한.'
그 모습에 공야휘연이 피식 웃었다.
어디에 매복이 있을지 모르는데.
어디서 화살이 더 날아올지 모르는데 저렇게 무작정 달려들다니.
공야휘연이 의도한 바이긴 했으나, 너무 쉽게 걸려서 김이 샜다.
'정파 놈들이라 그런가? 너무 곱게 자랐네.'
교룡관에서 보았을 때는 나름 수준이 있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야전에서 이렇게 허술할 줄이야.
사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매일매일이 실전의 연속이었으니.
교룡관에서 일 년차들을 대상으로 매년 하투제를 개최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공야휘연은 네 생도가 근처에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자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며 달렸다.
"저기다! 잡아라!"
그런 그들을 향해 피식 웃음을 날려주는 공야휘연.
그 모습에 잠룡대 십일 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 못생긴 년이 감히 우리를 비웃어?"
"죽여버린다!"
그리 외치며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상대와 떨어질수록 유리한 궁사에게 빠른 경공은 필수다.
은향만리신(隱香萬里身).
공야휘연의 경공이 펼쳐졌고.
그녀는 빠르게 달렸다.
잡힐 듯 안 잡히는 공야휘연.
잠룡대 생도들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어느 지점을 지난 순간.
퍽! 퍼퍽! 퍽!
등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
"크윽."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해보았으나.
"잠룡대 십일 조 전원 사망."
판정관의 무심한 판정만 들릴 뿐이다.
판정을 들은 맹룡대 생도들이 오히려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 이게 된다고?"
초무하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휘연! 대단해!"
진연심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공야휘연에게 달려가 안겼다.
기쁨이 넘쳐흐르는 얼굴이다.
'훈련이. 효과가 있었네.'
사실 공야휘연도 상당히 놀랐다.
뒤를 칠 수 있는 최적의 경로로 유인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단번에 끝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래서 자신 역시 공격하려고 화살을 시위에 건 채 달렸는데.
생도들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판정관은 신호탄을 터뜨렸다.
"이럴 시간 없어. 어서 움직이자."
공야휘연이 동료들을 이끌었다.
"탈락 신호탄을 보고 어부지리를 노리는 녀석들이 올지도 몰라.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빠른 판단.
그녀의 말에 맹룡대 생도들은 힘껏 달렸다.
"흐음. 제법?"
하무백은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하무백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완벽하게 기척을 지우고 시야의 사각 속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패력천살궁, 천리사안, 은향만리신. 거기에 사용하고 있는 활 역시 예사 물건이 아니고.'
하무백은 사일자뢰궁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천하의 모든 기병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한 번 본 무공은 잊지 않는다지만, 사일자뢰궁은 하무백도 처음 보는 활이었다.
'아무래도 공야 영감 핏줄 같은데, 무슨 연유로 맹룡대에?'
사해련의 무공을 익혔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들이다.
거기에 저 정도 수준이라면.
떠올릴 수 있는 이는 한정적.
그렇게 추측한 그녀의 정체는 사해련주의 핏줄.
골치가 살살 아파 왔다.
남궁세가에 다녀온 지 며칠이 흘렀다고.
이번에는 사해련일까.
***
"어? 탈락자 신호탄이다."
하늘에 피어오른 푸른 연기를 보며 은화량이 말했다.
"푸른색이면 잠룡대네."
의외였다.
맹룡대가 가장 먼저 탈락할 것이라 여겼는데.
올해 하투제는 신호탄의 체계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판정관마다 다른 신호탄을 사용했는데, 너무 복잡하고 탈락자를 정확히 판별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해서 탈락한 생도들의 소속에 따라 신호탄을 터뜨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잠룡대는 청색, 와룡대는 황색, 맹룡대는 적색이었다.
"쉿."
그런 은화량을 향해 나중천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들은 현재 매복 중.
함부로 소리를 내는 것은 곤란했다.
아무리 의외의 상황이라 하지만.
수신호를 애써 익힌 의미가 무엇이던가.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은화량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이들은.
와룡대 구 조였다.
이십 조 생도들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수신호.
와룡대 구 조 생도들은 이곳에 매복이 있는 줄도 모른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척을 줄줄 흘리며.
심지어 잡담까지 하고 있었다.
"큭큭. 잠룡대에서 가장 먼저 탈락자가 나왔네."
"그것도 벌써 다섯이야. 하나랑 넷. 이거 한 조가 몰살당한 거 아냐?"
"꼴 좋네. 잠룡대 놈들. 지들이 최고인 양 뻐기고 다니더니. 흐흐."
그런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판정관은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이런 경솔한 녀석들이 교룡관의 기대받는 후기지수들이라니.
답답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조금만 더, 조금만.'
자신들이 설정해 둔 공격지점.
이제 몇 발만 더 움직이면 그곳이다.
아직 저 녀석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챈 듯했다.
이윽고.
준비해둔 위치에 그들이 발을 디뎠고.
쌔액!
나뭇가지가 사방에서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간단하면서도 은밀한 함정.
그것이 신호였다.
"뭐, 뭐야?"
"체엣!"
와룡대 구 조 생도들이 당황하는 찰나.
이십 조 생도들이 동시에 튀어나와 공격했다.
"기, 기습······."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들 다섯 전원의 목에 차가운 검날이 드리워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해본 채.
당한 것이다.
"와룡대 구 조. 전원 사망."
판정관은 무심히 판정을 내렸고,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 모습에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은 아무 말도 없이 빠르게 그 자리를 이탈했다.
구 조 담당 판정관은 그런 이십 조 생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미리 합숙 훈련을 나왔다고 하더니. 제대로 훈련받았군. 이 머저리들이랑은 다르게.'
얼마나 달렸을까.
와룡대 이십 조 생도들은 멈춰서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우, 우리가?"
"이게, 이게 가능한 거였네······."
"헉헉. 우와. 우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감탄사를 내뱉는 다섯 사람.
훈련을 하면서도.
믿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 자리해 있었다.
그런데.
첫 전투에서.
너무도 깔끔하게 승리했다.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훈련한 그대로.
아니, 훈련보다 쉬웠다.
상대가 맹룡대도 아니었다.
와룡대.
자신들이 시중들던, 그들과 같은 와룡대 생도들.
그들을 상대로 단번에 승리한 것이다.
이제야 희열이 느껴지며 온몸이 떨렸다.
"아직 일러."
임대치다.
"맞아. 이 정도에 좋아하다가 방심해서 탈락하면, 그걸로 끝이야."
영후인의 맞장구.
그제야 생도들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침착해야 한다.
와룡대 하나 잡았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들은 와룡대 일 조와 내기를 하고 있음이니.
다섯 생도는 다시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잠룡대 다섯 명, 와룡대 다섯 명. 아마 두 조가 탈락한 것 같은데?"
신호탄을 보며 화보명이 말했다.
"병신 새끼들."
철령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맹룡대도 아직 탈락자가 없는데, 잠룡대와 와룡대가 먼저 탈락하다니.
쪽팔렸다.
그렇게 당당히 산속을 헤치고 걷는데.
딱 마주친 다섯 사람.
무복을 보니.
"맹룡대네?"
벽이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맹룡대 다섯 사람은 즉시 방패를 꺼내 들고는 병진을 형성했다.
와룡대 일 조는 가소롭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인이라는 새끼들이 방패 따위나······."
거기까지 중얼거린 벽이겸이 말을 멈추고 철령을 힐끗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자신들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철갑철기군도 기병 방패를 사용했다.
자신들과 전투를 할 때도 방패를 사용했고.
그러니 방패 따위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속마음으로 가지고만 있어야 할 말이었다.
철령의 눈썹이 꿈틀했으나 그뿐이었다.
당장 해치워야 할 놈들을 앞에 두고 내분을 일으킬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으니까.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자."
탁무전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머지 넷도 땅을 박찼다.
전투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저놈들의 병진이 단단했던 것이다.
일 각.
무려 일 각을 소모해서야 다섯을 모두 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철갑철기군을 상대하면서 방패를 든 적과 싸우는 요령을 익히지 않았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으리라.
그것도 철령이 가장 먼저 틈을 벌렸다.
"훗. 그따위 맹룡대 방패도 못 뚫어서 쩔쩔매는 꼴이란······."
철령이 혼자서 중얼거렸으나.
그 말은 벽이겸의 귀에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허나.
발작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하투제 중인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벽이겸 역시 이 와중에 내분을 일으킬 정도로 병신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