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저, 저, 저······
중악 숭산.
소실봉.
이곳은 무림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한 문파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소림사(少林寺).
무림의 태산북두.
현 성세가 예전만 못하다 하나, 소림은 소림이다.
한 중년 승려가 바삐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작은 소림사 후원의 작은 방이다.
사방일장의 작은 방.
바로 소림사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방이다.
소림의 대소사가 이 작은 방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방장을 뵙습니다."
중년의 승려는 합장을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허허, 어서 오게나."
백미백염의 노승.
현 소림의 방장, 현광대사였다.
고승다운 자애로운 목소리로 사질을 맞이했다.
"그래, 연우 사질이 갑자기 무슨 일인가?"
"속가에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리 말하는 연우의 표정은 심각했다.
"응?"
다시 한번 사질을 바라보며 묻는 현광.
"그것이. 사해련에서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응?"
같은 물음이지만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현광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파의 중생이?"
"무창으로 들어왔다 합니다."
"허어."
깊은 탄식이 현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출처는?"
"개방입니다."
현광의 물음에 연우는 짤막하게 답했다.
연자경은 교묘히 연가의 정체를 숨기고 소림사에 정보를 전한 것이다.
이 정보로 인해 소림사와 하무백이 부딪힐 수도 있는 일.
거기에 연가가 엮여 있다는 것을 하무백에게 숨기기 위함이었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착각을 하고 있어. 마교와 혈교의 악적을 처단하기 위해 잠깐 손을 잡았다고··· 쯧쯧. 해서 그때 손을 잡는 것을 반대하였건만······."
그리 말하는 현광의 목소리는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금 전의 그 자애롭던 사람과 같은 인물이라고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이게 모두 소휘웅 맹주. 그 시주 때문인 게지. 쯧쯧."
그리 말하는 현광의 얼굴에는 지독한 경멸이 떠올라 있었다.
사파와의 연합을 추진한 것이 소휘웅이었으니.
전쟁 때문에 운 좋게 맹주에 오른 이.
혈교과 마교의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하여 정파의 단합을 이끌 성스러운 책무가 있음에도.
오히려 끝까지 살아남고, 전쟁을 종식시켜 정파의 영웅이 된 자.
"연 가주의 눈이 틀렸던 게 아쉽구나. 아미타불······."
당시 소휘웅을 맹주로 강력히 추천한 것이 호북 연가의 가주, 연자경이었다.
그러면서 현광을 설득했던 논리가 정파의 단합을 위한 희생 그것이었고.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연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현광의 두 눈에서 고승답지 않은 살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사해련의 종자가 감히 정파의 영역, 다른 곳도 아닌 무창에 들어왔는데 살계를 열어야지. 이제 소림이 건재함을 알릴 때도 되었어. 아미타불."
현광의 말에 연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은 이제 예전의 성세를 되찾았다. 허나 그 사실을 밖으로 알릴 방도가 없었다.
강호의 평화 때문이다.
처참했던 지난 전쟁에서 정과 사가 연합을 했던 때문인지.
현 강호의 정세는 안정적이었다.
정파와 사파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좀처럼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갔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소림은 영원히 소림의 태산북두여야 하지."
현광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명분이 필요한 때에, 아주 훌륭한 명분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도.
하무백 그놈이 엮인.
소림사.
숭산에 웅크리고 있던 거인이 고작 한 사람의 출현을 계기로 그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
어느새 점심 무렵이 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허기를 느끼는 이는 없었다.
늘어난 인원 덕에 하투제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탓이다.
"타핫!"
초무하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잠룡대의 생도가 그 검을 가볍게 막았다 싶은 순간.
초무하의 방패가 다시 그의 오른쪽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큭."
상대는 재빨리 초무하의 검을 튕겨내고 다시 검을 휘둘러 방패까지 후려쳤다.
둔중한 방패를 후려친 탓인지 팔이 찌르르 울렸다.
그 틈에 초무하의 검이 잠룡대 생도의 목에 닿았다.
"사망!"
판정관의 목소리가 울렸고, 초무하의 입가에 기쁨의 미소가 어리는 순간.
등 뒤를 가볍게 찌르는 느낌.
초무하가 뒤를 돌아보니.
보이지 않던 와룡대 생도의 검이 어느새 등에 닿아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사망!"
다시 한번 들리는 판정.
이번에는 초무하의 것이었다.
"젠장······."
아쉬운 듯 욕설을 내뱉은 초무하.
그럴 만했다.
자신이 맹룡대 구 조의 최후의 생존자였으니······.
쌔액!
그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초무하를 잡은 와룡대 생도의 가슴에 촉이 없는 화살이 박혔다.
"사망!"
다시 들리는 판정.
'아······!'
보이지 않아 순간 생각지 못했다.
초무하 자신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추휘연.
그녀가 남아 있었다.
아직 맹룡대 구 조는 탈락하지 않았다.
최후의 생존자가 산속 어딘가에 있었다.
초무하는 화살이 날아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부탁한다. 추휘연······.'
초무하는 탈락을 의미하는 띠를 메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한 번 더 그곳을 돌아보았다.
"하, 빌어먹을 맹룡대 새끼들. 진짜 끈질기네."
탁무전이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밑바닥 놈들이라 그런지 독해. 씨발."
공구패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이들은 산속에 들어와서 적들을 세 번 조우 했는데, 그들이 모두 맹룡대였다.
맹룡대 놈들은 암묵적으로 합의라도 한 것인지, 서로 싸우지 않았다.
오로지 와룡대 아니면 잠룡대만 노리는 듯했다.
부스럭.
그때 들리는 소리.
다섯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몰골의 여섯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패를 든 것이 맹룡대다.
그런데 여섯?
숫자가 안 맞았다.
한 조는 다섯이었으니까.
"씨발. 쓰레기 새끼들이 연합했나 보네?"
벽이겸이 대번에 연유를 눈치채고 욕설을 흘렸다.
허나 그들은 아무 반응 없이 병진을 구성할 뿐이다.
입에 단내나도록 구르면서 익혔던 병진.
"저 병신들이 주제도 모르고."
화보명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 지금까지 어떤 놈들을 상대했는지 모르겠다만. 우리는 너희 같은 개잡놈들이 상대할 몸이 아니야."
철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허나 이들 여섯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탈락한 조원들이 있긴 했지만, 각자 잠룡대와 와룡대를 상대로 한 번씩의 승리를 맛보았으니까.
'그 말대로였어.'
'우리도 할 수 있어.'
이들의 두 눈은 의욕으로 불타고 있을 뿐이었다.
눈앞의 상대가 자신들을 욕하든 조롱하든 상관없었다.
저놈들을 상대하다가 탈락해도 상관없었다.
자신들은 이미 확인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여섯은 검과 방패를 들고 병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이어 탈락의 신호탄이 터져 오르고 있었다.
잠룡대, 와룡대, 맹룡대.
구분 없이 아주 골고루 터졌다.
하투제의 진행 속도가 작년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맹룡대가 참가했기 때문이겠지?"
당진산이 다시 한번 터지는 탈락 신호탄을 보며 말했다.
연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변수까지 예측하고 작전을 짜긴 했지만.
"맹룡대라면 쉬이 매복을 발견하지 못할 거야. 조심하라고도 일러줬고."
백리평의 말이다.
"그래도 진행 속도가 빠르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적을 맞닥뜨릴 수도 있으니까."
연하민의 말소리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이번 하투제는 탈락 신호탄의 색이 세 가지뿐이다.
그랬기에 와룡대 일 조와 이십 조가 탈락했는지는 탈락자가 내려오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
"탈락 안 했겠지?"
단목운뢰 역시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다.
"탈락 안 했다."
하무백의 목소리.
그러나 생도들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갑자기 도깨비처럼 저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데 어느 정도 적응한 것이다.
"와룡대 일 조도, 이십 조도 아직 탈락 안 했다."
담담한 말.
"하투제 진행이 저렇게 빠른데요?"
당진산이 다행이라는 안색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맹룡대에서 재미있는 수작을 부린 녀석이 있어서."
그리 말한 하무백은 다시 사라졌다.
목란산을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 맹룡대 생도들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이 걱정할까 봐 잠깐 들렀다는 것을, 이제는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아차.'
잠깐 장소를 이동하던 영후인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파직.
막 내딛는 발로 나뭇가지를 밟은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섯 사람이 나타났다.
방패를 든 다섯.
맹룡대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사라졌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영후인은 계속 숨어 있었다.
방패를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떠올린 것이다.
'정말 까다로워 보였지.'
굳이 그게 아니라도.
은신해 있으면서 다른 와룡대와 맹룡대의 전투를 보았다.
와룡대가 겨우겨우 이기긴 하였으나, 피해가 막심했다.
마지막까지 확인한 생존자가 세 명이었으니까.
이마저도 뿔뿔이 흩어진 상태.
맹룡대를 상대하다가 무려 둘이 탈락한 것이다.
방패로 이룬 병진의 위력.
절대 경시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맹룡대는 미리 말을 맞춘 것인지, 맹룡대와 싸우지 않았다.
마주치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런 영후인을 은밀히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공야휘연이었다.
'분명 와룡대 이십 조지?'
공야휘연은 그저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활로 충분히 잡을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와룡대 이십 조는 내기에서 이겨야 하니까.
그 빌어먹을 와룡대 일 조 새끼들에게 치욕을 주려면.
'맹룡대 칠 조 선배들이랑 친해져야겠네. 빌어먹을 새끼들 좀 골려 주려면.'
맹룡대 이 년차 칠 조의 수발을 드는 와룡대 일 조. 그리고 곁에서 약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공야휘연.
그녀의 눈이 멀어져 가는 맹룡대 생도들에게로 향했다.
'미리 떡밥을 뿌린 것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네.'
목란산으로 이동하는 중.
맹룡대끼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은연중에 여기저기 흘렸다.
맹룡대는 어차피 아무도 기대하지 않을 거, 최대한 잠룡대와 와룡대를 잡아서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고.
필요하면 두 개 조가 연합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한 훈련이었지 않냐는 여론을 여기저기서 은밀히 조성했다.
하룻밤이 지나는 동안, 그런 공야휘연의 작업에 넘어온 이들이 많은 듯했다.
그녀는 조용히 움직여 그 자리를 떠났다.
이미 판정관마저 그녀의 움직임을 놓친 상황.
움직임에 제약이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무공을 제대로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재미있는 짓을 하고 있던데?"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판정관은 아니다.
알고 있는 목소리였으니까.
역시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대단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은 맹룡대에 들어온 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그것도 단둘이라니.
공야휘연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상대로 그가 서 있었다.
하무백!
진정한 천하제일인!
그녀의 심장이 더욱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하무백이 그런 그녀의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당황스러웠다.
하무백조차도 처음 보는 반응.
그녀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팔찌가 없군.'
내공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기에 기억에 있던 생도다.
늘 차고 있던 팔찌가 사라지고 없다.
대신 단전에는 내공이 가득했다.
마교와의 전쟁에서 사해련이 전리품으로 챙겨간 기물 하나가 떠올랐다.
'칠채봉환이었어.'
착용자의 내공을 완벽하게 금제하는 기물.
그랬으니 자신이 그녀의 내공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 생도의 경지가 초절정에 들었을 리는 없을 테니.
"저, 저, 저······."
하무백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공야휘연은 우물쭈물,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하무백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마, 마, 만나고 싶었어요!!"
커다란 소리로 악을 쓰듯 외치는 공야휘연.
그녀의 말에 하무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기막으로 소리를 차단하였기에 아무도 듣지는 못했겠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무백은 멍한 얼굴로, 황당하다는 듯 눈앞의 생도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