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소림이 왔다?
낮이 긴 만큼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 날이다.
그러나 무창의 사람들은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답답하고 누군가가 감시하는 듯한 느낌.
무창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소림승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 가지 안법을 운용하면서 무창의 사람들을 샅샅이 살폈다.
소림사 장경각에 비치된 칠십이종절예.
그중 한 가지다.
반야보리심안(般苦寶理心眼).
부처의 대자대비한 안력으로 사이한 것들을 찾아내는 안법이다.
사이한 것들이란 마공, 혈공, 사공을 이르는바.
어느 순간부터 소림의 무승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할 안법으로 자리 잡았다.
해서, 오늘 무창에 들어온 소림승들 모두 이것을 익히고 있었다.
반야보리심안을 운영한 채로 무창을 샅샅이 훑어 내는 이들.
뒷골목의 파락호나 시정잡배들에게서 사공의 흔적이 조금씩은 느껴졌다.
다만 그 양이 미미하여 무시하는 것뿐.
그런 이들까지 모조리 징치하다가는 강호에 남아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소림도 알았다.
그렇게 온종일 무창을 살피고 다림다루로 돌아온 이들은 서로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목표로 한 이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흐음······."
연진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럴 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정보는 믿을 만했으며, 그 정보에 따르면 분명 사파의 악적이 무창에 있어야 했다.
그 정도의 사공이라면 반야보리심안을 벗어날 수 없을 터인데······.
"사숙. 혹시 교룡관주가······."
소림승 중 하나가 의심의 눈빛을 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 그들은 교룡관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니까.
몇몇이 그 의견에 동조하는 듯했다.
허나 연진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하지다. 교룡관의 하투제가 열리는 날이지. 팽 관주는 아마도 하투제를 치르는 곳에 있을 터. 특별히 악적을 숨겨주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 악적이 눈치를 채고 깊숙한 곳에 숨은 것은 아닐까요? 빈민가 같은 곳은 아직 제대로 살피지 못하셨으니까요."
다루의 루주인 공지덕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일 한 번 더 제대로 살펴보세나."
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시각.
해평소는 무창 밖의 작은 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무창에서 무려 반나절 거리다.
이곳까지 물러난 이후에야 그의 육감이 경고를 멈춘 탓이다.
"쯧. 대체 무창에 무슨 일이 있기에······."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 리는 해평소.
멀리 노을 지는 무창의 모습이 아스라이 보인다.
특별히 무창에 무슨 사달이 벌어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이곳에서 노숙할 처지가 갑갑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육감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혁낭을 뒤져 건량을 꺼낸 그는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사흘 정도인가?"
가지고 있는 건량과 물의 양을 가늠한 그가 중얼거렸다.
만약을 대비해 준비한 것들이 모두 떨어지면 근처 마을을 찾아 보급 후 다시 돌아와야 한다.
하무백을 아직 만나지 못했으니.
어느새 무창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벽력개는 눈앞의 다루를 바라보았다.
다림다루.
소림의 속가제자가 운영하는 곳임은 알고 있었다.
개방이 천하 곳곳에 거지들을 보내 놓듯.
소림도 천하 곳곳에 속가 제자들을 보내 놓았다.
개방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이 다를 뿐.
무창에서 소림의 속가와 관련된 곳은 다림다루 하나가 전부였다.
이미 소림승들이 무창을 헤집고 다니는 것에 대해 보고는 받은바.
어찌할지 고민이 역력한 눈이다.
개방의 정보가 중간에서 샌 것이 분명한데······.
대체 어디에서 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본타로 보고를 올렸을 뿐인데.
벽력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실상은 정보가 샌 적이 없음을.
호북연가의 수작으로 산서성의 한 분타에서 소림 속가를 통해 정보가 흘러 들어갔음을 그가 어찌 알까.
거적을 깔아놓고 다림다루를 바라보며 술을 들이켜는 벽력개.
"허허. 다루에 구멍이 뚫리겠습니다. 아미타불."
연진이 다루 밖으로 나와 벽력개를 향해 합장했다.
그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벽력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녀석도 많이 늙었구나. 연진."
"어르신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셔서 다행입니다."
개방의 본타가 있는 개봉이나, 소림사가 있는 등봉현이나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자연스레 오며 가며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벽력개 정도의 명숙이면 더더욱.
"현광. 그 땡중이 보낸 거냐?"
"네. 방장 사숙의 명이었습니다."
벽력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허허. 그저 속가제자들을 돌아볼 뿐이지요."
"그래서 무창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게냐? 속가 제자가 아주 많은가 보구나?"
"아미타불."
조용히 불호를 외우는 연진.
"내가 무창에 있는데도 미덥지 않다는 게로구나?"
"어찌 벽력개 어르신이 계신데 그런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그저 소림은 소림의 일을 할 뿐이지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연진.
벽력개는 저 뻔뻔한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무슨 일을 한다는거지?"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무리들에게 부처의 자비를 내려야지요. 아미타불."
저놈의 아미타불.
저 염불을 욀 때마다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었다.
끝까지 모르쇠다.
개방의 정보를 중간에 얻어서 무창에 왔음을 알고 있음에도.
"알았다."
증거도 명분도 없었다.
그랬기에 벽력개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우뚝 멈춰 선 벽력개.
"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떠나거라. 보아하니 아무것도 못 찾은 것 같은데. 괜히 뭉개고 무창을 뒤적거리다가 그 녀석이랑 부딪히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져."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녀석.
누구를 말함인지 연진은 잘 알았다.
아마도 오늘은 무창에 없을 괴물.
"아미타불."
그저 나직이 불호를 읊조릴 뿐이다.
***
목란산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맹룡대가 우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한 번.
와룡대 일 조와 이십 조의 내기 결과에 두 번.
소란스러울 만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각자가 경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투제를 끝냈으니, 이제 복귀만 남았다.
복귀 후 바로 휴관기의 시작이다.
교룡관의 전반기가 끝난 것이다.
문제는.
와룡대 일 조와 이십 조, 그리고 맹용대 구 조의 추휘연이다.
이들은 목란산에서 밤새 움직였다.
실상은 와룡대 일 조만 밤새 움직였고, 이십 조와 추휘연은 나름 휴식을 취했지만.
어쨌든 오늘 새벽에야 결판이 났기에 이들은 바로 움직이긴 무리가 있었다.
결국 하루 정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들과 함께 남은 이는.
"어,그러니까 내일 간다고요?"
당진산이 물었다.
"너희는 먼저 가려면 가고. 한 교관이랑 함께."
하무백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가 자원해서 남은 이들을 챙기기로 한 탓이다.
하무백이 그와 같은 의사를 전했을 때, 팽도율은 알겠다는 듯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사해련에서 온 손님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그런다고 지레짐작한 것.
반쯤 맞았다.
사해련과의 관련성까지는.
다만, 팽도율도 추휘연은 몰랐다.
"저도 내일 갈 건데요? 이제 좀 쉬엄쉬엄 가야지요."
한설빙의 말에 맹용대 칠 조의 복귀일도 자연스레 정해졌다.
그사이 다른 이들은 정리가 끝났는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두가 떠나고 차례대로 행렬을 지어 무창을 향해 떠났다.
팽도율은 가장 마지막이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낙오하는 이를 챙기기 위함이다.
하늘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팽도율을 향해 날아내렸다.
까마귀의 발목에 전서가 달려 있었다.
품에서 육포를 꺼내 까마귀에게 주고는 전서를 펼쳐보는 팽도율.
이내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바로 하무백과 한설빙을 찾았다.
"무슨 일이오?"
떠나려는 이들과 떨어져 있던 하무백이 갑자기 다가오는 팽도율을 향해 물었다.
"손님이 더 있구만."
하무백도 인상을 찡그렸다.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소림에서 무창에 들렀다고 하니, 나는 좀 서둘러 가봐야겠어. 한 교관이 후미를 좀 맡아 주겠는가?"
한설빙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쉬지를 못하네요."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남아 있던 말 한 마리의 등에 올랐다.
그녀의 시선이 맹용대 칠 조와 이십 조에게로 향했다.
"너희는?"
"내일 갈게요."
당진산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설빙.
"그럼 부탁 좀 하겠네."
팽도율은 그 말을 남기고는 말의 허리를 박찼다.
히이이잉!
울음소리를 토한 말이 빠르게 땅을 치달렸다.
그렇게 모두가 떠났다.
"오늘 하루는 편하게 쉬고, 내일 새벽에 떠난다."
하무백은 그 말을 남기고 적당한 나무 그늘로 향했다.
이들이 머물 천막은 남아 있었다.
내일 정리해서 직접 챙겨가야 할 짐이었지만.
'소림이 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무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현광 땡중이 아는 날에는 귀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로 소림이 왔다.
무얼 알고 온 것일까?
사해련의 손님 때문일까? 아니면 저 골치 아픈 철없는 아가씨 때문일까?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사해련의 손님은 왜 자신을 찾았을까?
하무백은 사파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그가 증오하는 존재는 마교와 혈교였지, 사파는 아니었다.
경험 때문이다.
열 살.
하설란이 고작 육 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나.
나고 자란 마을이 사라졌다.
혈교와 마교에 의해.
제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열 살 아이는 생후 육 개월의 동생까지 책임진 채로 그렇게 세상에 내던져졌다.
사부를 만났던 것이 열세 살 때.
대략 삼 년의 세월을 동생을 품에 안고 천하를 떠돌았다.
혈교와 마교가 발호하여 천하는 전쟁통이었다.
그런 혼란기에 열 살 아이가, 갓난쟁이까지 데리고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
좋은 인연을 만났고, 나쁜 인연도 만났다.
그렇게 하루하루 악착같이 노력해서 다음 날을, 또 다음 날을 맞았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정파의 무인은 자신과 설란을 팔아넘기려고 했다.
그런 하무백을 구해준 것이 우습게도 사파의 무인이었다.
허나 그 무인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죽었다.
다른 사파 무인의 손에.
그리고 다시 위기에 처한 하무백과 하설란을 구해준 것은 정파의 무인이었다.
사부를 만나기 전까지.
많은 이들을 겪었다.
그렇게 하무백이 겪은 이들은 정파도 없었고, 사파도 없었다.
그냥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정파라고 정의롭지도, 사파라고 악하지도 않았다.
그저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웠고, 악한 사람은 악했다.
그랬기에 하무백은 사파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자신의 경험이 그러했기에.
하무백이 존재만으로 증오하는 이들은 오직 혈교와 마교뿐.
그랬기에 지난 전쟁 중에도 사해련과 딱히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사해련에서도 하무백 자신이 그들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에게 사람을 보냈겠지.
보낸 이유는 아마도.
'도움을 청하려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굳이 사해련이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사해련에서 하무백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라고는.
하무백이 고개를 젖혀 힐끗 홀로 천막에 있는 이를 쳐다보았다.
'저 녀석 때문.'
결국 돌고 돌아 원인은 후자다.
저 골치 아픈 철없는 아가씨.
사해련의 힘만으로는 찾기가 어려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소림이 그 움직임을 눈치챈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소림에서 무창을 찾을 일이 없으니.
팽도율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저리 급히 무창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바람 잘 날이 없군.'
왈칵짜증이 났다.
짜증은 짜증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이제는 정말로 좀 쉬고 싶었다.
그냥 맹용대 녀석들이나 굴리면서 쉬려고 했는데.
그러니 일단은 소림 땡중들이 조용히 떠나도록.
하무백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야휘연을 찾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그녀 홀로 있는 천막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하무백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막을 둘렀다.
공야휘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하투제에서 자신의 성과를 칭찬이라도 해주려나 하는 기대가 가득한 눈.
"칠채봉환은?"
그러나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 낸 감정 없는 목소리.
"어, 어. 그러니까··· 여기요."
그녀는 싸놓은 등짐에서 한 쌍의 팔찌를 꺼냈다.
칙칙한 빛의 팔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싸구려로 보이는 모습.
"차라."
"네?"
"내공을 금제하라고."
하무백의 말에 그녀는 즉시 칠채봉환을 양 손목에 찼다.
순간.
은은한 일곱 빛깔로 아름답게 물드는 칠채봉환.
착용자의 내공을 흡수하여 저런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대가는 내공의 금제.
"그런데 왜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