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281화 (281/312)

281화. 사파의 여인이라···

해가 졌다.

오늘도 노숙이다.

그나마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시기이기에 추적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밤에는 흔적을 찾는 것이 어려운 법.

소림승들은 노숙 준비를 했다.

가부좌를 틀고 불호를 외고 있는 연진을 찾아온 제자가 있었다.

항산.

머리 회전이 빠르고 기민한 녀석이었다.

"사숙."

연진의 앞에서 조심스레 입을 여는 항산.

두 눈을 뜬 연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간 추적을 하면서 얻은 정보를 반추하다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연진이 두 눈을 빛냈다.

이 녀석이 굳이 자신을 이리 찾을 정도면 중요한 사실일 터.

"말해 보거라."

"저희가 지금 추적하는 이는 본산에서 명을 받은 그 적도가 아닐 겁니다."

연진이 항산을 바라보았다.

"본산에서는 무창에 숨어든 사파의 무인을 찾으라 했습니다. 저희는 이틀간 무창 곳곳을 수색했고요."

그때도 수색을 마치고 다림다루로 귀환하는 길이었다.

"헌데 사숙께서 외부에서 막 무창으로 들어온 교룡관 생도들에게서 사기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사기의 흔적은 화살을 맞은 이들에게만 있었고요. 저희 중 그 누구도 보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기운을요. 교룡관 내부에 이미 사파가 있었다는 뜻이니 저희가 찾던 이와는 다른 자이겠지요."

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사파의 적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 자는 생도로 잠입해서 하투제에 참가했습니다."

연진이 이곳까지 오는 과정을 모두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만약 적도가 화살에 기운을 실을 수 있는 경지의 사공을 익힌 상태라면 교룡관에서 몰라봤을 리가 없습니다. 그 정도 경지의 사공이라면 굳이 반야보리심안을 사용할 필요도 없지요."

맞는 말이다.

"헌데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지요. 그렇다면 사공이 경지가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진은 담담히 항산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화살에 사기가 담겼다면, 그 화살을 쏜 병기. 활에 사기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요."

두 눈을 빛내는 연진.

사기가 깃든 병기.

보통 병기가 아니다.

게다가 사기가 깃든 활은 무척이나 희귀하다.

그 자체로 사파에서는 신병으로 유명할 터.

정파에도 그 위명이 전해져 있을 정도.

"알려진 바로는 사기가 깃들 정도의 활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활 자체가 강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병기가 아닙니다."

그랬다.

활은 군문에서 중히 사용하는 병기이나, 강호의 무림인들이 선호하는 병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파에서 유명한 활이 하나 있었다.

사파인들이 사도십병이라 부르는 열 가지 병기 중 하나.

"사일자뢰궁."

연진 역시 알고 있는 활이다.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명성은 들었다.

사파무림에서 가장 강한 열 개의 신병 중 하나였으니.

"제 생각 역시 그렇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항산은 입을 다물었다.

연진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기 때문이다.

항산도 알고, 연진도 아는 사일자뢰궁의 주인.

사해련주 공야장천.

"사일자뢰궁이 교룡관에 나타난 것이라면, 그 여시주는 분명 공야장천과 가까운 관계일 터."

연진이 중얼거렸다.

당연한 생각이다.

사일자뢰궁이라는 신병을 아무에게나 내주진 않을 것이니.

"제자이거나 혈족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더냐?"

연진의 물음에 항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공야장천의 제자나 혈족이 무공의 경지가 낮을 수 있을까? 그가 사일자뢰궁까지 맡길 정도의 인물이?"

연진이 항산의 추리에서 모순점을 짚어냈다.

"······."

항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연진의 지적은 타당했다.

교룡관에서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사파 무공의 경지가 낮은 이가 공야장천과 관계가 있고 사일자뢰궁을 지니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제자가 식견에 부족하여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혹여나 사기를 금제하여 숨기는 그런 기물이 있지 않을까요?"

연진이 두 눈을 부릅떴다.

왜 없겠는가.

당장 소림사만 하더라도······.

일단 연진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해련에 그런 기물이 있었던지 기억을 더듬으니.

있었다.

"칠채봉환······."

"네?"

"지난 전쟁에서 사해련이 마교에게서 전리품으로 챙긴 기물이다. 내공을 금제하지."

"아······."

항산의 추리에 빈 곳이 맞아 들어갔다.

이제 일이 커졌다.

교룡관주를 만났다는 사파의 무인을 잡으러 왔건만.

사해련주가 엮여 들었다.

"아무래도 방장 사숙에게 알려야겠구나."

전서응이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급한 연락을 대비해 한 마리 데리고 온 녀석이 이렇게 날아갔다.

***

하무백이 목란산에 다시 도착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온 것이다.

깊은 밤.

아무도 없었다.

이제 여기부터 다시 찾아 나가야 했다.

소림사 땡중들과 철없는 사파의 여인네를.

'사파의 여인이라······.'

열두 살 때.

굶고 있던 자신과 설란을 데려다 먹을 것을 주고, 얼마간 지낼 돈을 챙겨준 사파의 여인이 떠올랐다.

무척이나 급박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그때.

하무백이 동네 거지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던 것을 도와주었고.

하무백, 하설란과 잠시 동행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금세 떠나면 그 거지들에게 보복을 당할까 걱정한 것이다.

적어도 다른 마을까지는 데려다주어야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딸이 설란 또래였다 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데리고 가고 싶은 심정이 굴뚝이었으나, 자신은 이제 전쟁터로 가야 하기에 그럴 수가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던 그 무인.

딸을 가진 여인이 딸을 두고 전쟁터로 나가야 할 정도로 당시 전쟁은 치열했다.

빌어먹을 마교와 혈교 새끼들.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기억할 뿐.

'정말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강했을 것 같았지.'

지금 기억 속 그녀의 모습을 재구성해보면.

상당한 경지의 고수였으리라 생각되었다.

최소 절정은 넘어섰을 것이다.

사부를 만날 때까지 도움을 주었던 모든 이들이 하무백에게는 은인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동생 설란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준 은인.

그래서일 것이다.

철없는 그녀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직접 은혜를 갚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렇게라도 되돌려 준다는 생각.

하무백은 기감을 넓게 퍼뜨리며 땅을 박찼다.

마지막으로 공야휘연이 움직였던 방향이다.

***

목란산 인근에서 숭산 소림사까지는 직선으로 이천 리 길.

상당히 먼 길이다.

허나, 전서응에게는 여섯 시진 정도 날아가면 될 거리였다.

그렇게 오전 무렵.

소림 방장 현광은 연진이 보낸 전서를 받아들 수 있었다.

찬찬히 그 내용을 읽는 현광.

끝까지 읽은 후 두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허허. 공야장천이라니······."

그조차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다.

아니, 애초에 정보를 흘린 연자경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리고 연자경은 여전히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꾸민 일이 어디까지 여파가 미칠지를.

"어찌한다······."

염주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긴 현광.

전서에는 연진이 만났던 하무백의 인상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벽력개와의 만남에 대한 보고도 있었고.

"그 괴물은 항시 그랬지."

지난 전쟁에서 만났던 하무백을 떠올리는 현광.

그놈은 정파의 무인을 볼 때나, 사파의 무인을 볼 때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똑같은 눈빛이었다.

마교나 혈교와 싸울 때면 눈깔이 뒤집히는 놈이 말이다.

그놈에게는 정파나 사파나 똑같다는 의미다.

그놈이 비협조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이미 연진이 쫓는 공야장천의 지인과 접점이 있었다는 것.

혹시라도 하무백이 방해하려 든다면 연진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소림의 눈치를 본다고 물러갈 인간도 아니고.

그러나 하무백이 개입했다고 포기하기에는.

그 과실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사해련주 공야장천의 지인이라니.

물론 죽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정사대전이다.

이 상황에서 전쟁은 현광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생포해서 구속한다면?

소림에 그 자를 잡아둔다면?

사해련에 훌륭한 재갈을 물릴 수 있는 거다.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탐스러운 보상 아닌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현광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는 잘 알았다.

결국 지금 고민하는 수단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앉아 있는 것은.

그 후폭풍을 걱정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염주알이 현광의 손에서 계속해서 움직였다.

***

"사부님. 제자가 이런 것을 찾았습니다."

마교 교주의 제자 중 하나.

사마후도가 조심스레 철문 앞에 비급을 내려놓았다.

낡디낡은 비급.

쓰인 글자도 대부분 지워졌으나.

〈허무진천결〉이라는 제목은 알아볼 수 있었다.

철문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허나 사부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마후도는 조심스레 물러갔다.

폐관 중인 사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았으니까.

사마후도가 물러나고 하루가 지난 후.

끼이이익.

철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사마후도가 놓고 간 비급이 두둥실 떠올라 그 틈으로 들어갔다.

비급을 쥔 이는 제목을 보고 피식 웃었다.

허무진천결이라.

이름은 그럴듯했다.

허나 사마후도는 허무의 조각을 찾는 데 투입된 제자가 아니었다.

다섯 조각 중 세 조각을 찾았고, 한 조각은 무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조각을 찾고, 무창에 있는 한 조각을 되찾아오면 완성된다.

무창의 한 조각이 참으로 개 같은 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골치 아팠지만.

그랬기에 허무진천결이라는 명칭을 보고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책장을 넘겼다.

사마후도.

자신의 제자들 중 제법 뛰어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것을 가지고 오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책장을 넘기게 한 것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 말도 안되는······.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졌다고 했다.

오백 년 전에.

그런데.

그의 손에 들린 허무진천결은.

이미 되찾은 조각 중 하나와 동일한 조각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다섯 개로 나누어진 게 아니었단 말인가.

혼란이 찾아왔다.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까지 가진 조각이 네 개.

그중 두 개가 중복된다.

결국 조각은 여전히 세 개다.

헌데 사마후도가 찾아온 조각이 이상했다.

분명 허무의 한 조각이 맞는데.

"쓰레기가 되었군."

자신은 다른 조각들을 손에 넣었기에 이것이 허무의 조각인 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얼토당토않은 허접한 쓰레기 무공이라 평했을 터.

이미 갖고 있던 다른 세 조각은 그렇지 않았다.

조각 하나 그 자체로도 이미 훌륭한 무공이었다.

단목세가의 가전 무공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조각 또한 그러하지 않았던가.

"대체······."

이건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폐관수련실 밖을 지키고 있는 수하에게 명해 사마후도를 불러들였다.

"사부님. 제자 사마후도입니다."

"이건 어디에서 손에 넣었더냐?"

본론부터 꺼낸다.

"사천의 한 고서점이었습니다."

"이걸 왜 가지고 온 것이냐?"

사부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사마후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우연히 손이 가서 펼쳐본 책입니다만. 고서점에 있을 만한 평범한 책이었습니다. 허무진천결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정말 쓰잘데없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가지고 왔다?"

"네. 이상하게 끌렸습니다. 제가 익힌 무공이 반응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지고 왔습니다."

"······."

사부에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것이다.

사마후도의 무공에 반응했다라.

그가 익힌 무공이······.

수라뇌령귀원심법(修羅雷靈歸元心法).

마교팔대심공 중 사마후도에게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여 전수한 심법이었다.

'수라뇌령귀원심법이 허무의 조각과 통하는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런 가설이 떠올랐다.

확인을 해봐야 했다.

가진 조각 중 허무진천결과 같은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중 일부만 옮겨 적었다.

전체의 삼할 정도.

이것으로는 어떤 무공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들 터.

"보아라."

끼이이익.

철문이 살짝 열리며 필사한 종이가 사마후도 앞에 두둥실 날아들었다.

사마후도는 사부의 명대로 그것을 보았다.

"제자가 우둔하여 천하 절세의 신공을 눈앞에 두고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사마후도.

"그것이 전부냐?"

"다만······."

"다만?"

"허무진천결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내공이 은은히 떨리며 반응을 보입니다."

"알았다. 놓고 물러가거라."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사마후도.

제자를 내보낸 후.

현 마교 교주, 석천경은 고민에 휩싸였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허무의 조각에 반응하는 무공이 신교에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했다.

허무에 대해 아는 이는 교주와 그 후계자.

그들은 수라뇌령귀원심법을 익히지 않으니까.

그들이 익히는 무공은 마교 최강의 무공인 천마신공이었으니까.

"일단 좀 살펴봐야겠어."

석천경은 수라뇌령귀원심법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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