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283화 (283/312)

283화. 아실 텐데요

형산의 깎아지른 듯한 단애 위의 작은 모옥.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낼 정도로 작은 곳이다.

모옥의 앞에는 살벌한 필체로 징벌동(懲罰洞)이라 쓰인 팻말이 꽂혀 있었다.

문인백송이 그 모옥에 올라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군사께서 누추한 이곳에는 어인 일이신지요?"

아름다운 중년 미부가 문인백송을 향해 물었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고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문인백송은 그 고아함 뒤에 숨어 있는 초조함을 알아보았다.

"아실 텐데요."

그랬기에 이리 말했다.

그 말에 중년 미부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불민한 딸아이 때문에 군사께서 고생이 심하시다 들었습니다."

징벌동이라고는 하나 매일 오가는 시비는 있었다. 그 시비를 통해 사해련의 소식들을 전해 듣고 있었다.

"어머니이신 부인의 심사만 할까요."

문인백송은 담담히 답했다.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것이다.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겠지.

당연한 일이다.

딸이 소림승들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련주께 허락받아왔습니다."

문인백송의 말에 중년 미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부인께 내려진 금령을 풀어주시기로 하였습니다."

문인백송의 말은 담담했으나, 그 말을 듣는 중년 미부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아아······."

그녀의 목소리도 떨렸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으셨을 테지요."

문인백송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찌 아니 그럴까.

딸아이, 공야휘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그곳으로 달려, 아니 날아가고 싶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그 마음을 어떻게든 애써 억눌러야 했다.

죄인이었기에.

사해련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금령에 묶여 있었으니까.

그때.

개인적인 사정으로 걸음을 지체하지만 않았더라도.

사해련은 혈교에게 그런 타격은 받지 않았을 터였다.

명백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처벌은 징벌동으로의 구금이었다.

금령(禁令).

전쟁 중이었음에도.

전력을 낭비하는 과한 처벌이었다.

당시 사해련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뒤늦게나마 도착한 그녀 덕에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런 처벌을 받은 이유는 하나였다.

공야정문.

사해련주 공야장천의 아들이자, 그녀의 남편이 강력하게 엄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묵난화(墨關花) 관천사화궁(貫天邪花弓) 우문가율은 그렇게 사라졌다.

당시 강호육화 중 일인이자, 사파제일궁이 한 번의 실수로 강호에서 잊혀진 것이다.

헌데, 그 금령이 풀린다니.

"련주께서도 당장에라도 뛰쳐나가시려 했습니다. 말리느라 혼났지요. 현재 련에는 흔적 없이 정파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고수가 없습니다."

현 공야휘연의 상황에서 아무나 보낼 수는 없었다.

충분한 경지의 고수를 보내야 했는데.

문제는 그런 경지의 고수라면 정천맹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고수들의 움직임은 모두 주시하고 있을 터이니.

사해련의 호법이나 장로 정도 되는 이들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런 이들이 이유 없이 정파의 영역에 들어간다면.

무슨 일인가 하고 정천맹의 관심만 끌 뿐이다.

해서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다.

현재 사해련에 연금되다시피 한 그녀 말고는.

그녀가 사라진 지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자연스레 정파에서도 잊혀진 상태.

거기에 그녀는 경공과 은신 역시 뛰어났다.

당시 사해련에서 손에 꼽힐 정도였다.

결국 그녀가 적임자였다.

문인백송은 그런 논리로 공야장천을 설득했다.

허나.

그녀는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상공은··· 무어라 하던가요?"

조심스러운 물음이다.

그 물음에 문인백송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 결정에 대해 아직 알리지 않았으니까.

문인백송의 반응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우문가율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인백송은 답답했다.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정말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쫌생이 자식. 못난 새끼. 남자도 아닌 멍청한 놈.'

뿌드득.

이가 갈렸다.

이 사달의 원인인 공야정문.

그를 향해 온갖 욕을 다 쏟아붓는 문인백송이었다.

우문가율의 처벌에 대해 가장 강경하게 발언한 이가 남편인 공야정문이다.

그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부인을 향한 열등감과 질투의 결과였다.

당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무력대를 지휘하던 것이 공야정문이었으니까.

우문가율의 합류가 늦어졌다지만, 그가 적의 함정에 이끌려 들어간 탓도 있었다.

겨우겨우 그 함정에서 벗어나 남은 인원이라도 수습한 것이 뒤늦게 도착한 우문가율이었다.

그 모든 상황이 공야정문의 열등감을 폭발시킨 것이다.

자신을 향한 남편의 열등감과 질투, 분노에 큰 충격을 받았던 그녀는.

사해련에서 결정된 처벌에 아무런 말도 없이 이곳 징벌동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 작은 모옥 따위야 그녀의 실력으로는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

사실 그녀가 벗어난다고 막을 사람도 없었다.

공야장천 역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몇 번이나 이곳에 찾아와 금령을 풀어줄 터이니 그냥 내려오라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곳에 자의로 갇혀 있었다.

금령을 풀어주는 것을 거부한 채로.

우문가율의 스스로에 대한 속박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속박하게끔 만든 사람.

공야정문.

금령이 풀렸다는 말에 우문가율이 놀란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금령이 풀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부인 공야장천이 금령을 풀 수 있음에도 그녀가 거부했기에, 그것을 존중해 풀지 않았던 것이니.

그런데 금령이 풀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남편은 여전히 자신을 경원시하고 있지만.

어쨌든 딸에게 달려갈 명분이 만들어졌으니까.

"부인. 일시적인 금령의 중단이라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문인백송이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우문가율은 깜짝 놀랐다.

사해련 군사의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이다.

"부디 련주의 손녀분을··· 제 제자 같은 아이를··· 부인의 따님을 구해주십시오······."

우문가율의 얼굴이 잘게 떨렸다.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마지막 망설임을. 문인백송이 없애 주었다.

앞으로 한 발 내딛을까 말까 고민하는 그녀의 등을 문인백송이 떠밀어 주었다.

사해련 군사가 무릎까지 꿇지 않았는가.

"그 아이는 어디에 있나요?"

결정을 내린 것일까?

우문가율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목란산 인근이 마지막 소식입니다."

그리고는 차근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우문가율이 몸을 일으켰다.

"아, 사일자뢰궁은 그 아이가 가지고 나가서······."

문인백송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죄인은 병기를 가리지 않지요."

문인백송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

소림승들은 작은 마을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도 탐문을 이어갔지만 소득은 없었다.

흔적도 거의 끊겨 가고 있었다.

분명 이 마을에 들어온 흔적은 있었지만.

"아미타불. 어렵구나, 어려워."

연진은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협조적이었다.

당연했다.

유명한 소림사의 스님들이었으니, 이 작은 마을에서는 쉬이 만날 수 없는 고명한 분들 아니던가.

어떻게든 아는 모든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소득은 없었다.

"후우."

연진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이 마을에서 묵어가기로 했다.

일단 제자들에게는 쉬라 명하고 연진은 마을을 둘러보러 움직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다.

항산 역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똑똑한 년이었다.

덕분에 흔적을 찾는 것이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이다음은 어찌 또 흔적을 찾을지 걱정이 앞섰다.

"저, 항산 사숙."

각자 자리를 잡고 쉬고 있는 와중에.

잡일을 위해 데리고 온 삼대제자 묘진이 궁금한 게 가득한 얼굴로 항산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

"그, 사일자뢰궁이 그렇게 대단한 신병인가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물음. 추적 와중에 제자들 사이에 그 이름이 전해진 모양이다.

사질의 물음에 항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서 저런 호기심이라니.

"아, 그래. 그게 대체 어떤 병기인 거야?"

마침 근처에서 쉬던 사형 항오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사실 사일자뢰궁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항산이 이상한 것이다.

그도 무림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

이제는 잊혀진 병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십여 년전.

사일자뢰궁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여고수가 사라지면서 그것은 사해련주의 손으로 들어갔으니까.

사형까지 물어보니 항산은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파제일궁의 독문병기였습니다. 사파십병의 하나고요."

주변에 있는 소림승들의 두 눈이 빛났다.

불문에 귀의한 승려들이라고는 하나, 젊은 남자들이자 무림인들이다.

강호의 전설에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보여주는 모습이 달라지는 활이라 들었습니다. 병기 자체가 지닌 사기 역시 다루기 힘들고요. 해서 아무나 다룰 수 없는 활인데··· 관천사화궁 우문가율. 그녀는 자유자재로 다뤘다고 합니다. 그녀의 궁술과 사일자뢰궁이 합쳐지면 능히 일기당백, 아니 일기당천이었다고 하더군요."

길고 긴 설명.

누구 하나 흥미를 잃지 않았다.

"혈교와의 전쟁 초반에 그녀 혼자 능히 하나의 무력 부대와 같은 위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나는 처음 듣는 사람인데?"

항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했다.

잊혀진 사람이니까.

그녀가 사라진 지 십삼 년, 아니 이제 십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서히 기억에서 잊혀질 시간이다.

특히나 자신과 같은 항렬의 무인들에게서는.

자신 역시 장경각의 역사서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름이다.

그런 고루한 책에 누가 관심을 보이겠는가.

"사해련에서 지웠으니까요. 커다란 죄를 지었고, 그 죄에 따라 사라졌습니다."

그런 인물들이 몇 있었다.

'당장 우리 소림에도······.'

거기까지 떠올린 항산은 생각을 멈췄다.

그 부분은 떠올리는 것조차 금기였으니.

아니, 자신과 같은 항렬이거나 아래 항렬의 제자 대다수는 아예 모르리라.

장경각의 무림역사서를 몽땅 찾아서 읽은 자신이기에 알게 된 거지.

"어쨌든 그 때문에 십삼사 년 전부터 사일자뢰궁의 주인은 사해련주였습니다. 지금 그게 세상에 나온 걸로 추측이 되고요."

항산은 그렇게 설명을 마무리했다.

젊은 소림승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졌다.

승려라고는 하나 무림 전설의 무기에 얽힌 사연이었기에.

"모두 이쪽으로 오거라!"

그때.

연진의 사자후가 들렸다.

쉬고 있던 소림승들은 황급히 움직였다.

순식간에 움직여 모인 곳은 마을 외곽의 우물이었다.

말라서 뚜껑까지 덮어 폐쇄한 우물.

연진이 그곳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잠깐. 모두 멈춰라."

우물에서 오 장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연진이 다급히 말했다.

그대로 멈춰선 소림승들.

"사숙. 무슨 일이십니까?"

항산이 나서서 물었다.

"이곳에서 사기가 보인다."

연진은 현재 반야보리심안을 운용 중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말라버린 우물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사기가 보인 것이다.

그 말에 소림승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우물을 바라보았다.

저 우물 속에 누군가가 숨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아마도 자신들이 추적해온 그 악적일 가능성이 컸다.

"항오. 주변을 살펴라."

연진의 명.

항오는 즉각 우물 주변을 살폈다.

혹여라도 악적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말라붙어 버린 우물.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잘 오지 않을 것이다.

우물 주변으로 사람의 흔적도 별로 없었다.

연진의 발자국과 몇몇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

그리고.

"아무래도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여인의 발자국이 보였다.

내공이 없는 이의 평범한 발자국.

허나 자신들이 쫓아온 바로 그 발자국이다.

항오는 연진을 향해 말했다.

"이곳에 왔었습니다."

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물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항오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을 떠난 흔적 또한 있습니다."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술책일 가능성은?"

연진이 물었다.

항오는 확신하지 못했다.

"알 수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연진.

그의 손짓에 우물 주변으로 다가온 소림승들이 둥글게 에워쌌다.

"열어라."

연진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내공을 끌어올리며 명했다.

항자배의 소림승 둘이 조심스레 물의 뚜껑을 향해 다가갔다.

"그만. 거기까지. 멈춰."

그때 허공에서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

하무백이 허공을 밟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

우물 바로 곁에 내려선 하무백은 그렇게 스스로 소림승들의 포위 한가운데 자리했다.

"아미타불. 하 시주. 여긴 갑자기 어인 일입니까?"

하무백이 싱긋 웃었다.

"나도 여기 이 우물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 시주······."

"왜 그러지?"

하무백이 연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없다.'

다행이었다.

이곳에서 주변으로 기감을 펼쳐 살펴본바, 공야휘연은 없었다.

우물 속에는 물건 하나가 있을 뿐이다.

하무백이 기감으로 느꼈던 기척이 바로 그것이었다.

혹시라도 그 물건과 함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서둘러 왔는데.

그녀는 없었다.

예상대로 똑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희의 일을 방해하시는 모습이, 사파를 돕는 일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의 음성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하무백이 그 말에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콰직!

그대로 우물의 뚜껑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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