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가지고 가거라
깎아지른 단애를 우아하게 날아내리는 인영이 있었다.
우문가율이였다.
그녀는 단애 벽을 가볍게 차면서 천천히 가볍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아래에 도착한 후 한 곳을 바라보았다.
사해련의 본련이 있는 곳.
웅장한 건물이다.
험준한 형산의 중턱에 저런 넓은 공간이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저런 험준한 곳에 저런 거대한 성채를 지은 것도 대단한 일이다.
허나.
지금 그녀가 갈 곳은 저기가 아니었다.
'호북성 목란산.'
딸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곳이다.
그곳으로 가야 했다.
형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향해 땅을 박차려는 찰나.
"그냥 그렇게 가려는 게냐?"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
우문가율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돌아섰다.
그곳에는 안타까운 눈으로 우문가율을 바라보는 공야장천이 있었다.
"아버님을 뵙습니다."
우문가율은 예를 다해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할 말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못난 아들놈 때문에 저 착한 아이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음이니.
우문가율은 그저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공야정문 그는 우문가율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지아비였으니까.
단지.
그날의 그 참상에서 회피할 핑계가,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우문가율은 그리 생각했다.
다만 그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지만.
"상공은 아직도······."
우문가율의 말에 공야장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전히 폐관수련실에서 살고 있다."
며칠에 한 번 밖으로 나올 뿐인 공야정문.
딸이 가출했다는 소식에도 그는 묵묵히 수련에 매진했다.
그가 쫓고 있는 것은.
그날 자신의 반려가 보여준 그 모습.
그것을 능가하기 전에는 도무지 폐관수련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반려 우문가율 역시 더 강해지고 있음은 생각지 못한 채.
"하면 연아의 일은 알고 있는 건가요?"
"소식을 듣기는 했을 거다. 이제 내가 찾아가 볼 요량이다."
폐관수련실의 문을 부술듯한 기운을 흘리며 공야장천이 답했다.
"상공이 나오기 전에 반드시 연아를 데려오겠습니다."
우문가율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공야장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가거라."
그러면서 내미는 것.
둥글게 휘어져 있는 나무였다.
우문가율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동방에서 전해진 각궁이다. 비고에 있던 것을 챙겨왔다. 사일자뢰궁만은 못 하겠지만 이것 역시 훌륭한 활이지."
우문가율은 공야장천이 전해준 활을 받아 들었다.
둥글게 말린 한쪽에, 함께 건네받은 시위를 걸고 팽팽히 당겨 다시 반대쪽에 걸었다.
훌륭한 자태가 드러났다.
"화봉각궁(花鳳角弓)이라는 녀석이다."
그녀에게 더 없이 어울리는 활이었다.
동방의 각궁이 지닌 명성답게 활대의 탄성이 엄청났다.
은은한 뇌기까지 머금고 있었다.
사해련 비고에 보관할 가치가 있는 신병이었다.
물끄러미 화봉각궁을 바라보던 우문가율이 다시 한번 공야장천에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부디. 무사히 둘이 돌아오거라. 잘 부탁한다."
공야장천을 뒤로 하고 우문가율은 땅을 박찼다.
그녀는 전력으로 목란산을 향해 달렸다.
형산의 험준함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
하무백이 사라진 자리.
연진을 비롯한 소림승들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다.
"괴물이로고."
연진이 중얼거렸다.
제자들이 부디 빨리 오늘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항산은 나를 좀 보자. 나머지는 쉬어라. 예정대로 오늘은 이곳에서 묵어갈 테니."
연진은 항산을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하무백이 물었던 내용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항산은 알고 있는 바를 모두 말했다.
"관천사화궁이라······."
작게 중얼거 리는 연진.
그 역시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어느 순간부터 잊었던 이름이지만.
"그래. 네 말대로. 분명. 그런 일이 사파에서 있었다 듣긴 했었다."
아득한 옛일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
"헌데. 왜 하무백 그자가 그 여시주의 별호에 반응을 보인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얼굴.
"저는 사공이 아닌 무공에 사일자뢰궁이 반응한 것도 놀랍습니다. 기록과는 달랐으니까요."
항산이 주저주저 말했다.
무림병기백서의 내용이 틀렸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알았다. 너도 가서 쉬거라."
연진은 항산을 보내고 적당한 곳을 찾아 지필묵을 꺼내 본산으로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본디 항산에게 맡겼던 일.
자신이 직접 하게 되었다.
하무백이 그냥 떠난 덕분이었다.
전서응이 숭산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제 남은 전서응은 하나인가?"
과연 자신들이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하무백이 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겪으니.
자신이 없어졌다.
***
하무백은 희미하게 남은 공야휘연의 흔적을 쫓았다.
그 역시 추적술에 능했던 지라 공야휘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였다.
흔적을 지우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를 빠르게 만나는 게 더 중요했다.
이 활의 주인에 대해 물어봐야 했으니까.
하무백의 어깨에 빗겨 걸린 사일자뢰궁이 칠채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호북성과 안휘성의 경계에 가까운 마을.
공야휘연의 흔적은 이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을 안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더 이상 그 흔적을 쫓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안휘성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는 건데······."
하무백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한 거리를 보았다.
"아무래도 쉬어 갔겠군."
이곳까지 오는 동안 흔적은 변변찮은 마을을 지나 있었다.
흔적을 완전히 숨길 수 없는 곳들.
다른 사람들의 흔적에 자신의 자취를 감추려 노력한 모습은 보였으나.
그 우물이 있던 마을까지 추적해간 소림 땡중 놈들의 능력이라면 이곳까지도 찾아올 터.
아마 공야휘연도 그런 예상을 하고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렸을 것이다.
다만.
이곳은 사람이 많았다.
그녀의 흔적을 도무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공야휘연도 그 사실을 알 터.
"휴식이 간절했겠지."
하무백의 시선이 번화한 거리에 있는 객잔들로 향했다.
젊은, 아니 어린 여인이다.
하투제를 끝내고 곧장 제대로 씻지도, 쉬지도 못하고 도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흔적을 완벽히 지울 수 있는 번화한 이곳.
아마도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따뜻한 물에 수욕이 아니었을까?
사해련주의 손녀라면 더더욱.
그렇게 하무백은 객잔 하나하나를 찾았다.
점소이에게 철전을 쥐여주며 최근 혼자 찾아온 여인이 없는지 물었다.
용모는 의미 없었다.
얼굴을 바꿀 수 있었으니까.
하무백이 물은 것은 목욕물을 부탁한, 홀로 숙박을 한 여인이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번화한 곳이라지만.
여인 혼자 숙박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으니까.
"아, 있었습니다. 새벽에 홀로 떠날 예정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던 손님이었습니다."
그 손님도 그리 말하며 철전 하나를 쥐여줬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방에 묵었었지?"
하무백의 손에서 철전 하나가 더 나왔다.
"마침 비어 있으니 잠시 보여드리죠."
철전의 위력은 놀라웠다.
점심 무렵인지라 투숙객이 없다면 비어 있을 방.
마침 투숙객이 없었다.
하무백은 삼 층의 방으로 들어가 찬찬히 살폈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도 묵어갔을 방이다.
창문을 열고 밖도 살폈다.
그런 하무백의 눈에 창틀 아래쪽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창밖으로 나간 흔적이다.
'여기로군.'
새벽에 홀로 떠난다고 했으면서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으로 나갔다.
새벽에 나간 것이 아니다.
하무백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서부터 추적이 불가능해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적을 살피던 눈가가 꿈틀했다.
'발자국의 크기가 다르다.'
지금까지 추적해온 공야휘연의 발자국과 그 크기가 확연히 달랐다.
지금까지 여인의 발자국을 쫓아 왔는데, 저건 흡사 남성의 발자국······.
'남장을 한 건가?'
발자국 크기가 달라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이곳 투숙한 다른 남성이 창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으니까.
"혹시 이 방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그런 사람이 있나?"
"아뇨. 그런 분은 없습니다."
점소이는 똑똑히 기억한다는 듯 손사래 치며 답했다.
하무백은 그런 점소이의 손에 철전 하나를 더 쥐여주었다.
"고맙네."
객잔을 나오는 하무백.
'확실히 똑똑해. 남장할 생각까지라.'
하마터면 하무백도 흔적을 놓칠 뻔했다.
발자국의 크기가 달라진 것.
과연 소림승들이 찾을 수 있을까?
객잔 건물을 돌아 나오던 하무백이 힐끗 공야휘연이 묵었던 방을 쳐다보았다.
가볍게 손을 휘젓자, 그녀가 창밖으로 나오며 남겼던 흔적이 모두 지워졌다.
아무리 급해도 이 정도 시간은 있었다.
과연 소림승들은 계속 쫓아올 수 있을까?
하무백은 다시 객잔을 뒤졌다.
점소이들에게 조금 전과는 다른 물음을 던지며.
***
태초육신공.
무극, 혼돈, 허무, 암흑, 광휘, 여의.
여섯의 신공.
마교는 그중 온전한 허무를 얻었다.
천마무상공허신공 .
이것이 오백 년 전 온전한 천마신공의 이름이었다.
다섯 조각으로 쪼개진 후 마교에 남은 것이 천마신공이 되었다.
"흐음."
석천경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파였다.
사마후도와의 만남 이후 수라뇌령귀원심법의 비급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비급에 빠져 있기를 며칠 여.
보면 볼수록 알 수가 없었다.
뛰어난 내공심법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것이 허무의 조각에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비급을 아무리 뜯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이 심법에는 무언가 있다.
허나 구결을 아무리 궁구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마교 교주 석천경임에도.
이 비급을 대체 몇 번을 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 서체까지 모두 암기할 지경이다.
"익혀봐야 하는가?"
이미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는 석천경이다.
그랬기에 굳이 마교의 다른 심법을 익힐 이유가 없었다.
마교 모든 무공의 최상위에 있는 천마신공을 익혔는데 굳이 하위의 무공을 익히는 것은 시간 낭비였으니.
그러나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천마신공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실마리가 수라뇌령귀원심법에 있는 듯하였으니.
결국 석천경은 심법의 구결대로 천천히 내공을 움직였다.
천마신공은 잠시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그렇게 다시 새로운 심법 수련에 빠져들기를 얼마였을까.
내공이 수라뇌령귀원심법의 구결대로 혈맥을 도도히 흘렀다.
은은히 빛을 발하는 석천경의 몸.
천마신공이 경지에 이르렀기에 수라뇌령귀원심법을 익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심법을 운용하는 순간.
석천경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치켜떴다.
그럴 수밖에.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었다.
수라뇌령귀원심법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기운에 반응을 했다.
정확히는 구석에 잠시 밀어놓았던 천마신공.
바로 천마신공에 심법이 반응한 것이다.
'역시 허무의 조각에 반응하는 것인가?'
천마신공 역시 허무의 조각 중 하나.
다른 허무의 조각도 확인해 보아야 했다.
석천경은 중복된 조각인 허무진천결을 집어 들어 읽었다.
사마후도의 말대로였다.
수라뇌 령 귀원심법의 내공이 반응했다.
'헌데······.'
석천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반응하는데 천마신공에 대한 반응과 달랐다.
왜 이러는 것인지.
조각마다 반응의 형태가 다른 것인가?
그런 의문을 가지며 나머지 허무의 조각 비급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내공이 반응한다.
헌데 이번에는 허무진천결과 같은 반응이다.
이걸로 알아낸 사실은.
천마신공은 다른 허무의 조각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수라뇌령귀원심법이 천마신공과 허무의 조각에 반응한다는 것.
남은 허무의 조각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천마신공에는 왜······.'
천마신공 역시 허무의 조각 중 하나라 하였다.
그런데 왜 다른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다른 두 종류의 조각에는 같은 반응을 보였는데.
잃어버린 네 조각 중 두 조각을 되찾았다.
온전한 허무까지는 두 조각이 남은 상황.
그런데 최초의 한 조각이라 생각한 천마신공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알아봐야겠군."
석천경은 결국 폐관수련실을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더 깊은 곳에 있는 조사동.
이곳이야말로 천마신교의 뿌리였다.
지난 전쟁에서 패하면서 불타 사라진 천마신교의 본단은 뿌리에서 자라 올라간 줄기였을 뿐이다.
뿌리가 건재한 이상 언제고 천마신교는 부활하리라.
그렇게 조사동에 든 석천경은 역대 교주들이 남긴 기록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시작은 오백 년 전.
천마무상공허신공이 다섯 조각으로 쪼개진 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