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어, 엄마···!
"드, 드디어······."
공야휘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이제 안경이 정말로 지척이다.
도시의 누각들이 똑똑히 보이는 거리까지 왔으니까.
조금만 더 걸어가면 안경에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하루는 일단 푹 쉴 생각이다.
지금 지쳐도 너무 지친 상태였기에.
다음은 배를 타면 끝이다.
그러면 지긋지긋한 소림승들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제 오후 느즈막한 시간.
해가 지기 전에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콰콰콰콰콰!!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파공성.
불길한 느낌에 공야휘연은 다리에 힘을 실었다.
걸음을 더 빨리하다가 급기야 달렸다.
저 파공성의 목표가 왠지 자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 확신이다.
'어떻게······.'
얼마나 열심히 흔적을 지웠는데.
이렇게 정확히, 이렇게 빨리 쫓아오다니.
달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경.
저곳에 도착만 한다면 무언가 수가 날 것만 같았기에.
전력으로 달렸다.
숨이 턱에 차오르고 땀이 줄줄 흐르며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죽기 살기로 달렸다.
"잡았다. 크크크."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등줄기가 쭈뼛 서는 괴소가 공야휘연의 귀에 들렸다.
분명 뒤에서 들렸는데.
마치 귀신처럼 눈앞에 나타난 인영.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공야휘연은 멈추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서 안경을 향해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려 했다.
"클클. 귀여운 짓을 하는구나."
퍽.
그 말과 함께 등에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
공야휘연은 달리던 방향으로 그대로 나동그라져 땅바닥을 굴렀다.
그럼에도 공야휘연은 벌떡 일어나 안경을 향해 움직였다.
"쯧. 귀찮게 하는구나. 멈춰라."
그 한마디.
단 한 마디의 말이었는데.
공야휘연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온몸을 옭아맨 음습하고도 불길한 기운.
그런 기운에 붙들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이, 이게······."
어마어마한 고수였다.
그제야 공야휘연은 자신을 구속한 인물을 볼 수 있었다.
붉은 눈썹, 은은한 붉은 기가 도는 눈.
반짝이는 머리에, 다 헤진 가사.
행색은 승려가 분명했으나.
풍기는 기운은 그렇지 않았다.
사파 출신인 공야휘연이 음습하고도 불길하게 느끼는 기운이라니.
"제법 앙큼한 짓을 하면서 도망을 쳤구나. 본승은 소림의 현황이라 한다."
공야휘연은 두 눈을 치켜떴다.
이런 인간이 소림의 중이라고?
말도 안 된다.
차라리 마교나 혈교라고 했으면 믿었으리라.
현황은 그런 공야휘연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버릇없는 중생이로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무궁무진한 법이로다."
그러면서 힐끗 뒤를 돌아 안경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있는 그놈 때문에 그리 악착같이 가려고 하였더냐?"
현황은 안경에 자리한 하무백의 존재를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말에 공야휘연의 눈이 살짝 떨렸다.
안경에 대체 누가 있다고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시간만 많았다면 얼마든지 놀아줬겠다만. 본승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너를 데리고 어서 숭산으로 가야 한다."
그 말과 함께 가볍게 손짓하니.
공야휘연의 몸이 두둥실 떠올라 현황의 옆으로 움직였다.
현황의 곁 허공에 둥둥 뜬 공야휘연.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황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재미난 것들을 가지고 있구나."
공야휘연의 얼굴과 양 손목을 잠시 바라본 현황.
"뭐, 네년을 잡아가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지. 방장 사형 놈이 알아서 할 일. 나는 시일에 맞춰 네년을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서 가만히 날짜를 셈하는 현황.
"크크크. 서두르면 등봉현에서 잠시 쉬었다 갈 수도 있겠구나."
현광이 제시한 닷새의 기간.
지금처럼 움직인다면 하루 정도는 여유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사는 소인이 누구인 줄 알고 이리 핍박한단 말입니까?"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으로 일부러 성대에 상처를 낸 탓이다.
그 목소리를 들은 현황은 피식 웃었다.
"목에도 손을 댄 모양이로고. 클클. 내가 아닌 다른 놈이었다면 네년을 잡지 못했겠구나. 클클. 방장 사형 놈이 날 보낸 것은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어."
기물을 두 개나 가지고 있고, 스스로 목에 상처를 내 목소리를 바꿀 정도의 녀석이라면.
연진 일행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년을 못 잡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소, 소인은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공야휘연은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는 심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현황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네년의 옷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전에 입 닥치고 있어라. 본승 아니 본좌에게는 그딴 같잖 은 수작이 안 통하니."
공야휘연은 입을 다물었다.
저 눈은.
진짜였다.
여기서 계속 발버둥을 쳤다가는 정말로 자신의 옷을 전부 갈가리 찢어버릴 눈이었다.
입술을 깨문 공야휘연.
이제 정말 꼼짝없이 소림에 잡혀간다 생각하니.
입술을 파고든 잇새로 피가 흘러나왔다.
현황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방향을 가늠했다.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면 그냥 직선으로 곧장 내달리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으니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나름의 추적을 하느라 최단 거리로 움직이지 못했다.
직선으로 쭈욱 달려간다면 등봉현에서 술 한 잔 질펀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등봉현 기루의 기녀들은 영 별로인데······."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현황.
어쩔 수 없었다.
소림사가 자리한 곳이니 아무래도 기루가 많지 않았고 기녀를 구하기도 힘들었으니까.
소림사를 찾는 향화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등봉현이다 보니.
기루를 운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자리였다.
기녀를 찾는 현황의 말에 공야휘연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의 몸을 노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현황이 피식 웃었다.
"계집아. 괜한 걱정 말거라. 네년은 쓸데가 있다고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 했으니. 빌어먹을 방장 사형 놈.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몸뚱이를 한 계집을 잡아 오라 하고서는."
현황은 만환신면으로 가려진 공야휘연의 본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허나 옷으로 가려진 몸의 굴곡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는 몸매였다.
안심을 해야 하는 것인지.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인지.
공야휘연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이제 가자꾸나. 본좌는 지금 술과 계집이 몹시 고프니까."
그렇게 방향을 잡은 현황이 막 땅을 박차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흐음. 쥐새끼가 붙었던 것인가?"
앞만 보고 달려왔던 현황이다.
모든 정신을 공야휘연의 사기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앞쪽으로는 엄청나게 먼 거리까지 탐색이 가능했지만.
대신 뒤쪽으로는 무방비였던 것이다.
공야휘연을 생포한 이후에야 현황은 기감을 평소대로 돌렸고.
이제야 자신의 뒤를 쫓는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헌데.
현황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오호라. 계집이로구나!"
그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음습한 욕정이다.
지금 잡은 계집은 건드릴 수 없으나, 자신을 쫓아온 쥐새끼는 아니었으니까.
공야휘연은 또다시 변화한 상황에 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괴물 같은 괴승을 쫓아온 여인이 있다고?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
우문가율은 최선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다.
불길한 기운의 주인이 소림승들과 조우하고 곧이어 어딘가로 향하는 움직임에.
그가 딸아이를 쫓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그 불길한 기운의 주의를 일단 자신에게 돌리려 한 것이다.
그가 먼저 딸아이에게 도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는 것이, 목적지를 정확히 특정하고 움직이는 듯했으니.
일단 그 존재의 걸음을 멈춰 세워야 했는데.
아무리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도.
불길한 기운의 주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할 뿐.
다행이라면 밤에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는 것 정도?
우문가율은 정말 쉬지도 않고 쫓았다.
그래야 거리를 좁힐 수 있으니까.
벌써 사흘 밤 동안 잠을 못 잔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두 눈은 빛났다.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에.
그렇게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달리고 또 달렸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오후.
우문가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쫓아가고 있는 기운의 주인이 멈춰 섰기 때문이다.
목표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 속도를 더 높였다.
부디 그곳에 딸아이, 공야휘연이 없기를 바라면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패력천살궁의 안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니 멀리 그 존재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헤진 가사에 파르라니 깎은 민머리.
소림승의 모습이다.
그리고 바로 곁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한 여자.
'연아!'
외양 따위는 상관없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딸아이다.
자신이 한발 늦어서 저리 사로잡혔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맞아 들어갔다.
사람을 제압해서 능공섭물로 허공에 띄워 놓다니.
대체 경지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상대는 이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
그렇게 존재감을 키워도 알아차리지를 못하더니.
아직 육안으로는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먼 거리다.
그럼에도 허공에서 시선이 얽힌 듯한 느낌에.
우문가율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어깨에 빗겨 멘 활을 왼손에 들었다.
화살을 화봉각궁의 시위에 걸었다.
한계까지 당긴 활시위.
당장에 부러질 듯 끝까지 휘어진 활대.
우문가율은 모든 내공을 활과 화살에 실었다.
패력천살궁.
최후, 최강의 초식이자 극의.
패력멸신천살시(題力滅神天殺失).
우문가율의 내공을 한계까지 담은 화살에 강기가 맺혔다.
칠흑같이 검은 묵강.
그녀가 묵난화라 불렸던 이유 중 하나였다.
'화살도 신경 써서 챙겼어야 했어······.'
평범한 화살은 그녀의 내공을 담는 데 제한이 컸다.
담을 수 있는 내공은 더 많았으나, 화살이 받아들이지를 못하니.
강기를 담았다고는 하나 최고의 위력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제야 후회해봐야 늦었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핑!
우문가율이 활시위를 놓았다.
콰콰콰콰콰쾅!!!
패력멸신천살시는 당장에라도 세상을 박살 내버릴 듯한 기세로.
엄청난 파공음을 흩뿌리며.
빛살처럼 날아갔다.
현황은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엄청난 기운을 먼저 느꼈다.
곧장 보이는 화살.
묵빛 강기를 잔뜩 머금은 화살은 자신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를 뿜어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공야휘연 역시 화살을 확인했다.
그녀의 두 눈이 세차게 떨렸다.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패력천살궁의 패력멸신천살시.
거기에 묵강이라니.
게다가 이 괴승이 여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여인. 패력멸신천살시. 묵강.
이 세 가지가 가리키는 이는 단 한 사람이었다.
'어, 엄마······!'
상황이 상황이라서일까.
어머니보다는 엄마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고.
공야휘연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제법이로구나!"
피식 웃는 현황.
둥둥 떠 있던 공야휘연의 몸이 움직였다.
정확히 화살과 현황 사이의 공간에 바로 선 자세로.
이대로라면 화살이 격중하는 곳은 공야휘연의 가슴이다.
그럼에도 우문가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멀리서도 볼 수 있는 딸의 눈물에 가슴이 아려왔으나.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그저 화살을 지그시 바라볼 뿐.
그것은 공야휘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으나, 동요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쏜 화살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고 있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현황이야 흥미진진한 눈으로 화살과 공야휘연을 지켜보았다.
찰나의 시간 만에 공야휘연의 가슴 앞에 도달한 화살은.
그 순간.
급격히 꺾여 허공으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그대로 현황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꽂혔다.
이기어시(以氣馭失)의 경지!
우문가율은 눈으로 보고 의념만으로 화살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제법?"
갑작스러운 화살의 변화에도 현황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후려쳤다.
그 움직임은.
백보신권이었다.
회색빛의 불길한 느낌의 강기를 잔뜩 머금은 주먹과 묵강의 화살이 그대로 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에 땅과 하늘이 울렸다.
주먹과 화살의 격돌이 만들어 낸 폭풍에 공야휘연은 그대로 휩쓸려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크으으윽."
온몸을 두드리는 엄청난 고통에 절로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문가율은 땅을 박차고 달렸다.
저놈에게서 딸이 떨어진 이 순간 딸을 구해야 한다.
시위에는 어느새 화살이 세 개 걸려 있었다.
땅을 달리며 그대로 쏘아 보낸 화살.
무음시.
패력시.
천살시.
각기 다른 수법의 화살이 적을 노리고 세 방향으로 날아갔다.
현황의 오른 주먹은 여전히 패력멸신천살시의 묵강과 힘겨루기하는 상황.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세 개의 화살을 노려보는 그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보자 보자 하니까······."
그의 몸에서 폭사해 나오는 어마어마한 기운.
다시 한번 땅이 울리고 하늘이 떨렸다.
우문가율이 전력을 다해 현황을 공격했다. 딸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두 사람의 전투가 이어졌다.
***
안경 인근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충돌.
허나 그 여파가 안경에 미치지는 않았다.
충돌이 일어난 위치가 딱 그 정도 거리인 탓이다.
기감을 도시 하나에만 제한해서 펼치고 있는 하무백은 안경 밖의 저런 충돌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 위력이 하무백이 느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허나.
공기가 달랐다.
하무백이 그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공야휘연의 기척을 찾는 것을 잠시 멈추고 기감을 도시 밖으로 넓혀 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
그 여파가 안경까지 도달했다.
갑자기 하늘을 울리는 은은한 천둥 같은 소리에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들.
몇몇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도 어렸다.
하무백 역시 이런 변고를 느꼈고.
그는 즉시 공야휘연을 찾기 위해 펼친 기감의 범위를 바꿔서 도시 밖으로 넓게 펼쳤다.
안경 밖에서 무슨 사달이 난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넓게 퍼져나가는 기감.
그리고 거기에 걸린 존재들.
"이건······. 씨발."
한마디 욕설을 내뱉은 하무백의 신형이 다루에서 사라졌다.